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와 들은 이든의 말에 엮여 서로 눈치를 본다. 들은 얼굴이 여전히 화끈거리는 것을 느낀다. 뫼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더 따지고 들 생각은 없다. 감정이 상처를 입기 전에 이든이 먼저 한 발을 뒤로 빼냈다. 서로 상처를 입히는 것은 이든도 원치 않는다는 뜻이다.
“자식, 미안하긴? 괜찮다는데.”
뫼가 투덜거림 조로 말한다. 이든이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어 보인다. 하지만 뫼는 아려오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이내 뼛속까지 뻗쳐간다. 한판 떠들썩하게 붙어보지도 못하고 물러서야 하는 상황이 아프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잃을까봐 두려워 감정을 바닥까지 드러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물러서야 하는 자신들이 찐득찐득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누가? 왜?’
아픔은 다시 그 생각을 끌어당긴다.
‘누가? 왜?’
뫼는 소리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다.
“니들 이 판국에 무슨 쓰잘머리 없는 말싸움이야. 뫼, 넌 화면에서 답을 찾아내! 숲은 우리 둘이서 다녀올 거니까. 니들은 뫼가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게 잘 챙겨!”
누리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말로 정리한다. 누리 말에 어정쩡한 말싸움은 깨끗이 마무리가 된다. 아주 개운하진 않지만 툴툴 털어버린다. 뫼가 발 빠르게 집안으로 들어온다.
‘누가? 왜?’
자꾸 그 물음이 되풀이 되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아리다. 꼭 찾아내겠다는 다짐이 마음 판에 꾹꾹 새겨진다.
켜놓은 화면에선 여자가 산길을 걸어가고 있다. 밖에 있는 동안 여자는 며칠을 살아냈다. 쌓인 눈이 많이 얇아져 있다.
들은 들어오다 멈추어 선 채 화면을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에도 산길을 걸어가는 여자가 잡힌다. 여자는 여전히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다. 다져진 눈길이 미끄러운지 내딛는 발걸음이 아주 조심스럽다.
2013년. 화면 속의 여자는 2013년을 살아내고 있다. 자신은 1만 년을 살고 있다. 화면 안과 밖의 시간적인 거리는 7987년이다. 하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시간적 거리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할 정도로 없다.
들은 잠을 자서인가 하고 생각해본다. 그런 것도 같다. 그뿐 아니다. 비교거리도 없다. 달라진 게 있어야 거리감을 느끼든가 말든가 한다. 한데 여자가 오가는 길은 산이다. 그들도 숲 가까이에 살고 있다. 두 곳 모두 자연이 옆에 있다. 차이가 있다면 여자가 두어 시간 가까이 머물다 나오는 건물과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이다. 자연을 가로막는 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 크기가 다르다. 안에 있는 물건들도 다르다. 그 이상은 더 찾아낼 수 있는 게 없다.
들은 자신의 집으로 건너온다. 그리곤 침대로 가서 벌렁 드러눕는다. 눈꺼풀이 살짝 무겁다. 잠이 서서히 그녀의 몸속으로 내려앉는다. 빠져나갈 거 같지도 않다. 대신 여자가 머릿속에서 빠져나간다.
뫼도 침대로 가 눕는다. 화면에서 떨어져 생각에 집중하고 싶다. 엉뚱하게 들이 떠오른다. 성별을 따지지 않았을 땐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한데 들이 여자라는 걸 알고부터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묘함이 다가온다. 그는 그 묘함을 잘근잘근 씹는다. 머릿속에 올려놓고 끊임없이 던져 올린다. 눈을 감아도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차츰 그의 눈동자가 풀린다. 들도 희미해져 간다. 모두가 그의 머릿속에서 빠져나간다. 더는 그 누구의 모습도 남아있지 않다. 어렴풋이 여자가 떠오른다. 모습은 희미하다. 여자인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렇게 느낄 뿐이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이 끊임없이 들린다. 잠속에서도 의식이 살아있는지 여자가 읊어대는 소리라 생각한다. 여자의 모습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을 때는 들려오지 않던,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다. 처음 듣는 목소리다.
‘만 년의 사람. 만 년의 사람.······.’
들려오는 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소리는 또렷하다. ‘만 년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뫼는 바짝 귀를 세운다. 중얼거림은 이내 멈춰버린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다시 들려온다.
‘만년의 사람, 만년의 사람.······.’
몇 번 그 소리가 되풀이 되어 들려온다. 입에 달라붙는지 알아보려는 중얼거림 같다. 그러더니 이번엔 다른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화면 앞에 있는 자판을 두드릴 때 났던 소리와 비슷하다.
‘뭐하고 있는 거지?’
뫼는 머리를 굴린다. 굴려도 굴려도 답은 보이지 않는다. 아침이 와서 눈을 뜰 때까지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이 그의 머릿속을 걸어간다. 간간이 멈추었다 다시 이어지기를 되풀이 하면서.
눈을 뜨자마자 그는 만 년의 사람을 떠올린다. 입에 올려보기도 한다. 여러 번 되풀이한다.
퍼뜩 그들이 누구인지 머릿속에서 튕겨져 나온다. 자신들이다.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 자신들의 삶이 누군가의 손에서 움직여지고 있다.
뫼는 급히 단추를 눌러 들을 찾는다. 반응이 없다. 잠을 자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다. 잠을 자도 침대에서 소리는 들을 수 있다. 그러니 받을 수 없는 상황은 아니다.
갑자기 겁이 난다. 들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그건 생각하기도 싫다. 한데도 생각은 거기에 붙들려 빠져나가지를 못한다. 잠을 자고 있을 때 들려왔던 목소리가 자꾸 걸린다. 그게 주문을 외워대는 소리가 되어 다가온다.
그는 다시 한 번 단추를 누른다. 여전히 들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들, 대답 좀 해!’
혼자 중얼거리고 있다. 들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슬픔이 북받쳐온다. 다리도 후들거린다. 주저앉아 버린다. 이든과 누리, 버들과 아미는 떠오르지도 않는다. 오로지 들이 없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뿐이다.
‘뫼! 아침 먹게 나와!’
들이다. 문이 열리고 들이 다가오고 있다.
들은 들어오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뫼를 발견한다. 눈길이 저절로 뫼에게로 간다. 뫼의 눈길도 들에게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