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억울함은 밀어둬야 한다. 뫼는 얼른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온다.
“한 번 차근차근 열어보자! 또 다른 것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잖아. 어쩜 2013년에 가 닿을 수 있을지도 몰라.”
자신만이 아니라 나머지 다섯도 막다른 골목에서 끌고 나온다. 뫼의 말에 다들 다시 눈길을 화면으로 옮긴다. 뫼는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문을 열어나간다.
“문이 하나가 아니야.”
중간쯤까지 열어보고 뫼가 말한다.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래도 지치기에는 아직 일러. 지쳐서도 안 돼.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야. 돌아가기로 하든, 여기 남기로 하든, 그건 우리의 까마득한 과거를 알아낸 다음이야. 그러니 힘을 내자!”
뫼가 힘을 돋워 말한다. 눈은 화면에 가 있으면서도 생각은 모두에게 머물러 있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어.”
버들이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뫼는 다시 다른 곳을 열고 들어간다. 누군가 화면을 가로질러간다.
“뭐야?”
“사람이야?”
“······.”
놀람 투성이의 말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시선은 모두 화면에 가서 머물러 있다. 모두의 시선이 화면 속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 여자에게서 떠날 줄을 모른다. 한데 낯이 설다. 너무도 다르다.
“얼굴은 사람이야. 한데 옷이 왜 저래?”
“옷뿐이 아니야. 다 달라.”
“맞아. 한데 왜 혼자 산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산이 왜 저렇게 헐렁해.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어. 그리고 풀은 다 어디 간 거야? 왜 풀이 없어?”
다들 말을 쏟아내기에 바쁘다. 모든 게 다 알 수 없는 것들뿐이다.
“겨울이라 그래. 눈이 내려 땅을 다 덮어버렸어.”
누리가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물음을 싹둑 잘라낸다.
“누리 너, 그걸 어떻게 알아?”
다들 놀라서 누리를 쳐다본다. 누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화면에서 눈길을 떼지 않는다. 점점 더 그의 얼굴이 화면 앞으로 다가간다.
“그냥. 그냥 내 안에 남아있었나 봐.”
“누리, 넌 기억을 다 잃어버리지 않은 듯해. 혹시 다른 것도 기억할 수 있어?”
들이 반색을 한다. 들은 어쩜 누리가 길잡이가 돼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주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아니? 이게 다야. 다른 건 나도 모르겠어.”
누리는 아주 가볍게 대꾸한다. 들은 실망하여 얼굴을 찡그린다. 뫼가 피식 웃는다.
“그래도 겨울이라는 것과 눈이 내렸다는 것은 알아냈잖아.”
“알았어. 뫼, 화면을 처음으로 옮겨봐!”
뫼가 화면을 처음으로 바꾼다. 다시 산이 나타나고 좀 전의 여자가 눈 쌓인 산길을 걸어간다.
“생각을 읽을 수는 없을까?”
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엉뚱한 말을 한다. 다들 낯선 눈길로 들을 바라본다.
“뭐? 생각을 읽는다고? 왜? 어떻게?”
뫼가 말을 꺼내 놓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들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묻는다.
“왠지 저 여자 지금 우리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
“들, 저 사람이 여자야?”
뫼가 놀란 눈빛으로 묻는다.
“응. 왜?”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 안의 뭔가가 그렇게 말했어.”
“우리 처음부터 다시 보자! 왠지 기억이 하나씩 살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뫼가 다시 한껏 들뜬다. 얼굴엔 미소도 번져간다.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온다. 하지만 더는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 몇 번을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화면 속에서 여자는 산길을 내려가더니 이상한 곳으로 들어간다. 숲이 아니다. 풀밭도 아니다. 아무도 없는 썰렁한 곳이다. 여자는 들어서자마자 뭔가를 누른다. 반짝하더니 어둡던 안이 밝아진다. 팔을 늘이고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구부리기도 한다. 그러더니 이상한 기구로 가서 다리로 기구를 움직인다. 발을 엇갈리며 기구 위에서 걷기도 한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여자는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그 사이 다른 여자들도 다녀간다.
뫼는 반복해서 여러 번 되돌린다. 여러 번 반복해서 보다보니 다들 심드렁해져 하품을 해댄다. 졸린 지 눈꺼풀이 반쯤 내려와 있다. 뫼도 눈이 감겨간다. 꾸벅꾸벅하다가 고개가 뒤로 젖혀지더니 숨소리만 새근새근 들려온다.
화면 속에서 여자는 혼자 눈 쌓인 산길을 오고간다. 늘 같은 시간에 나서서 늘 같은 시간에 돌아간다. 걸으면서 여자는 생각한다.
‘천 년 전에도 누군가 이 길을 걸어갔겠지?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이 길을 걸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지금은 나 홀로 이 길을 걷고 있는 거야? 언젠가 나도 더는 이 길을 걸을 수 없는 날이 오겠지? 그 위로 시간이 켜켜이 쌓여 가겠지? 천 년, 이 천 년 후에 이 길을 걸어갈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한 번이라도, 혹은 스치듯이라도 떠올려줄까?’
그녀는 낯선 느낌을 지워낼 수가 없다. 마치 죽은 자가 되어 묻혀있는 길을 미래의 사람이 되어 내려와서 걷는 느낌이다. 아련한 느낌만을 지닌 채 낯선 남이 되어 돌아온 느낌. 집에 돌아와서도 그녀는 그 낯선 느낌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백지 화면을 연다. 그리곤 그 위에 ‘만 년의 사람’이라고 쓴다. 2013년에서 1만 년으로 시간을 건너뛴다. 그곳에서 생명이 다시 꿈틀대게 하고 싶다.
여자의 생각에 지구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 환경은 파괴되고 북극의 빙하는 점점 줄어들고, 겨울은 그 여파로 눈이 잦고, 기온도 팍 내려가 올라올 줄을 모른다. 그뿐이랴! 남반부는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있다. 지구 곳곳이 이상 기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게 치유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지구는 점점 더 파괴 되어 가고 있다. 그 아픔이 독이 되어 인류에게 밀려오고 있다. 그렇다고 당장 인류가 멸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구의 멸망을 예언하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지만 그들의 예언은 모두 다 빗나갔다. 하지만 언젠가는 들어맞을 날이 올 것이다. 그 일이 닥쳐올 때가 있을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까마득히 먼 미래의 일도 아닐 것이다.
그녀는 2013년 현재 스물 한 살인 남녀 여섯을 심사숙고하여 골라낸다. 그들의 이름은 뫼, 들, 이든, 아미, 누리, 버들이다. 1만 년을 살아낼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7987년을 건너뛰어 1만 년이 되는 날 깨어날 것이다. 그때는 지구상에 인류가 더는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의 생각이다.
바탕이 마련되고 그녀는 다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그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지를 결정하는 게 만만치 않다. 그들이 살아낼 삶도 어떤 모습일지 알 수가 없다. 7987년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생각한다. 캡슐밖에 없다. 초소형 원자형태로 할까, 아니면 미립자 형태로 할까? 생각 끝에 그 긴 시간을 싹둑 잘라내기로 한다. 원자형 캡슐이든 미립자형 캡슐이든 그건 상상 속에 그냥 남겨두기로 한다. 생각은 거기에서 잠시 멈춘다. 피곤하다. 머리도 쉬고 싶어 한다. 만 년의 사람을 밀어낸다.
아침이 오고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하루가 또 다시 시작된다. 온 몸에 기운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일어나기 싫은 걸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숨을 쉬고 있는 한 살아있어 뇌가 꿈틀거린다. 그가 명령한다. 일어나라고. 그가 밥을 먹고 체력단련실에 가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몸은 거부하지 못하고 다시 그 길을 나선다.
겨울 추위에 다들 웅크리고 있는지 산길을 빠져나갈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그래도 몇 명은 다녀간 발자국이 있다.
체력단련실에 들어선다. 준비운동을 하고 하체단련 운동기구로 향한다. 기구를 다루는 건 어렵지 않다. 다가가기만 하면 몸이 저절로 알아서 움직인다. 다가가자마자 몸은 기구와 하나가 된다. 물론 숨은 헉헉거린다. 기구들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이를 악문다. 근육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기구의 무게를 힘껏 밀어낸다. 생각처럼 근육은 불어나지 않는다. 1년 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근력운동을 해댔음에도 팔과 다리에는 뼈와 거죽만 잡힌다. 이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놓을 수가 없다. 뇌가 멈추지 않으니까.
뇌가 잠시 욕심을 부린다. 운동기구와 씨름하는 것도 버거운데 한편에서 얌전히 엎드려 있는 ‘만 년의 사람’을 들쑤신다. 그가 참지 못하고 억지로 일어난다.
스치듯이 등장인물의 이름이 떠오른다. 뫼! 산처럼 단단하고 든든한 젊은이. 몇 번 더 이름을 소리 내어 읊어본다. 익숙하게 입안을 맴돈다. 그가 보고 싶어진다.
운동을 끝내기 무섭게 집으로 향한다. 뫼와의 만남에 들떠 돌아가는 발걸음은 제법 설레기까지 한다.
고개가 꺾이면서 몸이 휘청한다. 그 결에 뫼가 잠을 떨치고 깨어난다. 눈을 뜨자마자 당연한 듯 눈길이 화면으로 옮겨진다. 여자가 보인다. 그는 몸을 바로 세우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리곤 눈길을 걸어가는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