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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명모집, 사흘, 심심한 사과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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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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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반


BY 하윤 2013-06-17

오랜만에 지원이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은 신록이 무르익어가는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혜란은 티파니로 나갔다. 정아도 불러냈다.

지원이는 표정이 많이 밝아져 있었다.

“얼굴 좋아졌네? 비결이 뭐야?”

“회사 그만두니까 저절로 살아나더라.”

지원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혜란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건 정말 폭탄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L그룹은, 퇴근 시간 따위를 이유로 그만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직장이었다. 혜란은 지원이가 아무리 볼멘소리를 해도 그 대단한 회사를 스스로 그만두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방에 뻥 차 버린 것이다!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나 다음주부터 H은행으로 출근해. 취업과장선생님한테 전화해 봤더니 마침 그쪽에 자리가 하나 났다지 뭐야.”

“와, 졸업한 뒤에도 학교에서 취업을 알아봐 준단 말이야?”

“나처럼 우수한 학생에 한해서겠지?”

지원이는 농담까지 했다.

“그래도 L그룹이 월급은 제일 셌잖아? 정말 미련 없어?”

“돈을 아무리 많이 받으면 뭐해? 내가 원하는 미래가 없는데?”

순간, 혜란은 뭔가 정답을 얻은 것 같았다. 직업에 대해 가졌던 수많은 의문과 혼란이 단번에 걷히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좋은 직장 나쁜 직장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관점이나 필요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였던 것이다.

혜란은 정작 결단이 필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제 공장에 들어간 지도 어느덧 석 달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동안 이뤄 놓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수술비를 모으는 게 일차 목표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알량한 월급에서 집에 몇 푼의 생활비라도 내놓으랴 자기 용돈 쓰랴 이것저것 떼고 나면 생각만큼 남는 게 없었다. 그렇게 몇 달에 걸쳐 목돈을 만든다 해도 꾸역꾸역 다가오는 방 기한이 또 혜란을 위협하고 있었다. 더 위험한 것은, 꿈이나 미래를 논한다는 자체가 낯설어질 만큼 서서히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던 차에 지원이의 자신만만한 눈빛을 보니 혜란의 심장도 미친 듯 펄떡대기 시작했다. 그래, 딱 한 가지만 생각하자. 이것저것 다 맞출 수는 없으니까 가장 절실한 것 한 가지만 생각하는 거다! “참, 혜란이 넌 아직 발령 안 났니?”

지원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이고, 일찍도 물어본다.”

정아가 한 마디 쏘았다.

“미안, 내가 원래 좀 그렇잖아?”

“알긴 아냐?”

혜란도 거들었다.

“그래도 이런 나랑 끝까지 친구 해 줘서 너희들한테 참 고마워하고 있어.”

사실 정아도 혜란도, L그룹에 이어 H은행까지 어디든 맘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지원이한테 샘이 나서 자꾸만 대화에 어깃장을 놓고 있었던 것인데, 뜻밖에도 지원이가 순순하게 나오니까 이번에는 괜히 미안해졌다. 혜란 자신은 과연 얼마나 지원이한테 진정한 친구였나를 생각하니 별로 그렇지가 못했던 것이다. 봉제 공장에 다니는 걸 정아한테만 말하고 지원이한테는 숨긴 것만 봐도 그랬다.

혜란은 이제라도 사과하는 뜻에서 지원이에게 뭔가 진심을 보이고 싶어졌다.

“근데, 난 발령하고 상관없이 그냥 서울에나 갈까 싶어.”

“진짜? 만화 그리러?”

“응.”

“와! 드디어 가는구나?”

“드디어?”

“그럼! 난 전부터 쭉 생각했어. 네가 갈 길은 만화라는 거.”

“그래? 하지만 아직 정해진 건 하나도 없어.”

“일단 결심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야. 넌 한번 결심하면 무조건 실천하는 애잖아?”

“내가?”

“그럼! 너 일 학기 때 성적, 잊었어?”

“맞아! 그때 확실하게 너의 저력을 보여 줬었지!”

내내 듣고만 있던 정아도 흔쾌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지 참, 나 그런 애였지. 혜란은 불끈 힘이 솟았다. 또 그렇게 말하고 나니까 신기하게도 이제 정말로 서울에 갈 일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혜란은 다시 출판사에 편지를 썼다.

현재 자신의 상황을 다 털어놓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이번에도 곧장 답장이 왔다. 혜란의 여건상 숙식이 가능한 만화 화실에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가장 맞을 것 같다며, 원한다면 적당한 화실에 소개시켜 줄 수도 있다고 했다. 혜란은 당장 올라가겠다는 답부터 보냈다. 수중에 몇 푼이라도 모아 둔 돈이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그래 봐야 차비와 화실에 들어가 자리를 잡기까지의 경비 정도밖에 안 될 테지만, 그 다음 일 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동수엄마는 혜란이 그만두겠다고 하자 선선히 받아들였다. 원래 조건이 발령 날 때까지만 일하는 것이었으므로 혜란은 그렇게 둘러댔다.

“여기보다 좋은 데로 가는 거니까 붙잡으면 안 되겠지? 넌 어디를 가도 성실하니까 잘 할 거야. 나중에 시집갈 때 꼭 연락해야 된다.”

동수엄마는 혜란에게 있어 존경하는 인생 선배 1호였다. 그런 동수엄마한테 이별을 고하고 그만두는 날짜까지 정해지고 보니, 그제야 자신이 하려는 짓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실감이 났다. 혜란은 홀로 낯선 서울 땅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전부 다 없었던 일로 해 버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대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고통이 서울에 가서 치러야 할 그것보다 훨씬 크고 끔찍해 보였다.

 

봉제 공장은 때마침 여름철 주문이 밀려 몹시 바빴다. 하필 그럴 때 그만두는 게 미안하여 혜란은 잔업을 도맡아 했다. 대개는 시다들끼리 교대로 하는 잔업을, 열흘 내리 혼자서만 했는데도 이상하게 힘들지는 않았다. 곧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없던 힘도 불끈불끈 솟는 것 같았다. 복학하려고 그만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대와 흥분이 내내 혜란을 사로잡았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이 되었다. 서울행도 서울행이지만, 몇 달간 공장에 매여 있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된다 생각하니 날아갈 듯 기분이 가벼웠다. 혜란은 서울로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그려 나갔다. 친구들과 헤어질 일이 가장 아쉬웠다. 지원이야 별 걱정이 없었지만 특히 정아가 마음에 걸렸다. 정아와 티파니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때는 징글징글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그 시간들을 왜 느긋하게 즐기지 못했는지 후회스럽기만 했다.

수연이를 못 본 지도 꽤 되었다. 작년 봄에 수연이가 학교로 찾아왔던 게 마지막이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혜란은 늘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 수연이는 거처가 자주 바뀌기 때문에 연락하기가 힘들었다. 늘 수연이가 찾아오는 식이었는데, 이제 혜란이 서울로 가 버리면 어떻게 되나 생각하니 갑갑했다.

안타까운 건 졸업과 함께 이사를 가 버린 소정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물리적인 교류는 끝났을지 몰라도 소정이는 영원히 혜란의 가슴에 남아 있을 친구였다. 소정이는 곧 정우오빠였으므로....... 정아한테는 다 잊었다고 했지만, 혜란은 아직도 정우오빠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들춰 보기조차 힘든 현재진행형의 상처였다. 혜란은 나중에 아주 나중에 좀 더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때 정우오빠를 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잊은 척 무심하게 살아가야 했다.

심각하고 복잡한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졌다. 사실 지난 며칠간 계속된 잔업의 영향으로 피로감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드디어 밤 10시가 되어 잔업이 끝났을 때, 혜란의 머릿속에는 빨리 집으로 가서 자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혜란은 작은방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런데 그 시간이면 으레 자고 있어야 할 엄마가 그날은 혜란이 오길 기다렸다는 듯 곧장 작은방으로 건너왔다. 혜란은 일어날 기운도 없어서 누운 채로 멍하니 엄마를 쳐다보았다.

“낮에 너 찾는 전화 왔었다. 무슨 연합회라던데? 내일 오전 중으로 그리 나오라더라. 뭔데, 발령 난 거 맞지?”

엄마는 모처럼 밝은 표정에 목소리까지 들떠 있었다.

“내일은 출근할 생각 말고 당장 연합횐가 뭔가 거기부터 가라. 알았지?”

봉제 공장을 이미 그만뒀다는 걸 모르는 엄마가 어쩐지 딱했다.

“왜? 넌 발령 난 게 안 좋니?”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요, 뭐.”

혜란은 시들하게 말하고는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엄마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혜란은 엄마가 나가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이 희한하게 꼬여 버린 것이다! 혜란은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다. 그토록 바랐던 발령이 이제야 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서울행을 결심함으로써 모든 갈등과 방황을 한방에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새로운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잠깐 머리를 굴려 봐도 서울행과 발령, 둘 다 팽팽했다. 과연 어떤 결론이 날지, 혜란 스스로도 궁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건 쏟아지는 잠이었다. 혜란은 일단 잠부터 자기로 했다. 참 신기한 것은, 그런 엄청난 일이 생겼는데도 크게 초조하거나 불안하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더 차분하고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인생은 어차피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고 지금 이 순간 또한 그 중 하나일 뿐이라면, 뭐 그리 유난떨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혜란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이불을 끌어 당겼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달콤한 잠이 스르르 몰려 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