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뱉어내는 들의 눈이 반짝인다. 뫼의 머리도 꿈틀거린다. 둘은 잽싸게 화면으로 다가간다.
“젠장, 읽을 수가 있어야지.”
눈 뜬 장님이나 다를 바가 없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노려보듯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다. 한데 이상하다.
“맙소사. 봤어? 니가 한 말이 화면에 쓰였어.”
들이 들떠서 말한다.
“지금 니가 한 말도.”
“정말 우리가 한 말들일까?”
들은 말을 해놓고도 영 믿어지지 않는다. 확인 차 뫼에게 묻는다. 하지만 뫼도 알쏭달쏭하다. 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우리 생각이 틀리진 않다면.”
말을 하면서 뫼가 손가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간다.
“뭐하는 거야?”
“글자 수를 세어보고 있어.”
“글자 수가 어때? 우리가 한 말 수와 일치하는 거야?”
“응.”
“하지만 빼곡한 이 글은 뭐야?”
“우리가 뱉어낸 말이 다가 아니야. 여잔 우리가 한 말들과는 상관없는 것들도 써내고 있어. 바로 그 증거야.”
“확실해?”
들이 또 다시 확인 차 묻는다.
“확실하다고는 말 못해. 하지만 생각은 그래.”
“이제 어쩌지?”
“글자를 익혀야 해. 그래야 여자가 쓴 걸 읽을 수 있어. 그래야 확실한지 아닌지도 알 수가 있고. 글자를 익혀야 다른 자료들도 읽어낼 수 있어.”
“어떻게?”
“우리가 한 말을 기억해서 찾아 읽어야 돼. 그럼 더디기는 하겠지만 읽을 수 있을 때가 올 거야.”
“그게 가능할까?”
들이 물끄러미 뫼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뫼의 말이 너무 낯설어 당장 와 닿지가 않는다.
“그럼 확인해보자! 내가 말을 할 테니까 니가 기억해둬! 그리고 손가락으로 글자가 써지는 첫 부분을 꼭 짚고 있어!”
뫼가 목을 가다듬으며 화면을 들여다본다. 화면을 보고 있는 순간에도 글자는 계속 올라오고 있다.
“읽을 수가 있어야지.”
뫼가 천천히 좀 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한다. 들이 얼른 손가락으로 짚어 표시를 한다. 뫼가 글자를 또박또박 읽어낸다.
“봐! ‘읽-을- -수-가- -있-어-야-지’ 방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이야.”
“맙소사.”
“여긴 방금 니가 했던 말이야. ‘맙-소-사.’ 봤지?”
뫼가 이번에는 들이 한 말을 읽어낸다. 글자 수가 딱 들어맞는다.
“니 말이 맞는 거 같아.”
“우리가 한 말을 되짚어 읽어내면 글자를 익힐 수 있을 거 같아.”
둘은 어느새 글자읽기에 푹 빠져든다. 마치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 같다.
“오늘은 그만 하자! 지금 이 말도 화면에 올라오겠지? ㅎㅎㅎㅎㅎㅎㅎ······.”
들이 말끝에 자지러지게 웃는다. 뭔가 해냈다는 게 뿌듯하고 대견하다. 여자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다가온다.
“왜?”
“그냥 우스워서. 여자의 상상이 먼저일까, 아니면 우리가 먼저일까? 것도 우습지 않아?”
“시작이야 여자가 먼저 했지. 지금은 니 말처럼 돼버렸지만. 여자야 당연히 자신의 상상이 먼저라고 생각하겠지?”
“우린, 당연히 우리가 먼저지?”
둘이 합창을 한다. 합창으로 말하고 나서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깔깔거린다.
“우리와 여자와의 한판 줄다리기가 시작된 건가?”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된 셈이지?”
“당연히 우리가 이기겠지? 우린 여섯이고, 여자는 혼자니까.”
“그렇게 만들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삶에서 여자를 떼어내야 돼. 그래야 우리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어. 아니면, 적어도 여자의 상상에서 놓여날 수가 있어. 이대로 여자의 상상에 우리의 삶을 떠맡길 수는 없어. 절대로.”
말을 하고 뫼가 입을 앙다문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마음의 다짐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들은 그런 뫼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낯설면서도 뫼답다. 그녀도 여자에게 질 수는 없다고 되뇐다. 삶이란 각자의 몫이다. 스스로 살아내야 한다. 그래야 후회할 자격도, 뿌듯해할 자격도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생각은 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든과 누리, 버들과 아미는 어찌 생각할까?”
들은 뫼의 마음을 떠본다. 뫼의 마음이 흔들릴 거란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확인을 해두고 싶다.
“걔들이 어찌 생각하든 상관없어.”
뫼의 말은 늘어짐이 전혀 없다. 한 치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는다. 들은 마음을 놓는다. 적어도 생각을 같이 나눌 친구 하나는 확보한 셈이다. 그보다 더 든든한 것은 있을 수 없다.
“버들과 아미도 오라하자! 그 애들도 알아야 하잖아.”
“나중에 이든과 누리가 오면 그때 얘기하자! 지금은 좀 더 알아보자!”
뫼와 들은 다시 화면 앞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화면은 어느새 까만 글씨들로 빼곡해져 있다. 둘 다 화면을 노려본다. 마치 여자가 거기 있기라도 한 듯. 여자가 있다면 째려보는 것으로 기를 죽이고 싶다. 하지만 화면엔 글씨만 가득할 뿐이다.
여자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거침없이 글을 써나가고 있다. 들도 뫼도 숨을 죽이고 그걸 뚫어져라 바라본다.
“뭘까? 지금 쓴 내용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우리의 모습.······.”
“눈치 챘겠지? 우리가 맞서기 시작했다는 거.”
“어쩜, 그것조차 여자의 머릿속에서 나왔을지 몰라.”
끔찍하다. 어는 거 하나 제 것이 없다는 게 마치 꼭두각시 인형 같다. 그걸 받아들이는 게 갑자기 너무 버거워진다. 한데 그것조차 여자의 상상이다. 생각은 한없이 뻗어가지만 모두 다 씁쓸하다. 아니 분노가 치민다. 여자가 앞에 있다면 박살을 내주고 싶다. 하지만 여잔 2013년에 있다. 지금으로선 7987년의 거리를 뛰어넘을 방법이 없다. 들은 뫼가 그랬듯이 이를 앙다문다. 그리곤 속으로 결코 여자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다진다. 그게 끝이다.
들의 머릿속 생각이 멈춘다. 숨만 들락날락하고 있다. 머릿속은 깨끗하게 비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