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멍이 들어 야밤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내게 온 그녀는 올해 48세이다.
나랑 동갑인 그녀는 입은옷에 차비하고 남은 만육천원이 전 재산이였다.
그녀의 이름은 상아라고 지었다.
아버지는 교회 장로님이시며 서점을 운영하시는 부모님밑에 육남매의 셋째딸로서
근엄하고도 위엄한 집안에서 온실속에 화초처럼 자라나다가 그 온실을 사춘기때
스스로 걷어차버린 안타까운 여인이였다.
그녀는 고등학교때 두해 선배인 남편을 만났고 고3때 임신을 함과 동시에 그녀는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그의 집으로 들어가 살아버렸단다.
그녀의 남편은 형제뿐이며 부모님은 이혼한 상태였고 남편과 시동생과 시아버지를
모시며 살게 되었단다.
울산에서 비닐하우스에 애호박을 키우며 농사를 짓는 그때 당시는 시골이라 표현할수밖에 없는
그런곳에서 소도 키우고 개도 키우는 그런곳에서 신혼을 보냈다.
친정부모님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임신을 한 그녀를 어찌하진 못했다.
수돗물이 없어 물을 쓰려면 리어카에 고무대야를 싣고서 그녀가 손수 동네 공동 우물가에서
길어서 썼고 가끔은 시장을 볼려하면 걸어서 40분 이상을걸어나가서 또 버스를 타고 20분쯤을
나가야만 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전거를 배웠다.
그녀는 그 시골에서 딸아이를 낳았고 그녀도 남편도 애가 애를 낳았다.
남편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지나칠만큼 보수적이였다.
가끔 외출을 하면 저녁 5시이전엔 돌아와야 했고,밥도 나란히 겸상을 하지 못했고
옷은 하물며 팬티까지도 다려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도 행복이라 여겼고 당연하다 생각했다.
시아버님은 그야말로 경상도 사나이답게 말씀이 적어셨고 그저 묵묵히 농삿일이나
동물을 키우는게 사명인듯 그렇게 사셨다.
그에 반해 이혼한 시어머님은 화려하고 겉치레가 심하고 호들갑스러웠다.
시어머닌 시내에서 여인숙을 하고 있었고 손녀를 본다는 핑계로 수시로 들락거리며
시어머니 시집살이를 시켰다.
아주 이기적인 성격이였다.
손녀를 보러 왔다면서도 아이 먹을것 하나도 사올줄 모르고 불결해서 여기선 밥먹기가
힘들다며 당신 먹을 빵과 우유만 달랑 사들고 와서는 먹고 가는 사람이였다.
그녀는 하우스에 애호박이 조롱조롱 열리는것도 이쁘고 신기했으며 친구도 없는
곳에서 닭이나 염소나 소도 개도 그녀에겐 친구였단다.
그 애호박이 조롱조롱 열리면 시아버지는 리어카에 그걸 하나 가득 싣고서 장에 나가서
팔아 오시는 날엔 돼지고기며 기타 부식을 리어카에 싣고 오셔서 부엌에다가 던져 놓으셨다.
간혹 제과점빵이나 사탕 같은것들도....
아마도 그녀를 위한 시아버지의 마음이였나보다...
아이도 건강하게 자라주었고 아이가 마당에서 아장아장 걷고 있을때 시어머니가
오셔서 그녀를 불러 앉혀 설득 아니 강요를 요구했다.
남편이 군입대를 해야할 나인데 군입대를 시키지 않으려면 여러가지 서류중에 그녀의
복강경 수술 확인서도 필요하다고...
그녀는 이 낯선 곳에서 남편없이 생활한다는게 두려웠고 덜컥 복강경 수술에 동의를 해주었고
남편은 군대를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빈둥빈둥 놀기만 했다.
담배하나 조차도 그녀를 시켰고 먹성은 좋아서 하루종일 그녀를 부엌에서 나오질 못하게끔...
그래도 그녀는 그게 행복이라 여겼다.
한밤중에도 남편이 시키면 자전거를 타고 그의 심부름을 해주고 단한번도 물조차 길어주지
않는 그런 남편이였지만 그녀는 그게 행복이라 생각하면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지역이 재개발이 되면서 농토를 많이 갖고 계시던 그녀의 시댁은
졸부가 되었다. 남편은 큰돈을 들여 시내에 나이트클럽을 운영했고 시내에 주택도 마련했다.
시아버님은 도시 생활이 적응이 되지 않는다며 다시금 다른 시골로 귀농을 하셨고
시동생도 독립을 했고 그녀는 참으로 단촐한 식구에 여유로워진 경제에 살만했다.
하지만 남편의 얼굴보기가 힘이 들었다.
일이 늦게 마쳐졌다는 이유로 수시로 외박을 했고 시어머님은 시아버지가 계시지 않자
아예 안방 차지를 하고 들어 앉았다.
별난 시어머니 비유 맞추기가 가장 힘들었고 가끔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연유를 캐 물으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그녀에게 손찌검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시어머닌 말려주긴 커녕 도리어 남편을 부추겨서 더 맞도록 했다.
해를 넘겨도 남편의 외박은 줄어들지 않았고 ,그녀 주위의 지인들한테서도 다른 여자랑
어울리는게 자주 발각되고 해서 그녀는 남편을 미행했고 현장을 잡았다.
여인의 몸은 만삭이였고 나이도 20대 초반이였다.
시어머닌 여인이 아들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공주모시듯했다.
그녀에게 복강경을 시켜놓고선 아들도 못낳는주제라며 그녀를 힐책하며...
그녀는 생각끝에 그 여인과 협상을 했다.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남편과는 정리를 하겠다고...그아이는 그녀가 키우기로...
여인은 아들을 낳았고 약속대로 한밑천 챙겨들고 여인은 종적을 감추었다.
그녀는 그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키웠고 남편도 조금은 미안한듯 외도를 멈추는듯하더니
그것도 잠시였다.
다시금 남편의 외박은 잦았고 그 일을 계기로 다툼이 잦았고 그 폭력의 수위가 점점 도를
넘어 혁띠로 휘두르기까지 했다.
남편은 안하무인이 되었고 친정식구들에게 조차 칼을 휘두르는 지경까지 가게되었다.
핏덩이인 그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도록 그녀는 그렇게 우직하게 그 가정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날도 그녀는 남편의 외도 현장에서 상대여자가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내동댕이 쳐지고
발로 짓밟히는 수모까지 겪으면서 이제는 더이상은 아니겠다 싶어서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가, 또 얻어맞고 매를 더 견딜수없어 뛰쳐나와 무작정 도망온여인.
나는 그녀에게 이일을 하는것보다 친정부모님한테도 알리고 법적으로 남편에게 대항하는게
옳지 않냐고 얘길했지만 그녀는 남편에 대한 두려움으로 엄두조차 못내었다.
그렇게 또 한여인이 한남자의 올바르지못한 처세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녀 말이 다 사실이라면 그녀는 참으로 우직하면서도 존경심까지 우러난다.
허나 의심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옷갈아 입을때 등짝에 휘둘러진 상처를 얼핏봤다.
누가 그런 남편을 용서하고 그 아이까지 키울수 있을까?
이 글을 읽으시는 님들이라면.....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