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에 누군가가 달려오는 게 보인다. 자세히 보니 뫼다. 그녀는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뫼! 왜 그래?”
뫼는 헉헉거리기만 할 뿐 말을 못한다. 숨이 많이 찬 모양이다.
“들, 나 사나운 짐승을 만났어. 잡혀 먹힐까봐 겁이 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잠든 사이 겨우 빠져나왔어.”
뫼가 숨을 가다듬고서도 헉헉거림을 다 멈추지 못한 채 말한다.
“한데 넌? 넌 왜 여기 나와 있는 거야?”
“니가 달려오기에 무슨 일이 있나 해서.”
“내가 달려오는 걸 봤어? 어떻게?”
뫼가 의아해서 묻는다. 그 말에 들이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따라와 봐! 내가 보여줄 게 있어.”
들이 의기양양해서 화면으로 뫼를 데려간다. 뫼는 얼결에 들의 손에 잡혀 끌려간다.
“뭔데?”
“여길 봐!”
들은 화면에 바짝 얼굴을 가져간다. 뫼는 아리송하다. 들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감이 오지 않는다.
“뭐야? 그냥 화면이잖아. 이곳의 지리를 확인할 때 쓰는.”
“그래. 니 말이 맞아. 한데 그것만이 아니야. 화면을 잘 봐!”
들이 단추를 꾹꾹 누른다. 그때마다 화면이 이동한다. 뫼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이번엔 그의 몸이 구부정하게 화면 앞으로 숙여진다.
“화면이 바뀌고 있어?”
“맞아, 그거야. 이 단추들을 누르면 화면이 바뀌어. 그것만이 아니야. 화면을 켜놓고 있으면 우리들 움직임이 모두 화면에 나타나. 화면이 보여주는 장소에 있을 경우에.”
뫼는 신기한 듯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이게 다는 아닐 거야. 우리가 모르는 다른 게 더 있을 거 같아. 우리가 떠나온 공간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몰라.”
갑자기 뫼의 호기심이 한없이 부풀어 오른다. 그는 들이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해 본다. 화면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한 눈에 보인다. 숲에 있을 때보다도 더 짜릿하다.
“뫼?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그 생각을 했어.”
들이 들뜬 목소리로 힘주어 말한다.
“누굴까? 우릴 이 까마득한 시간대로 옮겨놓은 사람은?”
뫼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묻는다.
“왜 그랬을까? 왜 태어난 곳에서 살다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을까?”
들도 화면을 보고 있다.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서로 다른 걸 물어놓고 입을 다문다. 눈앞에도 머릿속에도 답은 없다.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막막하다. 모든 걸 다 잃었다. 기억도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기억하는 건 오직 이름뿐이다. 할 수 있는 건 막힘없이 나오는 말뿐이다. 그 외의 것은 어렴푸시라도 기억나는 게 없다. 그리고 지금은 둘뿐이다.
“우릴 이 까마득한 시간대에서 깨어나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
어느 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생각한다. 외면한다 해도 마땅히 할 게 없다.
“그랬겠지? 우리 외에 다른 사람들이 없다는 게 그 이유 때문이겠지?”
둘은 자신들의 상황을 나름대로 가늠해본다. 그렇다고 그게 답은 아니다.
“내일은 나도 숲에 가지 않고 찾아볼게.”
뫼도 들이 알아낸 사실에 마음이 끌린다. 숲은 두 번이나 다녀왔으니 잠시 미뤄 둬도 될 거 같다.
“정말?”
뫼의 말에 들이 신이 나서 펄쩍 뛴다. 뫼는 피식 웃는다. 들의 모습을 보니 그냥 웃음이 나온다.
“들? 만약 7987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떡할 거야?”
뜬금없이 7987년 동안 잠을 잤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꿈은 꿀 수 있을 거 같다. 그렇다고 장난처럼도 아니다. 생각도 마음도 묵직하다. 얼굴에 떴던 미소도 싹 거둬진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7987년이 자신을 짓누르는 느낌이다.
“돌아갈 수 없어서 우릴 여기로, 이 시간대로 보낸 거 아닌가?”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글쎄? 지금은 뭐라 말할 수 없을 거 같아. 거기가 여기보다 좋다면 모를까 나쁘다면 난 돌아가지 않을래. 넌?”
“그때 살았던 사람들, 지금 우리와는 많이 다르겠지?”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다.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으면 한다. 그게 아니라면 너무 억울할 거 같다. 억울해서 조용히 살아내지 못할 거 같다.
“물론이지. 여기와도 많이 다를걸?”
“그래. 그럴 거야?”
뫼가 짧게 말하고 만다. 들도 그의 마음을 알 거 같다. 그래 내버려 둔다. 둘 다 말을 잊은 듯 화면만 바라본다. 묘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낯선 느낌이 둘의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 둘 다 그 느낌 속으로 젖어든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가 없다.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없다. 그럼에도 건너 뛴 시간만큼이나 깊은 곳에서 다가오는 느낌만은 떨쳐낼 수가 없다.
“들, 우리 둘뿐은 아니겠지?”
자신이 없다. 그래도 둘은 아니었으면 한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다른 누군가를 떠올린다. 옆구리가 허전하다. 들이 있음에도 처음 눈을 떴을 때의 허전함은 다 가시지 않고 있다. 둘만으론 채워지지 않을 모양이다. 생각이 자꾸 다른 누군가를 끌어들인다. 뫼가 짧은 침묵을 깨고 머릿속에 꿍쳐둔 말을 어렵게 꺼낸다.
“설마? 우리 둘만 이곳으로 보내기야 했겠어?”
“니 생각도 그렇지?”
말이 참 무겁다. 돌멩이를 주렁주렁 달고 오가는 거 같다.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우리가 있는 이곳이 감옥이 아니라면 말이야. 이곳으로 보내진 게 우리를 이곳에 가둬두기 위한 게 아니라면 우리 둘만 보내진 않았을 거야. 틀림없어.”
들이 힘주어 말한다.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적어도 자료가 말했던 그 하늘이 용서하지 못할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녀도 다른 누군가가 가슴 시리게 그립다. 둘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그래 그런지 그녀의 가슴도 허전하기는 마찬가지다.
“니 말이 맞아. 둘만이 아니라면 곧 만나게 되겠지? 우리가 생각을 쥐어짜내며 기다리지 않아도 만나게 되겠지. 우리 더는 그 생각에 매달리지 말자! 대신 화면에서 우리의 과거를 찾는 일에 매달리자!”
뫼가 시름을 내려놓은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들이 웃는다. 하지만 속으론 뫼의 마음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자신의 바람도 불안하다. 바람이 비켜가는 걸 온몸으로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게 두렵다. 뫼도 그렇다. 그래 아예 생각을 끊어내고 싶은 것이다. 바람이 밀리다 스러진 곳에서 주저앉을까봐 겁이 난다. 그녀는 거칠게 도리질을 한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애써 생각을 돌린다.
“그래. 우리 7987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사는 건 여기서 살더라도 우리가 여기에 보내진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들이 마음을 달랜 후 애써 힘을 주어 말한다.
“맞아. 알아야 마음이 개운할 거 같아.”
뫼도 힘주어 대꾸한다. 그렇게라도 해서 마음속의 돌덩이를 밀어내고 싶다.
“뫼, 오늘은 이만 하자! 내일을 위해서 잠을 자두자!”
말을 끝내고 들이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두려움도 겁도 모두 제치고 제 때 알아서 찾아와준 잠이 고맙다.
“이상해? 오늘은 자꾸 눈이 감겨. 더는 못 참겠어.”
“알았어. 나도 가서 잘게. 잘 자!”
뫼는 들을 남겨두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 다음 침대로 가서 벌렁 드러눕는다. 눈을 감지만 머릿속이 너무 말끔하다. 잠이 오지 않는다. 7987년이 깜깜한 밤처럼 어두의 덩어리가 되어 둥둥 떠다닌다. 꺼낼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문득 숲에서 보았던 짐승의 모습이 떠오른다. 빨간 피를 묻힌 채 잡아온 먹이를 뜯어먹던 모습이다. 먹이로 물려와 축 늘어져있던 짐승의 모습도 다가온다. 먹고 먹히는 게 자연인 모양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친다. 얼른 그 생각을 털어낸다. 그리고 7987년을 다시 끌어온다.
‘7987년’
그는 건너뛴 시간을 입에 올려본다. 숫자는 단순하다. 길지도 않다. 하지만 생각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다.
잠이 올 거 같지 않다. 그는 일어난다. 화면 앞으로 가서 앉는다. 그리곤 들이 했던 것처럼 단추를 눌러 화면을 이리저리 바꾸어 본다. 재미가 붙는다.
‘어? 거 괜찮네? 어디까지 볼 수 있는 거지? 꼭 숲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해.’
뫼는 제 흥에 흠뻑 젖는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기까지 하고 있다.
‘여긴 어디지? 이곳은 아닌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가 없다. 그는 다시 처음 화면으로 돌아온다.
시간이 많이 지난 모양이다. 피곤한지 몸에서 신호를 보낸다. 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품이 나오기 시작한다. 침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침대로 가서 다시 벌렁 드러눕는다. 바로 잠속으로 빠져든다.
사방은 어둠으로 가득하다. 어둠뿐이다. 태양이 벽을 가르지 않았다면 어둠은 밀려가지 않았을 터다.
들이 먼저 기지개를 켠다. 잠자리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깜깜했던 창밖이 환하다. 아침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창가에 앉아서 숲을 바라본다. 나무들이 빼곡하다. 숲이 그녀에게 7987년처럼 보인다.
뫼가 건너오기를 기다린다. 그도 깨어서 아침을 맞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뫼는 꿈속을 헤매고 있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는 서서히 조바심이 난다. 벌써 여러 번 문 쪽으로 눈길이 움직인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국 일어나 밖으로 나선다.
뫼의 집 문이 잠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