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렁인줄 알았는데 수렁이 아니다. 수렁 속에서 솟아오른다. 갑자기 앞에 흐릿한 형상이 다가와서 멈추어 선다.
‘누구지?’
뫼는 앞에 멈춰선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여자는 그를 알고 있는 듯하다. 따뜻한 시선을 끊임없이 그에게로 보낸다. 남자도 다가와 선다. 남자의 험악하던 얼굴이 차츰 풀어진다. 그러더니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둘이 번갈아 가며 뭐라고 말을 건다. 하지만 그는 남자의 말도 여자의 말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뫼는 멍하니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때 여자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온다. 그가 얼른 여자의 몸을 피한다. 이번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으려 한다. 그는 여자가 다가온 만큼 몸을 뒤로 빼낸다. 여자가 다가오다 멈추어 선다.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가득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솜사탕처럼 부드럽다.
그 틈에 뫼는 몸을 돌려 곧장 앞으로 달린다. 여자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다행이 여자는 따라오지 않는다. 한참을 달려와서 겨우 멈추어 선다. 숨을 헉헉거린다. 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앞은 허허벌판이다. 두렵다.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다. 한데 어디를 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들을 부른다. 그러다 깨어난다.
들은 여전히 새근거리며 자고 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들이 자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본다.
‘돌아올 거지? 가봐야 허허벌판일 뿐이야. 거기서 헤매지 말고 여기로 돌아와! 둘이 있으면 혼자 헤매는 것보단 나을 거야. 그러니 어서 돌아와! 허허벌판이 너를 채가기 전에 돌아오라고.’
하지만 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반응이 없다. 뫼도 포기할 수가 없다. 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시간이 멈춘 듯 움직이지 않는다. 들도 뫼도 고대로다. 움직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눈을 뜬 채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다. 들이 꿈틀거리지 않았다면 뫼는 그 생각을 돌이키지 않았을 것이다.
들이 꿈틀거리는 게 보인다. 뫼의 눈이 똘망똘망해진다. 들이 두 팔을 위로 뻗더니 기지개를 켠다. 그녀의 몸이 비틀리고 있다. 눈꺼풀도 치켜 올라간다. 들의 검은 눈동자도 똘망똘망 살아난다. 그러다 멈춘다.
“뭐하고 있어, 뫼?”
들이 몸을 일으키며 묻는다. 갑자기 뫼는 객쩍어진다. 그래도 들이 깨어나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날 이렇게 쳐다보고 있었던 거야?”
“아니야. 나도 니 옆에서 잤어. 니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나 혼자 남게 될까봐 겁이 나서 깨어있을 수가 없었어.”
“우린 다시 깨어난 거야, 그렇지?”
들이 말을 하고 미소를 짓는다. 잠을 자면 죽음이 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바로 잘려나간다. 뫼가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이제부터 우리 뭐하지?”
들이 가뿐한 목소리로 신이 나서 말한다.
“글쎄? 뭐하지? 열매를 따올까?”
“그래. 그러자!”
둘은 집밖으로 조심스럽게 나선다.
“조심해! 기어 다니는 동물도 있다고 했어. 그 중에는 독을 가지고 있는 게 있어서 물리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어.”
그 말에 뫼가 풀밭에 내려놓았던 발을 얼른 빼낸다.
“그럼 어떡해?”
뫼가 걱정스럽게 들을 보며 묻는다. 처음 나설 때보다도 두려움이 갑절로 다가온다. 들만 생각할 땐 가뿐히 밀쳐지던 두려움이 자꾸 치근거린다. 선뜻 발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숲까지 수북하게 자라있는 풀들을 보자 온몸이 근질거린다.
“쫓아버리자!”
“뭘 가지고?”
“막대기만 있으면 돼. 막대기를 휘두르면 달아날 거야.”
“그럼 얼른 막대기를 가져와!”
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기다란 것 하나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온다. 그런 다음 그걸로 풀을 툭툭 쳐낸다. 하지만 풀은 밑둥까지 잘리지 않는다. 중간에서 힘없이 꺾이고 만다.
풀이 우거져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딛는 발걸음이 더디다. 풀의 밑둥을 발로 조심스럽게 짓이긴다. 그렇게 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주변을 살피고서야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둘은 어제 뫼가 열매를 땄던 숲 가장자리까지 간다. 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제 그 열매야?”
들의 목소리가 반가움에 한껏 들뜬다. 몸은 반사적으로 잽싸게 열매가 달린 나무로 다가간다. 뫼도 들의 뒤를 따라서 바짝 다가간다.
둘은 열매를 따서 입에 넣기 바쁘다. 달짝지근한 맛이 한없이 입맛을 자극한다. 손도 거침이 없다.
둘은 다시 배불뚝이가 되어 흐뭇한 미소를 주고받는다. 막대기는 어느 결에 손에서 놓여나고 없다. 뫼가 풀밭에 떨어져 있는 막대기를 주우려 허리를 굽힌다. 그때 뭔가가 쓱 지나가는 게 보인다.
“엄마야?”
본능적으로 엄마소리가 나온다. 소리를 꽥 지르고 뫼가 얼른 들에게 몸을 내맡긴다.
“뭐야?”
뫼는 대답 대신 기어가는 짐승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들이 보고 화들짝 놀란다. 뫼의 팔을 꽉 붙잡고 덜덜 떤다.
“내 몸이 왜 이렇게 서늘하지? 뭔가 돋아나는 것도 같아.”
뫼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한다.
“나도.”
들이 바짝 움츠린다.
“맞아. 기어 다니는 동물. 바로 그거야. 막대기. 막대기. 어서 막대기를 집어 들어!”
들이 다급하게 외친다. 뫼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막대기를 주워든다.
“이리 줘봐! 내가 내려칠게.”
들이 막대기를 받아들고 아까처럼 주변을 내리친다. 풀들이 중도막이 난다. 그때마다 탁탁 소리가 난다. 기어가던 것은 사라지고 없다.
“열매를 따가지고 얼른 돌아가자!”
“그래. 내가 딸 테니까 니가 주변을 살펴!”
뫼가 열매를 따는 동안 들은 막대기를 가지고 탁탁 소리를 내며 주변을 끊임없이 살핀다. 다행이 좀 전의 그 동물은 다시 보이지 않는다.
둘은 양손 가득 열매를 들고 돌아선다. 돌아오는 길은 풀들이 짓이겨져 있어서 발걸음을 옮기는 게 한결 쉽다. 오롯한 뿌듯함이 샘솟듯 밀려온다. 뿌듯해서 서로 마주보며 웃고 또 웃는다. 그래도 흐뭇함은 가시지 않는다. 호들갑을 떨게 했던 기다란 동물은 머릿속에서 빠져나가고 없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서서히 그들의 미소가 맥을 잃어간다. 몸이 근질근질하다. 말도 재미가 없다. 몸을 비비 꼬기 시작한다. 열매를 입에 넣어 봐도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들! 신호를 보내보자! 우리 말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지 모르잖아.”
뫼가 퍼뜩 떠오른 생각을 말한다. 들도 맞장구를 친다. 다시 그들의 눈동자가 말똥거린다.
들은 단추를 누른다. 신호는 들어오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려도 마찬가지다.
“신호가 오지 않아.”
들의 목소리에 힘이 모두 빠져나가고 없다. 들이 말하지 않아도 뫼 역시 안다. 그도 힘이 빠지기는 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자! 우리 둘만 남겨놓지는 않았을 거야.”
뫼가 애써 마음을 추스른다.
“맞아. 다시 해보는 거야. 나도 깨어나서 신호를 보냈지만 답신이 없었어. 그러다 며칠 만에 너에게서 신호가 왔어.”
들이 며칠 동안의 일을 떠올리며 힘을 얻어 말한다. 그녀의 눈빛에 다시 생기가 넘실거린다.
“정말?”
뫼가 들의 말에 반색을 하며 눈동자를 반짝인다.
“응.”
“그동안 뭐 하지? 이렇게 얼굴만 보고 있지 말고 재미있는 뭔가를 찾아보자.”
“집안부터 샅샅이 뒤져볼까?”
들이 희망에 들떠 설렘을 드러낸다.
“그게 좋겠어. 우리를 산 채로 7987년 동안 잠들어 있게 했던 곳이야. 우리를 이곳에 가둬둔 그가 우리가 깨어났을 때를 생각해서 우리에게 남겨둔 게 있을지도 몰라. 아주 까마득한 과거의 흔적 같은 거 말이야. 그게 아니면 어때? 지금 도움이 되는 게 나온다면 좋은 거 아니야? 넌 여기를 살펴봐! 난 내 집을 살펴볼게.”
뫼는 자신이 깨어난 집으로 돌아간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잠시 집안을 둘러본다. 그러다 앞에서부터 하나하나 뒤지기 시작한다.
뭔가 나올 거라는 믿음은 뒤로 갈수록 빠져나간다. 덜렁 집뿐이다. 단추가 눈에 띌 때마다 눌러도 본다. 하지만 손에 쥐거나 꺼낼 수 있는 건 하나도 찾아내지 못한다.
들이 뫼의 집으로 건너온다. 뫼가 돌아보자 들이 힘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뫼도 고개를 저어 찾아낸 게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둘은 바닥에 주저앉는다. 한숨을 푹푹 내쉰다. 잠깐 일었던 설렘이 맥을 잃고 만다. 다시 막막하다. 7987년 동안 잠들어 있어야 했던 이유도 궁금하다. 하지만 실마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어쩜 찾아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찾아낸다고 해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물어볼 대상이 없다. 말동무로 이것저것 대꾸를 해주었던 자료는 이미 소멸되고 없다. 살아갈 일이 까마득하다. 겨우 먹을 것만 찾아냈을 뿐이다. 먹는 걸로 일생을 보낼 수는 없다. 찾아내야 한다. 안에 없다면 밖에서라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뫼는 눈동자를 굴린다. 만 년이다. 잠 속에 빠져든 때로부터 7987년이 지났다. 한데 그때가 생각나지 않는다. 칠흑 같은 밤처럼 깜깜하다. 그는 어둠속을 더듬는다. 더듬다보면 행여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듬어 찾아내기에는 7987년이 너무도 긴 시간이다.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다. 자꾸 헛발을 디딘다. 미끄러져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다.
‘생각으로 가 닿기에는 너무도 멀어. 게다가 몸은 이미 만년을 받아들였어. 눈앞에 있는 것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어. 과거의 것은 이미 다 밀어냈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인지도 몰라.’
“들! 우린 과거로 갈 수가 없나봐?”
“내 생각도 그래. 우린 깨어난 시간대에 맞춰지도록 설정이 돼 있는가봐.”
“그런 거 같아. 다른 걸 찾아내야 해. 먹는 걸로 일생을 보낼 수는 없어. 열매 말고 다른 걸 찾아보자! 다행이 아직은 열매가 넉넉해. 당분간 열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
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앞은 캄캄하지만 희망마저 버릴 수는 없다. 머릿속에 희망의 불씨를 담아두려 마음을 다독인다.
“안을 살피는 건 그만두자. 안은 이미 샅샅이 다 뒤졌어.”
“그럼 밖으로 나가 보자고? 위험하지 않을까? 자료도 말했어. 밖엔 위험한 게 많다고?”
들이 걱정스럽게 뫼를 쳐다본다. 뫼는 앞만 바라보고 있다.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안에만 있는 것도 안전하진 않아. 안에만 있으면 우린 평생 갇혀서 살 수밖에 없어. 위험은 피할 순 있지만 제풀에 지쳐갈 거야. 우린 벌써 시간에 사로잡혀 지쳐가고 있잖아.”
뫼의 표정이 아주 진지하다. 들은 말없이 뫼를 바라보기만 한다. 굳어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히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냥 묵묵히 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뫼의 얼굴은 이미 뜻을 굳혔는지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들은 뫼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