기운을 차리고 일어나야 한다. 말은 그 시작이다.
“우리야 멀쩡하지. 한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널 잃는 줄 알았잖아.”
말을 하는 들의 목소리에 물기가 촉촉하다. 뫼는 잠시 눈을 감는다. 아무도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어디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앞뒤가 서지 않는다.
“왜?”
“우리 모두 멀쩡하지 않아.”
돌리지 않고 말을 꺼낸다. 다들 무슨 말인가 하여 뫼에게로 시선이 모아진다. 뫼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뫼는 잠시 그들의 시선을 피한다.
“우리가 멀쩡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기다리지 못하고 아미가 먼저 묻는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우린 여자의 상상 속에 갇혀 있어. 여잔 만 년의 사람을 쓰고 있어. 우린 그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이야.”
그제야 들은 뫼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맞아. 내가 뫼가 쓰러지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어. 뫼 말이 우리가 여자의 상상 속에 갇혀 있다고 했어. 그래서 확인해봤어. 여자가 화면에 쓰는 대로 우리는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었어.”
들이 뫼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마저 말한다.
“뫼, 들, 니들 왜 그래? 그리고 뫼, 넌 왜 그렇게 됐던 거야? 멀쩡하지 않다는 말은 뭐고? 너만 빼면 우린 모두 다 이렇게 멀쩡한데?”
이든은 뫼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하여 걱정이 밀려온다. 은근히 겁도 난다. 뫼가 어떻게 된 거라면 그건 사람 하나를 잃는 거나 다름이 없다. 여섯으로도 감질 나는 삶이다. 북적이며 떠들썩하게 어울리며 살아내고 싶다. 그런 삶을 꿈꾸기에 여섯은 팍팍하다. 한데 또 하나를 잃는 것은 아닌가 하여 두렵고 겁이 난다. 잃고 싶지 않다. 잃고 싶지 않아서 감정을 끝까지 드러내보지도 못하고 물러나거나 멈추곤 한다. 그게 삶의 일부가 되어 있다. 아리다. 낯선 눈길로 뫼를 내려다본다. 뫼가 힘에 겨운지 눈을 감고 있다.
“아니야. 우린 멀쩡하지 않아.”
뫼는 내렸던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누리와 이든, 아미와 버들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말을 안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모두가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가 되어 여자의 상상을 끊어내야 한다. 그것만이 삶을 되찾는 길이다.
“멀쩡하지 않은 건 너야? 아직도 정신이 가물가물한 거야? 들, 너는 또 왜 그래?”
아미는 뫼의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미뿐만 아니다. 버들도 이든도 누리도 뫼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갑자기 뫼와 들이 낯선 타인처럼 느껴진다.
“아니야. 우린 다 멀쩡하지 않아. 내 말 잘 들어. 우린 7987년 동안 잠을 잤던 게 아니야. 우린 단숨에 이 공간으로 보내졌어. 보낸 사람은 화면 속의 여자고. 물론 어떤 법칙은 적용이 됐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야. 우린 여자의 상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린 여자가 상상하는 대로 생각하고 움직이다가 여자의 상상이 멈추면 그대로 멈추는 삶을 되풀이하며 살아내야 해. 그걸 알아채지도 못한 체 말이야.”
뫼가 눈물겨운 시선으로 모두를 올려다본다. 아미와 버들, 이든, 누리는 알쏭달쏭한 눈빛을 하고 서로를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들만 옆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뫼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러니까 니 말은 우리가 여자가 상상하는 틀 안에서 살아내고 있다는 거야? 그런 거야?”
이든이 간추려 묻는다.
“맞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우리가 선택해서 사는 삶이 아니야. 여자가 상상해서 글로 옮기는 대로 우리는 살아내고 있을 뿐이야.”
입이 말라 말이 뻑뻑하다. 있는 힘을 다해 말을 토해낸다.
“그럼, 여자가 상상을 멈추면? 글 쓰는 걸 멈추면? 그러면 우리는 죽는 거야?”
아미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파고든다.
“아니? 멈춰. 모든 게 멈춘다고. 우린, 여자가 화면 앞에서 작품을 생각하고 글을 쓰고 있을 때만 살아 움직여. 못 느꼈어? 갑자기 내가 쓰러진 게 아니야. 여자가 화면을 떠나서 며칠을 나타나지 않았어. 그동안 모든 게 멈춰 있었고.”
“그럼 너는? 너는 어떻게 그걸 알게 됐어? 넌, 깨어 있었던 거야?”
아미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않은 채 묻는다.
“멈추려는 순간 그게 내 몸에 감지가 됐어. 그래서 내 의지를 끌어냈어. 맞서려고.”
“그래서? 맞섰던 거야?”
“아니? 힘이 달려서 맞설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니들처럼 멈추지도 못했고. 어정쩡한 상태로 버텨야 했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힘들었어. 그러느라 내 안에 있던 힘을 죄 써버린 거야. 그래서 여자가 다시 화면 앞으로 돌아왔을 때 버틸 힘이 없어서 쓰러졌던 거고.”
아미는 몸을 휙 돌린다. 더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 다음 말을 듣는 게 겁이 난다.
“혹시 니들은 뭐 이상한 거 없었어?”
다들 맥이 빠진다. 푹푹 한숨만 내쉰다. 눈동자도 허공을 헤매고 있다. 뫼의 물음에 대꾸할 마음도 일지 않는다. 입을 꾹 다문 채 한기가 든 것처럼 떨고만 있다.
“니들은 이상한 거 없었냐고?”
“몰라.”
누리가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피하지 마! 피해도 소용없어. 피해봐야 여자가 상상하는 대로 사는 것밖에 안 돼!”
“그럼?”
뫼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눈물이 흘러내릴 거 같다. 뜨거운 게 온 몸을 훑고 지나간다.
“맞서자고?”
“그러려고. 이든 넌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이대로는 살고 싶지 않아. 내 삶을 여자의 상상에서 온전하게 빼낼 거야.”
“난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내겐 아무 일도 없었거든. 솔직히 지금도 니 말이 다 와 닿지가 않아.”
“아냐, 이든. 우리에게도 있었어. 우리 앞에 사자가 있었잖아. 한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어. 한눈을 판 것도 아닌데 없어졌잖아. 그래서 너와 내가 두리번거리며 찾았잖아. 한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없었잖아.”
누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든도 뭔가 감이 오는지 표정이 싸늘해진다.
“그게 아마도 멈춰 버린 그 시간 동안에 일어났을 거야. 우리가 멈춘 사이에 사자가 없어졌다는 것은, 사자는 여자의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여자가 상상해서 그려내고 있는 건 우리 여섯뿐이야. 여자의 상상 속에 갇혀 이곳으로 온 것도 우리 여섯뿐이고. 그러니 사자나 다른 동물들은 여자의 상상과 상관없이 각각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니 말은 우리 여섯을 뺀 나머지는 만 년의 시간대에 맞춰져 움직이고 있다는 거지?”
아미가 따져 물을 때와는 달리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려놓고 묻는다.
“그럴 가능성이 짙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우리가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