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오가며 잘라내고 밟히고 해서 풀밭을 끼고 이미 길이 나 있다. 게다가 매번 오갈 때마다 가장자리의 풀들을 쳐내서 길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그새 집과 숲 사이에 길이 시원스럽게 뚫려 있다.
시원스럽게 뚫린 길로 시선을 옮긴다. 가슴이 활짝 열린다. 들의 가볍게 뛰는 발걸음 소리가 가슴으로 스며든다. 흥얼거림도 마음을 적신다. 겁은 다 물러간 생동감이 그 안에 가득하다. 그는 생각한다. 들도 조금씩 숲에 다가가고 있다고. 자신이 손을 잡고 이끌기만 하면 될 거라고.
“들?”
“왜?”
“숲도 이 길과 다르지 않아.”
뫼가 입안에서 몇 번 굴려보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행여 들의 마음이 다치기라도 할까봐 말이 어눌하게 나간다.
들의 흥얼거림이 뚝 그친다. 가볍게 튀어 오르던 그녀의 발걸음도 얌전해진다. 뫼는 아차 한다.
“그래도 숲은 싫어. 난 사나운 짐승은 질색이야. 무섭다고. 저번에 본 그 기다란 짐승이 소름끼치더라. 난 숲은 가지 않을 거야. 너나 다녀와. 그래도 해가 서쪽 하늘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돌아와야 해. 알았지?”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예감이 빗나가지 않는다. 잠시 고개를 들었던 기대가 푹 꺾인다.
“알았어. 싫다면 다시는 꺼내지 않을게.”
뫼는 아무렇지 않은 듯 들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함께 갔으면 하는 생각이야 꿀떡같지만 그 생각은 슬그머니 집어넣는다. 더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혼자 안타까움을 곱씹을 뿐이다.
“어떤 열매를 먹자고 했더라?”
뫼가 어색함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말을 바꾼다.
“나뭇가지에 달린, 크고 붉은 빛이 도는 먹음직스런 열매.”
들이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한다.
“아참 그랬지? 깜빡했어. 따서 가져올 것은?”
“거뭇거뭇한 열매와 노르스름한 빛이 나는 열매. 오늘은 그 열매들도 먹어보자!”
뫼가 했던 말을 잊은 듯 그녀의 목소리에 다시 활기가 얹혀 있다. 그는 그녀의 말을 곱씹는다. ‘거뭇거뭇, 노르스름’ 처음 듣는 단어들처럼 낯설다. 들이 말하는 열매는 눈앞에 다가오는데 단어들의 느낌은 생소하다.
“너 색깔들을 모두 알고 있어?”
그의 귀가 유난히 쫑긋 선다.
“응. 왜?”
“아 아니.······ 그냥.”
뫼는 얼버무린다. 자신은 아직도 색을 다 가리지 못한다. 색깔과 관련된 어감을 살려내는 말은 더더욱 모른다.
“처음부터였어?”
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뒤숭숭하게 다가온다.
“음.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라고? 그런 거였군. 나와 들이 다른 것도 그런 거야. 우린 서로 다른 것들을 지니고 있는 거야. 어쨌든 검정빛이 나는 것은 거뭇거뭇이고, 노랑빛이 나는 것은 노르스름한 거야. 뫼, 잊지 말고 기억해.’
뫼가 열매들과 색깔을 연결시켜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그러느라 발걸음이 멈춘다.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들은 뫼의 뒤꼭지를 바라보며 기다린다. 하지만 뫼는 깨어날 거 같지 않다.
“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어?”
들이 뫼를 툭 치며 말한다. 뫼는 혼자 삐죽 웃는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뫼가 얼버무리며 들의 질문에서 빠져나간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몸을 움직여 나무 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열매의 향이 콧속으로 가득 들어온다. 향이 침샘까지 가 닿았는지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이내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킨다. 열매를 따 한 입 베어 문다. 달달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맛이 죽여줘.”
들이 군침을 꼴깍 삼킨다. 뫼가 얼른 손을 뻗어 열매 하나를 나뭇가지에서 떼어낸다. 그리곤 들에게 건네준다. 들도 한 입 크게 베어 문다. 그녀의 얼굴에 금새 웃음이 뜬다.
“어때?”
뫼가 들은 쳐다보고 있다가 묻는다.
“니 말대로야. 맛이 기가 막혀.”
“그렇지?”
들의 말에 뫼의 기분이 우쭐해진다. 나뭇가지를 둘러보며 크고 먹음직스러운 걸로 골라서 살짝 비틀어 딴다.
“받아! 하나씩만 더 먹자!”
달콤한 맛도 맛이지만 아삭아삭 씹히는 맛도 끝내준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맛과 소리를 음미한다.
“맛있어.”
뫼가 쳐다보자 들이 미소를 짓는다. 뫼도 웃음으로 반응한다. 그리곤 다시 한 입 크게 베어 문다. 마지막엔 남은 것을 입안으로 쏙 집어넣는다. 그리곤 거뭇거뭇한 열매와 노르스름한 열매가 있는 곳으로 간다. 상처를 입지 않은 먹음직스런 열매들이 가득하다. 큰 것으로 골라 따 꺾어든 넓은 잎 위에 담는다. 열매들이 수북이 쌓인다.
“가자!”
햇살이 온몸을 포근하게 감싼다. 발걸음이 가볍다. 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모르게 콧소리가 흥얼흥얼 새어나온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둘은 침대에 가서 벌렁 드러눕는다. 그리곤 깔깔깔 웃는다. 배고픔은 가셨고, 근심이나 걱정도 물러가고 없다. 몸뿐이다. 몸만 홀로 홀가분하다.
“좋다.”
“나도 좋다.”
둘은 또 다시 자지러지게 웃는다. 웃음 끝에 숨이 헉헉거린다. 뫼가 숨을 몰아쉬며 일어난다.
곁눈질로 들의 얼굴을 살핀다. 숲에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에 일어나기는 했지만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할 일은 미루지 말고 해내야 한다.
“숲에 다녀올게.”
들의 표정이 굳어진다. 뫼의 얼굴에도 웃음기는 사라지고 없다.
“내일 당장 죽는 게 아니라면 우린 숲을 알아야 해. 그래야 숲과 더불어 살 수가 있어. 내가 숲에 가 있는 동안 넌 신호를 보내! 누군가 우리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린다. 맑았던 마음에 먹구름이 모여든다. 뫼가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다가온다.
뫼는 손에 막대를 들고 밖으로 나선다. 이전보다는 많이 가셨다지만 두려움이 아예 다가오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들에게 그 마음을 내비추고 싶지 않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돌아와!”
들이 뫼의 등에 대고 외친다. 목소리에 힘이 없다. 뫼는 돌아서서 손을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