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가 숲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들의 시선이 뫼를 따라간다. 뫼가 숲으로 난 길을 따라 뛰어가더니 이내 사라진다. 숲이 그를 집어삼킨다.
들은 안으로 들어온다. 안은 너무도 조용하다. 뫼를 따라 나설 걸 하는 뒤늦은 아쉬움이 찾아온다. 침대에 가서 드러누워 본다. 뫼와 함께 깔깔거렸던 걸 떠올리며 웃어보려 한다. 웃음소리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다. 혼자인데도 멋쩍다. 벌떡 일어난다.
안을 휘 둘러본다. 어제와 다른 게 하나도 없다. 어제와 똑같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온몸을 핥고 지나간다. 진저리가 쳐진다. 달라진 게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시간이 끔찍하다. 하지만 달라지게 할 방법이 없다. 아니 모른다. 머리를 마구 흔든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시간은 스스로 달라지지 않는다. 그냥 고여 있을 뿐이다. 고여있는 시간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신호를 내보내는 단추를 찾아서 누른다. 답신이 없다. 더는 사람이 없는 것인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7987년, 그도 뫼처럼 그 긴 시간동안 잠을 잤다. 뫼보다 며칠 먼저 깨어났을 뿐이다. 하지만 뫼나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떠올려보려 하지만 머리만 지끈거리고 아플 뿐이다. 떠올리는 것은 미뤄두기로 한다. 서서히 깨어나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자료도 그렇게 말한 것 같다.
화면 앞엔 신호를 내보내는 단추 외에도 많은 단추들이 있다. 자료는 그것들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말해주지 않았다. 이유도 말해주지 않았다. 눌러도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단추 하나에 손끝을 갖다 댄다. 박살이 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다가온다. 하지만 이내 밀려난다. 누르고 싶은 마음이 앞서 나간다. 그녀는 슬며시 손끝에 힘을 준다. 겁이 다 물러나지 않았는지 눈은 저절로 감긴다. 차마 눈뜨고 확인할 수가 없다. 한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힘껏 눌러봐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다른 단추들도 눌러본다. 이상하다. 뭔가 잘못 된 모양이다. 그러자 그 일도 심드렁해진다.
뫼가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데 물어볼 수도 없다. 그는 옆에 없다. 숲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뫼는 짜릿했다고 말하는데 들은 생각만 해도 겁이 난다. 큼직한 아름드리 나무들을 떠올리면 꽉 우거진 숲이 답답하다. 숨통이 조여 온다.
그녀는 화면에서 뫼를 찾아보기로 한다. 어쩜 화면에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번엔 거리낌 없이 단추를 누른다. 며칠 전 보았던 그 지도만이 보인다. 뫼는 보이지 않는다. 위치를 나타내주는 표시인 모양이라 생각한다. 화면을 켜둔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루하다. 두 팔을 번쩍 올리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시선은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창밖은 해가 짱짱하다. 하늘은 푸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비어 있다. 간간이 뭔가가 가로질러 날아간다. 문밖에 나가 뫼가 있는 숲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시간은 근질거릴 정도로 더디 간다. 뫼와 깔깔거릴 때는 잘만 가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뫼를 따라 나설 마음은 머뭇거려지기만 할 뿐이다. 다시 돌아와 화면으로 간다.
화면은 그대로다. 그녀는 다시 화면 앞에 앉는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누르고 싶은데 무엇을 눌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단추를 하나하나 살핀다. 아무리 살펴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없다. 그래도 멈추지 못한다. 이번엔 화면 바로 아래에 있는 단추를 눌러본다. 화면이 움직인다. 이내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가온다. 하지만 잘못 본 건 아니라고 생각을 바로잡는다. 분명히 화면이 꿈틀했다.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다. 그리곤 다시 눌러본다. 정말 잘못 본 게 아니다. 찔끔 움직였다. 이번엔 멈추지 않고 되풀이 해서 누른다. 화면이 바뀐 게 확연히 보인다. 처음과는 다른 낯선 곳이다. 다른 단추도 눌러본다. 다른 단추도 마찬가지다. 단지 방향이 바뀔 뿐이다. 그녀는 화면을 처음으로 되돌린다. 그런 다음 또 다른 단추를 누른다. 옆으로만 움직이던 화면이 위로도 움직인다. 그녀는 단추들을 눌러 화면을 바꾸고 되돌리고를 되풀이한다. 잘하면 뫼가 있는 숲을 들여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굳이 따라가지 않아도 함께 할 수가 있다. 그녀는 그 생각을 화면에서 끌어내기 위해 화면 앞을 떠나지 못한다. 시간도 잊는다. 오로지 뫼에게 다가갈 생각으로 가득하다.
뫼는 어제보다 더 숲 깊숙이 들어와 있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 열매를 따 먹는 짐승들과 몇 번 마주쳤다. 그때마다 안도감과 함께 반가움이 스쳐갔다. 하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녀석들도 그의 발걸음을 방해하지 않고 제 갈 갈로 갔다.
어디선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심상치가 않다. 소리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먹어 힘을 저장한다는 사나운 짐승일 거라고 생각한다. 행여 그 짐승의 눈에 띌까 겁이 난다. 몸이 바짝 움추러든다. 만약의 경우 줄행랑을 쳐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수그린 채 귀를 소리가 났던 쪽으로 가져간다. 희미한 소리가 귀에 잡힌다. 발자국 소리 같다. 뭔가 끌려오는 소리 같기도 하다.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다. 가까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그는 바짝 긴장한 채 몸을 나무 뒤로 숨긴다. 나무 위에서 좀 전까지 들려오던 바스락거리던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온 신경이 소리를 향해 모아진다.
몸집이 큰 동물 하나가 작은 동물 하나를 물고 다가오고 있다. 몸집이 작은 동물은 죽었는지 축 늘어져 있다. 온몸에 오싹 한기가 돈다. 몸이 더 바짝 움츠러든다. 눈은 한곳에 머문 채다.
죽은 것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 산 것의 입으로 들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먹잇감으로 잡힌 짐승의 몸통 절반이 사라진다. 그때까지도 뫼는 자리를 뜨지 못한다. 겁에 질려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지켜보는 사이 그의 입에 침이 고인다. 침이 꼴깍꼴깍 목으로 넘어가기까지 한다. 그러고 보니 아침을 먹은 지가 꽤 되어간다. 배가 고프다. 하지만 손이 닿는 곳에는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 먼 곳에 있다. 있다고 해도 손을 뻗을 수가 없다. 눈 앞의 짐승 때문에 몸을 움쩍달싹 할 수가 없다.
그는 눈에 띄지 않게 달아날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쉽지 않다. 잘못하다간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 먹고 남은 반토막이 눈에 크게 들어온다. 눈길을 돌리고 싶은데 돌려지지 않는다. 오싹한 기운이 몸을 휘감는다. 먹이감이 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죽음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와 닿는다. 그 생각에 묶여 움직이질 못한다.
한참이 지난 후 짐승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하품을 늘어지게 해댄다. 졸리는 모양이라고 뫼는 생각한다. 달아날 기회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뫼는 그 생각에 집중한다.
짐승의 몸이 축 늘어진다. 그는 살금살금 꽁무니를 빼낸다. 숲 가장자리로 나올 때까지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뒤쫓아올까봐 발소리도 내지 못한다. 숲 가장자리에 다다라서야 그는 뛰기 시작한다. 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이 저만치 보인다. 그는 힘껏 달린다.
들은 깜짝 놀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