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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매이션 인간의 운명을 느끼기 시작하다


BY 한이안 2015-04-16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깨어난 시간도 얼추 비슷하다. 깨어난 방법도 모두 같다. 다들 나무에 부딪히면서 깨어났다. 자료의 안내를 받은 것도 다르지 않다. 물론 다 똑같은 건 아니다. 서로의 성격은 다르다. 알고 있는 것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뿐이다. 나머진 다른 게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운명도 같은 걸까?”

아미가 영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는다. 들은 아미의 말을 되새김한다. 갑자기 자신들의 존재가 비틀거린다. 운명이란 말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벼랑처럼 다가온다. 바람이 불어도 의지할 곳이 없는 벼랑 위에 서 있는 느낌이다.

설마?”

바람에 마구 비틀거리게 놔 둘 수가 없다. 바로 세우고 싶다. 하지만 힘이 없다. 마음과는 달리 똑바로 세워지지가 않는다. 더욱 비틀거리게 만들 뿐이다. 눈에서도 맥이 빠진다. 초점을 잃은 눈빛이 되어 방향 없이 흔들린다.

어떤 짓궂은 사람이 우릴 이렇게 만든 거지?”

버들은 재미있다는 생각을 한다. 거리낌 없이 툭 내뱉는다.

이상해. 니들은 안 그래? 우리 모두 같은 시간 동안 잠을 잤어.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야. 우리 모두 7987년 동안 잠을 잤다고. 이건 우리 삶에 끼어든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야.”

그냥 재미삼아 뱉은 말을 아미가 진지하게 받아내자 버들이 어깨를 으쓱한다. 아미의 시선은 뫼와 들에게 가서 머물러 있다. 둘 다 미소는 사라지고 없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이든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이든은 모르겠다는 몸짓을 하고 만다. 누리는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컴퓨터 앞에서 화살표 단추를 꾹꾹 눌러 화면을 바꾸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뫼는 아미의 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얽매여 빠져나오질 못한다. 들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미가 뱉어놓은 말을 곱씹는다. 달랑 여섯이다. 어렵지도 않을 거 같다. 아미 말대로 자신들의 삶에 개입된 누군가가 있다면 그가 이미 자신들의 운명도 정해놓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럴 거 같은 느낌이 몰려온다.

아미 니 말이 맞아. 아무래도 이상해. 같은 시간 동안 잠을 잔 것도 이상하고, 비슷한 시간대에 깨어나게 한 것도 이상해. 아미, 니 말대로 이건 우연이 아니야. 틀림없이 우리 삶에 끼어든 누군가가 있을 거야.”

들이 아미의 말을 되새김하듯 말한다. 아미의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들어와 요동치고 있어서인지 막힘이 없다.

어떻게?”

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아미도 들도 그건 자신이 없다. 단지 자신들이 7987년 동안 잠을 잤다는 것과 같은 시간대에 깨어났다는 것에서 얻어낸 추측일 뿐이다.

?”

아미와 들의 말이 꼬투리가 되어 이든도 물음을 던진다. 다들 추궁하듯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한 답은 알지 못한다. 서로의 눈길이 얽힐 뿐이다.

갑자기 왜와 어떻게가 뒤숭숭하게 머릿속에서 얽힌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았던 삶이 꼬이는 느낌이다. 물음에 끌려 다른 건 잠시 잊는다. 왜 아무도 없는 1만 년에야 잠에서 깨어났을까? 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을까? 끼어들었다면 누굴까? 어떻게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들 수 있었을까? 되풀이해서 물어보지만 답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7987년 전에도 지금처럼 사람이 없었을까?”

아미가 뜬금없이 생뚱한 걸 묻는다. 다들 멍한 눈빛으로 아미를 본다.

설마? 이렇게 드넓은 땅에 달랑 여섯만 있었을라고?”

아미의 말이 들을 다시 비틀거리게 한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덜하다. 자신은 없지만 말에 힘은 실린다. 뫼도 여섯은 아니었을 거라고 들의 말에 힘을 실어준다.

그럼 그들은 다 어디 간 거지?”

아미의 궁금증은 계속 이어진다. 뫼와 들, 이든은 멍한 표정이다. 아미의 입에서 말이 나올 때마다 머릿속이 더 엉망이 되어간다. 그러면서 점점 더 이상한 게 많아진다.

다들 어디 간 거지?”

죽었겠지? 아니면 아직도 떠돌고 있던가.”

버들이 창밖을 보면서 또 다시 말을 툭 던지다. 무심한 듯 하면서도 넷이 주고받는 말을 죄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넷이 동시에 버들을 본다. 버들은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다.

햇살이 너무 좋아. 마치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기 위해 떠오른 거 같지 않아?”

들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피식 웃는다. 엉뚱한 곳에 마음을 빼앗긴 버들은 더는 반응이 없다.

뫼는 아미의 물음을 되새김한다. 7987, 잠만 자서인지 가늠이 안 가는 시간이다. 그때 살았던 사람들은 버들 말대로 죽었거나 아직도 떠돌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7987년을 세는 데 얼마나 걸릴까? 그걸 시간으로 늘여놓으면 어떨까? 숫자 11시간, 하루 24시간, 1365일로 늘이고 그걸 7987번 반복하는 걸로 계산하면······.”

들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딱 벌린다. 너무도 까마득하다. 그들이 보낸 시간은 1년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간을 수없이 되풀이해야 1년이 된다. 한데 몇 년도 아닌 7987년이다. 머릿속에서마저 계산하기를 마다한다.

계산은 그만두자! 계산해본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뫼가 의미가 없다는 투로 말한다. 들도 받아들인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은 셈하기를 마다한다. 밀어붙여 봐야 나오는 게 없을 듯하다. 다들 이내 시무룩해진다.

뫼 말에 한 표. 난 그딴 것엔 관심 없어. 하루가 24시간이고 1년이 365일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난 니들을 만나서 이렇게 노닥거리는 거면 그만이야. 지금 즐거우면 그만 아니야?”

누리가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다가온다.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하다.

난 지금도 나쁘지 않아. 달랑 여섯뿐이어서 북적거림은 없지만 그렇다고 지겹거나 짜증나는 것도 아니잖아. 사람이 많으면 외려 다툴 일만 생길 걸?”

누리 니 말도 틀리지 않아.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현재도 무시할 수는 없어. 우리 자신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잘려나가 준다면 말이야.”

들이 한 가운데서 누리의 말을 저울질 한다.

왠지 그럴 거 같진 않-?”

뭐가 그렇게 심각한데? 마음을 파고들 만큼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누리는 뫼의 말을 곱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 딴지를 건다.

넌 아니야?”
나야 뭐 별로.”

“7987년 동안 잠을 잤어. 그리고 만 년에 깨어났어. 니가 원해서? 그랬던 거야?”
아미가 누리의 말을 참을 수 없었는지 격하게 말한다. 누리도 그 말에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알고 싶은 거야. 우리가 왜 7987년 동안 잠을 잤는지, 1만 년에야 잠에서 깨어났는지, 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지, 7987년 전에도 우리뿐이었는지, 아니라면 다들 어디 갔는지, 등등.”

아미가 떠올려 본 것들을 하나하나 늘어놓는다. 누리의 얼굴빛도 바로 시무룩해진다.

나도 들 말에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을 해봤어. 1시간 단위부터 시작해서, 하루 24시간, 1365, 그리고 이걸 7987번 반복. 그랬더니 너무 까마득해. 계산으로 가늠하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래서 들처럼 나도 그만뒀어. 누가, , 우리를 여기로 보냈는지도 다르지 않았어. 그래 그만두려 했어. 한데 시간을 가늠하는 것처럼 마음이 멈추지를 않아. 아득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인데 말이야.”
아미가 억울함을 들춰내듯 말한다. 아무도 섣불리 대꾸를 하지 못한다. 그냥 아미의 얼굴을 바라만 본다. 그리고 그들도 아미처럼 억울해진다.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 모두를 흔들어댄다. 온 몸이 예민해진다. 하지만 울음을 쏟아내지는 않는다. 다들 그것만은 참아낸다. 누리는 그런 넷을 낯설게 훑어본다. 다시 장난기가 샘솟는다.

그래서 하루 종일 이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겠다고? 겨우 고것 때문에? 오늘 그냥 끝장을 내려고?”
누리가 주먹으로 넷을 툭툭 친다. 다들 누리의 주먹질에 키득키득 웃는다.

그건 아니고?”

뫼가 누리의 주먹을 막는 몸짓을 하며 주춤주춤한다.

그게 아니면 얼굴부터 활짝 펴야지? 나처럼 말이야.”

누리가 활짝 웃는 모습을 해 보인다. 그러더니 깔깔 웃어대기 시작한다. 버들이 누리의 웃음에 끌려 다가온다.

나도 웃을래.”

버들도 누리를 보며 웃어댄다. 다들 누리와 버들의 웃음 속으로 끌려간다. 한참 웃음을 쏟아내고 나니 기분이 쫙 펴진다.

들은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다. 고개를 뒤로 젖힌다. 다들 웃음을 멈추고 들을 따라 고개를 젖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