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커서야 들은 얘기지만
원래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는 배위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평생 뱃사람으로 살고 싶어하던 아버지의 뜻대로 바다에 유골을 뿌리신 거란다.
아버지의 부제는 엄마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물론 소영에게도 그랬지만 아무래도 엄마의 그것과는 무게가 달랐으리라.
엄마는 그 해 여름을 견디지 못하고 마을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살아오신 섬을 떠나 서울생활을 시작 하셨다.
명목은 소영의 장래를 위함이라지만 아버지가 없는 섬은 죽음 같은 것이었으리라.
서울로 이사한 엄마는 야무지고 깔끔한 음식솜씨로 시장 한 켠에 조그마한 반찬가게를 차렸다.
서울생활은 엄마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조용하던 목소리는 억척스런 시장 장사치 아줌마 목소리로 바뀌고
욕도 잘하고 싸움도 잘해 시장 안에서는 욕쟁이 쌈닭 전라도 깽깽이 아지매로 불리고 있었다.
특히 소영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엄마는 그 사람을 쥐 잡듯이 달려들어
기어이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아야 직성이 풀리셨다. 소영이 잘 했든 잘 못했든 상관없이.
그럴때마다 어린 소영은 그런 엄마가 창피하고 낯설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 버리곤 했었다.
"육실할 놈의 작것들. 즈그들이 우덜 사는디 보태준게 뭐시 있당가?
배창시 터지게 밥 잘 쳐묵고 헐짓거리들이 그라고 읎는것이여.
한번만 더 우리 소영이헌티 씨잘데기 읎는 주댕이 놀렸싸믄 나가 주리를 틀어 버릴랑께.
알것제? 싹둥바가지 없는 작것들아. 에이 퉤."
소영을 두둔하며 시장바닥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하긴 청상에 홀로 돼 어린 계집아이를 키우는 게 그리 녹녹한 일은 않았으리라.
그러기에 더욱 더 억센 모습을 보이며 당신과 딸을 지켜낸 것일 텐데.
그런 엄마를, 그렇게 소영만을 위해 일생을 바친 엄마를 바쁘다는 핑계로
이 지경까지 되도록 무관심 했던 것이다.
아버지를 보내 던 날처럼 흐느끼듯 슬픈 목소리로 지금 엄마는 끝없이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을 찾고 있다.
소영이 추억 속에서 빠져 나올 즈음 엄마의 클레멘타인이 시나브로 시나브로 잦아 지고 있었다.
소영은 눈가에 번진 눈물을 닦아 내고 애써 웃음 지으며 병실 문을 연다.
"클레멘타인이네. 아버지 돌아가신 후론 한번도 듣지 못했는데……. 아버지 보고 싶구나?"
소영의 목소리에 엄마는 뒤돌아 침대 모서리에 앉는다.
엄마는 소영의 얼굴을 보는 대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공허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긍께. 나가 망녕이 날랑가벼. 맬갑시 목구녕에서 요라게 싸목싸목 끼집어 올라 오드랑께.
느그 아부지 저티 가차이 왔는가벼…….
의사선상님은 만나본겨? 어매 월매나 남은겨?"
"어? 어……. 그게……."
갑작스런 엄마의 질문에 소영은 말문이 막힌다. 소영은 머릿속을 정리하며 엄마를 본다.
"엄마, 우리 바깥 바람 좀 쐴까? 병원 옥상에 정원이 있거든."
"그려? 어매도 병원 냄시땀세 대가리가 씀벅씀벅허던 참이었는디. 잘 되얐네."
병원옥상에 만들어 놓은 녹색정원은 다행히 사람들이 많지 않아
엄마와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했다.
엄마와 소영은 하늘 끝이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산 언덕배기에 세워진 병원옥상은 가릴 것 없이 하늘을 가득 안을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해님이 붉은 피를 토하듯 노을을 흩뿌리고 있다.
소영은 동백꽃처럼 빨갛게 달아오르던 섬마을 노을이 생각났다.
"오매, 이삔거이. 서울서도 이라고 이삔 놈이 있었는갑다. 참말로 이삐네.
우리 동백섬맹키 이삐당께……. 느그 아부지도…… 보고 있겄제?"
엄마도 노을 속에서 동백 섬을 보고 계셨는지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다.
엄마와 소영은 한 동안 말없이 하늘가로 번져가는 노을을 구경한다.
조그맣고 앙상한 엄마의 손이 다 커버린 소영의 손을 살포시 잡는다.
따스한 엄마의 온기가 손을 타고 소영의 가슴을 쓰다듬는다.
"인자 야그혀봐. 월매나 남은겨? 그랴도 안즉 시간은 솔찬히 남았겄제? 야그혀 보랑께."
소영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화제를 돌리고 있다.
"벌써 여름이 다 갔나 보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걸 보니……. 엄마 안 추워?"
엄마는 소영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답을 재촉하고 계신다.
소영은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현실이 정말 원망스럽다.
"엄마……. 흑흑흑. 미안해……. 흑흑흑. 세상에 나처럼 못돼 먹은 딸년은 없을 거야. 흑."
소영은 목이 메어 말을 이을 수 없다.
"아녀. 우리 소영이맹키 착한 딸내미 있으믄 나와 보라고혀.
어매는 니 땀세 목심 부지허고 살았당께.
앙그면 느그 아부지 따라 진즉 시상 떴을것이여. 암만 그라제 그라고말고…….
아야, 지운 빠징께 그만 울고 어매 야그 좀 들어봐야……. 긍께, 어매는 진즉부텀 알고 있었당께.
이년전이 소영이 니가 종합검짐 받으라고 했었잖여. 그때 알았당께.
의사선상님이 유방암 2기라는디 수술허믄 된다드만. 근디 어매는 그라고잡지 안트랑께.
글안혀도 다 늙어 빠진 낯바닥으로 느그 아부지 볼 면목도 읎는디,
몸떙이 할라 간수 못 햐 반 빙신 된 몸땡이로 어찌고 느그 아부지를 볼수 있을것이여.
그랑께 소영이 니도 맴 단단히 묵고. 어매 위헌답시고 헛지꺼리 헐 생각은 하지말어잉?
어매 말 뭔뜻인지 알겄제? 휴……."
엄마는 속에 담아둔 말을 모두 꺼내고 빈 강정마냥 푸석푸석한 큰 숨을 내쉰다.
소영은 엄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 할 것 같아 아무 말 없이 엄마의 손을 꼭 잡아본다.
하늘 끝까지 밀려가던 노을은 온 힘을 다해 마지막 피를 토해내고 회색의 주검으로 마무리 하려 하고 있다.
두 손을 꼭 잡고 서로에게 의지해 한 곳을 쳐다보던 모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클레멘타인을 흐르는 바람에 실어 놓는다.
바람에 실려간 클레멘타인 속으로 어린 소영을 무등 태운 아버지와 곱고 예쁜 엄마가
긴 그림자를 앞세우고 나란히 걷고 있다.
선명하던 세 사람의 모습이 점점 희뿌연 실루엣으로 변하다
회색 주검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지고 어린 계집아이의 깔깔거리는 소리만 하늘가를 맴돈다.
소영은 알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행복의 클레멘타인은 돌아 올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철모르는 딸이 동백 섬 바닷가 끝자락에 서서
동백만큼 붉은 핏빛 노을을 바라보며 그 보다 더 진한 핏빛
울음으로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을 애절하게 찾고 있을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