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슐들이 땅 위를 둥둥 떠다닌다. 아니, 어쩜 캡슐처럼 생긴 집일지도 모른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높은 하늘에서만 맴돌던 캡슐들이 언제부터인가 땅 가까이까지 내려와 있다.
땅위엔 풀과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새들은 나뭇가지에 깃들어 노래하고 있다. 간간이 사나운 짐승들의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캡슐 하나가 낮게 떠다니다 나뭇가지에 부딪친다. 그 결에 안에 있던 뭔가가 꿈틀한다. 눈도 꿈쩍한다.
“서기 만 년입니다. 가림 막을 열겠습니다. 태양광선을 갑자기 쐬면 실명할 수도 있으니 눈을 감고 기다리십시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들려오는 소리다. 뫼는 기지개를 켠다. 나른하다. 그래도 몸은 가뿐하다. 머리도 맑다. 눈을 감고 기다리라는 말에 뫼는 눈을 뜨려다 말고 기다린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스르륵 가림막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깜깜한 절벽이 눈앞에서 거치는 느낌이 다가온다.
“천천히 눈을 떠보세요!”
뫼는 가늘게 실눈을 뜬다. 눈앞이 뿌옇다. 잘 보이지 않는다. 다시 눈을 감으려 한다. 뭐가 뭔지 도무지 기억이 없다. 눈을 감고 있을 때와는 달리 기분이 묘하다.
“눈을 감지 마십시오! 차츰 적응이 될 겁니다. 그러면 아무렇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넌 누구야? 왜 보이지 않아?”
뫼가 말소리가 멎은 틈을 타 묻는다.
“난 당신의 머릿속에 입력된 자료입니다.”
“자료? 그게 뭔데?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야?”
“아닙니다. 난 당신의 생각이 만들어낸 당신의 일부가 아닙니다. 누군가 임시로 당신 머릿속에 넣어놓은 외부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 그럼 넌 언제 내 머릿속에서 빠져나오는 거야?”
뫼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묻는다.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빠져나오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럼?”
뫼는 자료의 말이 알쏭달쏭하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낯설기까지 하여 온 감각을 끌어당겨 당혹감을 드러낸다.
“때가 되면 저절로 없어질 겁니다.”
“없어진다고?”
기분이 착잡하다. 아무도 없이 달랑 혼자다. 헌데 단 하나뿐인 말상대마저 언젠가는 없어질 거라 한다.
“그럼 난 어쩌고?”
갑자기 난감해진다.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작아진다. 진저리를 친다.
“걱정 마세요! 달랑 혼자 남겨두고 없어지진 않을 테니까, ㅎㅎ.”
자료가 말끝에 짧게 웃는다. 뫼는 혼자만 남겨지진 않을 거라는 자료의 말에 마음을 놓는다. 괜히 무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자료의 말이 다 와 닿지가 않는다.
‘혼자 남겨지지는 않을 거라니? 무슨 뜻이지?’
“넌 없어질 거라는데 혼자가 아니라는 말이 뭔 말이야?”
생각을 굴려도 답이 보이지 않자 물어보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 조바심 내지 마십시오!”
“어떻게 조바심이 안 나?”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나도 더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는 것뿐 대답해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도 소멸되는 거 아냐?”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그 생각은 내려놓으십시오!”
“그럼 이제 난 뭘 해야 하는 거지? 넌 알고 있어?”
뫼가 조바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묻는다. 앞이 캄캄하다.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막막하다.
“창밖을 보십시오! 이 말밖에는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자료는 대답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말을 한다. 뫼도 더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 그냥 창밖을 내다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세상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한데 편안하다.
“어! 저건 뭐지?”
“나무와 풀들입니다.”
“그래?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인가?”
뫼는 눈앞에 펼쳐진 낯선 세상이 신기하다. 하지만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봤을 수도 있긴 합니다. 어쩜 봤을지도 모릅니다.”
“예전? 난 아무것도 기억이 없어. 한데 예전이라니?”
“당신은 7천 9백 8십 7년 동안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7천 9백 8십 7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그게 얼마나 긴 시간인데?”
자료의 말을 헤아릴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이 알 수 없는 말만 쏟아내고 있다. 모든 게 가물가물하다. 또렷한 게 하나도 없다.
“그건 당신의 수명을 100살로 셈을 하더라도 79번 죽고 80번째 삶을 살고 있을 시간입니다.”
뫼는 놀라 입이 딱 벌어진다. 7987년 동안 잠을 잤다는 게 영 믿어지지 않는다. 100살로 셈을 하더라도 79번을 죽었을 시간이라는 게 얼마나 긴지도 감이 오지 않는다. 단지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만 느껴질 뿐이다. 믿기지도 감도 오지 않음에도 자료의 말을 확 팽개치지 못한다. 가만히 7987년을 되뇌어본다.
“한데 왜 나는 죽지 않은 거야?”
생각나는 것마다 믿기지 않는 구석뿐이다.
“그렇게 설정을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잠들기 직전의 상태에서 모든 게 멈추도록 말입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수명은 다시 이어질 것입니다.”
“그건 내가 100살이 되면 죽는다는 뜻이야?”
“주어진 수명이 딱 100살이라면 그럴 겁니다. 하지만 딱 100살로 정해진 수명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주 젊습니다. 그건 살아내야 할 날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뫼는 갸우뚱거린다. 여전히 알쏭달쏭하다. 말뜻이 딱 와 닿지가 않는다.
“그걸 머릿속에 담아두어야 하나?”
“아닙니다. 머릿속에 담아둘 필요는 없습니다. 수명은 하늘이 좌우합니다. 그러니 하늘에 맡긴 채 잊고 살아도 괜찮습니다.”
“하늘이 내 수명을 맘대로 한다고?”
뫼가 또다시 놀라서 묻는다.
“하늘이 다 알아서 하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수명이 보태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수명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럼 하늘은 어디에 있는 거지?”
“하늘은 눈앞에 보이는 물건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힘일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걸 대자연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자연의 순리라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걸 하나님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놀람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리송하다. 눈을 꿈쩍거리기도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한다.
“밖으로 나가보시겠습니까?”
“어떻게?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데. 겨우 머리만 움직이고 있다고?”
뫼가 어이없는 듯 외쳐댄다. 솔직히 어이가 없다. 겁도 난다. 모든 게 너무 낯설다. 하지만 두렵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건 당신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도 당신 마음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나가기 싫으면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생각이 바뀌어 나간다 해도 누가 뭐라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 알았어. 그럼 생각 좀 해보고.”
뫼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숨을 고른다.
“알았습니다. 생각해보고 내키는 대로 하십시오.”
뫼는 가리개를 내리고 눈을 감는다. 다시 깜깜한 암흑이 그 앞에 다가와 있다. 그는 암흑 속에 푹 잠겨든다. 그리곤 7천 9백 8십 7년을 되뇌어본다.
갑자기 텅 빈 느낌이 밀려온다. 7987년을 거슬러 올라가보려 하지만 너무나 까마득하다.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팽개치기로 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려움이 겹겹이 다가온다. 도무지 종잡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7천 9백 8십 7년이 얼만 긴 시간이지? 100살씩 살았다고 가정했을 때 79번 살아냈다는 것도 감을 잡을 수가 없어. 게다가 왜 난 혼자인 것이지? 왜 아무도 보이지 않아? 나무도 풀도 무리지어 있는데 왜 나만 혼자인 거야? 나무와 풀은 밖에 있는데 왜 나만 여기에 있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가온다. 하나같이 답은 찾아지지 않는다.
‘누구한테 물어보지? 자료는 알고 있을까?’
“헤이 자료? 묻고 싶은 게 생겼어. 그러니 잠깐만!”
“뭐가 알고 싶은 겁니까?”
“왜 난 혼자야? 나무도 풀도 무더기로 있잖아. 한데 왜 난 혼자냐고?”
뫼는 머릿속으로 떠올려본 것을 묻는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래? 난 언제까지나 이렇게 혼자 있어야 하는 거야?”
자료의 말에 뫼는 시무룩해진다. 그래도 물음을 그만둘 수가 없다. 다시 다가온 생각을 끄집어낸다.
“한 번 그 앞에 있는 단추를 눌러 보십시오. 그러면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뫼는 단추를 누른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놀라서 얼른 손을 떼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