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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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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반


BY 하윤 2013-06-16

개학날 아침이 밝았지만 학교는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었다.

잠자리에 누워 뒤척이던 혜란은 집에 있으면 뭐하나 싶어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교실 문을 여는 순간 이내 등교한 걸 후회했다. 학교에 나온 아이들은 열 명도 채 안 되었다. 서로 얼굴 보기가 민망했다. 선생들은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라며 남은 아이들을 다독였지만 어딘지 설득력은 없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나머지 긴긴 오후 시간은 티파니에서 보냈다. 어떤 날은 아예 학교에 안 가고 G대에서 서성이다가 정오쯤 티파니의 문이 열리면 곧장 들어가서 온종일을 때우기도 했다. 음악 감상도, 수다도 시들해진 지 오래였지만, 티파니 말고는 갈 데가 없었다. 혜란은 낡고 지저분한 소파에 무기력하게 구겨져 있었다. 가장 치열하고 화려했던 지난 1학기 때의 기억은 이미 백만 년 전의 일처럼 까마득해져 버렸다. 취업이라는 굴레는 혜란의 모든 의지를 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1988년 2월 12일, 마침내 졸업이었다.

혜란은 자신의 인생이 졸업 전과 졸업 후로 확연하게 구분될 줄 알았다. 졸업만 하면,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뀔 줄 알았다. 하지만 졸업 앨범과 졸업장을 품에 안았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임 선생이 손을 꼭 잡아 주었을 때도, 가슴이 뛰지 않았다. 오전 시간이나마 때울 수 있었던 학교에서도 이젠 쫓겨나는구나 싶어 씁쓸할 따름이었다. 교문 앞 꽃장수들만 신이 난 가운데 운동장에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혜란이네도 작은오빠가 사진기를 구해 온 덕분에 남들 흉내를 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장롱 속에 오래도록 처박아 두었던 양복을 꺼내 입었고, 엄마는 유행이 한참 지난 데다 굽까지 뭉툭해진 구두를 신고 있었다. 작은오빠는 혜란의 독사진부터 잔뜩 찍은 다음, 둘 또는 셋씩 다양하게 찍다가, 마지막으로 옆 사람한테 부탁해서 다 같이 한 장을 찍었다. 찍어주는 사람도 찍히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흐뭇한 표정이었다. 혜란은 가족이란 이런 날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필요하구나 싶어 코끝이 찡해졌다. 사진을 찍고 나니 더는 할 일이 없었다.

“어디 가서 짬뽕이나 먹자.”

내내 말이 없던 아버지가 한 마디 했다. 학교를 나와서 곧바로 눈에 띄는 중국집에 들어갔다. 먼저 들어온 팀들이 시끌벅적 음식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을 주문했다. 술만 먹으면 아들도 아닌 계집애를 공부 시킨다고 온갖 생색을 다 내던 아버지였으니 감회가 새로울 법도 했다. 그런 자리에서 딸이 한 마디 감사의 말을 올린다면 아버지로선 더할 나위가 없었겠지만, 혜란은 묵묵히 짬뽕만 먹었다.

그날 저녁, 혜란은 티파니로 나갔다.

“오늘 같은 날 티파니가 뭐야?”

디스코텍 정도는 가 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정아가 불만을 쏟아냈다. 혜란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지원이가 싫다고 하는 바람에 디스코텍은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럼 지원이 빼고 다른 친구들이랑 뭉쳐서 가자고, 정아가 제안했지만 그건 혜란이 싫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졸업식 날인데, 더구나 지원이와는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그럴 수는 없었다.

티파니에서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눈 다음, 세 사람은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레스토랑이라곤 가 본 적이 없으니, 어디가 좋은지도 모른 채 그저 이름이 마음에 드는 데로 들어갔다. 거기서 돈가스를 먹고 후식으로 커피를 또 마셨다. 오랜만에 셋이 만난 것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침울했다. 항상 대화를 주도했던 정아가, 장소 선정의 불만에다 제 얘기만 하는 지원이에게 화가 나서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 후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원이는 그동안 직장에서 쌓인 불만을 토해 내느라 정신없었다. 지원이는 L그룹 산하의 한 음료 회사에 배치됐는데, T시 전체를 담당하는 그 지점에 여사원이라곤 지원이 한 명뿐이라고 했다. 영업 사원들이 아침에 잠깐 출근했다 나가고 나면 하루 종일 지원이 혼자 사무실을 지킨다고 했다.

“첨엔 혼자 있으니 틈틈이 공부하면 딱 좋겠다 싶었지. 그런데 웬걸, 본사에 물건을 주문하고 그걸 받아서 각 거래처로 내보내는 일이다 보니 해도 해도 일이 끝이 안 나는 거야. 근무 시간에 바쁜 건 그렇다고 쳐. 근데 진짜 문제는 한 달에 절반 이상은 퇴근 시간을 넘겨서까지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거지. 하루 종일 장부만 들여다보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이게 뭔가 싶어. 큰 회사니까 출퇴근 하나는 정확할 줄 알고 지원했던 건데, 완전 속았어. 아직 학원은 등록도 못했다. 후,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굳이 긴 넋두리를 듣지 않아도, 지원이의 우울한 표정이 모든 걸 다 말해 주고 있었다.

“야, 주구장창 놀고 있는 우리도 있잖아? 힘내.”

“차라리 나도 좀 놀아 봤으면 원이 없겠다. 어쩌자고 취직은 일찍 해 가지고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 어쨌든 난 먼저 가야겠어. 머리도 아프고, 내일 출근도 해야 되니까.......”

지원이는 휑하니 자리를 떴다.

“하여간, 끝까지 잘났다니까.”

지원이가 나가자마자 정아가 입을 삐죽거렸다.

“쟨 어떻게 된 게 자기밖에 몰라? 암만 피곤해도 오늘 같은 날은 우리 기분도 좀 맞춰 줘야 되는 거 아냐? 어쩜 제 할 말만 다 하고는 싹 가 버리는 거야? 우리가 지금 누구 땜에 여길 왔는데?”

“지원이 저런 앤 거 처음 알았어?”

혜란도 괜히 부아가 나서 맞장구를 쳤다.

“혜란아, 우리 맥주나 마시러 가자. 이런 기분으로 그냥 들어갈 순 없잖아?”

낮에 작은오빠한테 받은 용돈도 있겠다, 혜란은 순순히 정아를 따라 갔다. G대 주변에는 대로변이며 골목 할 것 없이 술집들이 널려 있었다. 둘은 독일식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호프집엘 들어갔다. 실내는 흐릿한 조명과 자욱한 담배 연기, 왁자지껄 떠드는 대학생들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크고 무거운 생맥주 잔만 보고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혜란과 달리, 남자친구랑 몇 번 와 본 적이 있다는 정아는 그 큰 잔을 금방 비우고는 손을 높이 쳐들어 자연스럽게 한 잔을 더 시켰다.

“넌 맥주가 맛있니? 난 배가 불러서 맛도 모르겠는데. 그리고 너무 시끄러워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냥 그 맛에 먹는 거야.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넌 참 뭐든 적응을 잘해서 좋겠다.”

“야, 쓸데없이 심각하게 산다고 뭐가 달라지냐? 지원이 봐라. 공부 잘해, 예뻐, 취직 빨리 돼, 뭐 하나 부족한 거 없는데도 우리보다 더 죽을상이잖아?”

“하긴 지원이 보니까 헷갈리긴 하더라. 우린 취직만 되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은데, 정작 지원인 행복하지가 않다니.......”

“그게 인생이란 거다.”

“뭐?”

정아의 능청에 혜란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기분도 좀 나아져서 나머지 시간은 재미있게 보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밤 11시가 넘어서야 호프집을 나왔다. 거리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 다음 행선지를 의논하는 사람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정아는 바람을 쐬고 싶다며 혜란이네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번화가를 벗어나니 거리는 이내 한적해졌고 찬바람만 두드러졌다. 맥주 한 잔에 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정아는 혜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혜란아, 나 너한테 물어볼 거 있어.”

“뭔데?”

“정우오빠는 이제 완전히 잊었어?”

혜란은 물끄러미 정아를 쳐다보았다. 정우오빠 이름을 들었는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이유를 묻듯 정아를 바라보았다.

“너 그거 모르지? 네가 정우오빠한테 한창 빠져 있었을 때 얼마나 빛나고 예뻤는지.......”

“그럼 뭘 해? 지금은 정우오빠가 트럭으로 와도 취직자리 하나와 바꾸고 싶은 심정이다.”

“아! 정말 취업이 뭔지, 인간 혜란이를 다 망쳐 놓았구나.”

정아와 혜란은 깔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조용한 밤거리에 둘의 웃음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어느새 사거리까지 왔다. 거기서 횡단보도를 건너 조금만 더 가면 혜란이네 집이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하는 정아는 녹색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둘은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손을 흔들었다. 서로 웃으며 오래오래 흔들었다. 그런 다음 천천히 뒤돌아섰다. 혜란은 몇 발짝 떼다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정아는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꽂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정아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대로 영영 이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혜란은 정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거대한 공허감이 혜란을 짓눌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목구멍에서 흑, 하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혜란은 얼른 샛골목으로 뛰어 들어가 어두운 구석에 숨은 다음 울기 시작했다. 둑이 터진 듯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혜란은 그제야 너무 추워서 자신의 몸이 뻣뻣해졌다는 것과 낯선 골목에서 겁도 없이 오래 지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혜란은 집에 가서 야단맞을 일과 다음날 학교에 갈 일이 걱정되어 허겁지겁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 이젠 학교에 갈 일이 없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자 또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