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을 굴려도 알 수가 없다. 너무나도 멀리 있어 손을 내밀어도 잡을 수가 없다. 손짓을 하며 다가가도 전혀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아득함만이 둘 사이를 채우고 있는 거 같다. 시간만이 아니다. 겉모습도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깡마른 모습이야 그렇다 친다. 하지만 나머진 다르다는 느낌이 없어야 한다. 한데 다르다. 너무도 다르다. 한 눈에 봐도 다르다는 게 확 들어온다. 그럼에도 그게 뭔지 콕 집어 말을 할 수가 없다.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2013년의 여자가 만 년의 컴퓨터 화면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좀 쓸쓸해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삶을 토막 낼 정도는 아니다. 삶이 이어지는 한 물릴 수 없는 쓸쓸함이다. 여자도 그걸 아는 눈치다. 그래 크게 맘을 쓰는 거 같지는 않다.
의무감처럼 여자는 산길을 걷는다. 의무감처럼 건물 안으로 들어가 운동을 하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산길이 끝나는 곳에서 여자의 모습은 잠시 사라진다. 하지만 곧 바로 다시 나타난다. 여자의 발끝이 보이고 이내 얼굴이 드러난다. 여자가 몸을 산길로 들이민다. 움직임이 없던 산이 여자로 인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또 다시 여자는 산길을 걸어 건물에 다다른다. 운동을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화면에선 그 과정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뫼는 생각에 잠겨 화면 속의 여자를 들여다본다.
여자는 지치지도 않는다. 아니 많이 지쳐있다. 걷는 게 힘에 겹다. 하지만 그걸 순간순간 떨쳐내고 밀어낸다. 삶이 모든 걸 내려놓지 못하도록 움직여댄다. 그러다 보니 늘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늘 같은 모습을 되풀이해내면서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나름 씩씩하려고 애쓰는 게 쓸쓸하다. 그걸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다. 살아있기 위해서는, 아니 살아있는 동안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만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그래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선다. 매일같이.
뫼가 조심스럽게 단추를 누른다. 화면이 멈추고 여자의 움직임도 산길에 어정쩡한 모습으로 멈춘다.
뫼는 화면을 보면서 뭔가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들을 흔들어 깨운다. 들은 살짝 신경질을 낸다. 아직도 잠이 고픈 모양이다.
“들, 일어나봐!”
“왜?”
들은 아직은 귀찮다. 달콤한 잠속에 조금 더 머물러 있고 싶다. 하지만 뫼도 그녀를 내버려둘 거 같지 않다. 눈을 부비고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걸음을 옮기다 멈춘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뭐야?”
“와서 좀 봐! 뭔가 달라지지 않았어?”
들이 화면 앞으로 몸을 끌고 간다. 그녀의 눈에도 뭔가 달라졌다. 한데 뫼나 마찬가지로 그게 뭔지 한방에 집어낼 수가 없다.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한참만에야 달라진 게 뭔지 알아낸다. 여자가 디디고 있는 땅이다. 거무칙칙하다. 하얗던 눈이 말끔히 사라졌다.
“눈. 눈이야.”
“눈이 왜?”
“없어졌어.”
뫼도 자세히 들여다본다. 들의 말대로 눈이 없어졌다. 밟혀 다져지긴 했어도 눈이 있었다. 한데 그게 말끔하게 없어졌다.
“눈이 어떻게 된 거지?”
뫼가 놀라서 들을 보고 묻는다.
“글쎄?”
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속 시원한 답을 해줄 수가 없다.
“눈이 다 녹았네.”
누리의 목소리다. 둘 다 동시에 뒤를 돌아다본다. 누리가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만큼 시간이 흐른 거야. 쌓였던 눈이 녹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어. 그러니까 지금 이 화면은 우리가 잠들기 전에 봤던 그 화면이 아닌 거야. 이 여잔 그 날 그 시간만 이곳을 지나간 게 아니었어. 매일 지나다니고 있었던 거야.”
누리가 깔끔하게 설명을 한다. 뫼와 들은 그제야 좀 궁금증이 풀린다.
“그러니까 같은 장면이 계속 되풀이 된 게 아니라는 말이지?”
뫼가 확인하듯 묻는다.
“맞아. 여자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이 길을 지나갔어.”
“한데 왜 우리 화면에 나타나는 거지?”
뫼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7987년 동안 본 적이 없는 여자다. 만난 적도 없다. 한데 여자가 화면에 나타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선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와 엮여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처음부터 우리와 끈이 닿아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은 그래.”
들은 여자에게서 뻗어오는 느낌을 잡아내려 한다. 그럼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무심한 듯 앞만 보고 걷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 흘렀다는 것도 알 수가 없다. 산길을 걸어가는 여자의 모습은 한결같다.
뫼는 들의 말을 되새김하며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핀다. 하지만 얼굴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줄곧 같은 표정일 뿐이다. 여자의 온몸으로 시야를 넓힌다. 차라리 그게 낫다. 얼굴만을 볼 때와는 뭔가 좀 달라 보인다. 그게 뭔지 알아내려 여자를 찬찬히 훑는다.
들이 생각하기를 멈추고 뫼를 본다. 뫼는 반응이 없다. 여자에게 꽂혀서 빠져나올 줄을 모른다.
“뫼, 그만 생각하고 다시 화면을 움직이게 해봐!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화면에서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몰라.”
들이 뫼의 어깨를 가볍게 흔든다. 뫼도 멈추기로 한다.
“눈이 내리면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아.”
누리가 거리낌 없이 말한다. 그는 눈이 내리는 장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뫼와 들은 낯선 눈빛으로 누리를 본다. 누리도 둘의 눈길을 느낀다.
“날이 추우면 비가 아닌 눈이 내려. 햇살이 닿으면 녹아내리고. 사람이 밟아서 짓이기면 다져지기도 해. 그럼 조심해도 넘어지는 수가 있어. 여자가 걸을 때 봤어? 덜 다져진 곳을 찾아서 밟았던 거? 그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야.”
누리를 바라보는 뫼와 들의 눈이 점점 더 커진다. 하얀 것이 눈이라는 것도 몰랐던 자신들과 달리 누리는 눈은 물론 그것의 속성까지도 죄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누리의 거침없는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
뫼와 들이 누리에게 부드러운 눈길을 보낸다. 누리가 좀 더 기억해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다.
“나도 그 이상은 기억이 안 나. 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그게 다야.”
누리가 기억이 바닥났음을 알린다. 뫼와 들의 눈빛이 힘없이 꺾인다. 누린 그게 마음이 쓰인다.
“여자의 겉모습에서도 알 수 있어. 날씨가 포근해지면 더는 저 옷을 입지 않을 거야.”
여자의 모습은 변화가 없다. 매일 그 차림이다. 그러니 여자의 모습에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차라리 눈이 낫다.
“아직은 저 옷을 벗어던질 만큼 날씨가 따뜻하지 않은 거야.”
“한데 왜 늘 이 모습이지? 시간이 흐르고 있다면? 입고 있는 옷을 떠나서 달라 보여야 정상 아니야?”
뫼가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누리를 본다.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거의 없으니까. 산도 여자도 추위가 머물고 있는 동안은 달라지지 않을 거야. 내 느낌이 그래.”
뫼가 고개를 끄덕인다. 누리의 말이 다 와 닿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누리의 말을 밀어낼 만한 기억이 없어서다. 기억도 없이 밀어낼 수는 없다.
뫼가 단추를 눌러 화면을 움직이게 한다. 여자가 어정쩡한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걷는 모습으로 바뀐다.
‘정말 그럴까? 시간이 흐른 걸까? 누리의 말대로 그걸 확인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한다. 누리의 말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득하다.
여자가 산길을 벗어났다가 다시 나타난다. 여전히 같은 모습이다. 처음으로 되돌아간 화면이 다시 시작되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누리의 말대로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그 다음 날의 새로운 시간일 것이다.
슬슬 눈동자가 풀린다.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몸이 꼬인다. 근질근질하다. 그만 일어나고 싶다. 뫼가 참지 못하고 화면 앞에서 몸을 일으킨다.
며칠 동안 화면만 보다 일어나는 일이 되풀이 된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만한 것도 찾아내지 못한다. 아예 벗어나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고 화면 앞에서 어정쩡하게 시간 때우기만 하고 있다. 그게 지겨워진다. 시간과의 싸움에 뫼가 손을 든다. 밖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이 길어져 간다. 여자가 아주 빠져나가 줬으면 하는 마음이 깃들기 시작한다. 여자에게서 마음을 떼려는 듯 앉은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나지도 않는다.
“햇볕이 따가워. 들어가자!”
들과 아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다들 따가운 햇살에 얼굴을 찡그린다. 열기가 주변을 맴돈다.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저절로 눈길이 화면으로 간다. 떼어내자 하면서도 여자를 떼어내지 못한 모양이다.
“눈이 내리고 있어!”
누리가 화면으로 다가가면서 소리친다. 목소리가 기쁨으로 들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