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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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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반


BY 하윤 2013-06-15

10월 말경이 되자 교실에는 제법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지원이처럼 이미 취업을 나간 아이들과 ‘T은행 준비반’에 들어간 애들의 자리까지 비었기 때문이었다. T은행은 T시에 본사를 둔 지방 은행으로 금융 기관으로서는 최대 규모의 인원을 뽑았기 때문에 성적이 좀 되는 아이들은 대부분 T은행을 노리고 있었다. 그 수가 상당해서 학교에서는 따로 T은행 준비반을 만들어 지원자들을 한 반에 모아 놓고 시험과 면접에 대비했다.

수업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끔 직장 생활의 에티켓, 상사나 선배를 대하는 요령, 화장하는 법 같은 특별 강의를 들을 때 말고는 다 자유 시간이었다. 남아도는 시간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교실에 남은 아이들은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잡담을 하거나 책을 보거나 잠을 자는 등 느긋해 보였지만, 눈빛과 표정은 불안과 두려움을 가득 안고 있었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고 놀아도 노는 게 아니었다. 혜란은 짐짓 책만 읽었다.

11월초가 되자 T은행에 이어 가장 많은 아이들이 기다리던 M금고 원서가 왔다. M금고는 제2금융권이어서 조건이 그리 까다롭지 않은 반면 초봉이나 상여금은 은행에 비해 약했다. 혜란은 M금고를 지원했다. 정아는 성적이 아깝다며 좀 더 기다려 보라고 했지만, 급격하게 자신감이 떨어진 혜란으로선 M금고도 과분했다. 전교에서 무려 칠십여 명이나 M금고 원서를 받아갔다. 근무 조건이 좀 유리할 뿐 급여는 보통 중소기업보다 못한데도 인기가 좋은 것은, 어쨌든 M금고도 금융기관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M금고 원서를 받은 다음날, ‘초봉 20만원, 상여금 600퍼센트, 9시~6시 근무’라는 좋은 조건의 자리가 들어왔다. M금고는 합격을 하더라도 발령이 언제 날지 모르기 때문에, 어디든 자리가 있으면 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혜란은 총알같이 취업보도실로 달려갔다. 취업과장선생이 그 많은 지원자들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할 거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취업과장선생의 눈은 예리했다.

“양다리 걸치면 안 되지. 더구나 넌 이 회사에서 원하는 타자 급수도 없잖아?”

취업과장선생의 싸늘한 핀잔을 듣고 나서야 혜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나 혼이 빠져 있었던지 ‘타자 3급 이상’이라는 조건은 눈에 안 들어왔던 것이다. 혜란은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취업과장선생은 다 이해한다는 듯 혜란의 어깨를 두드리며, 딴 생각 하지 말고 M금고 시험만 신경 쓰라고 했다.

 

취업과장선생한테 망신을 당한 뒤에도 혜란은 몰래 게시판을 살폈다.

중소기업이나 개인 회사 같은 데는 취업과장선생을 거치지 않고도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한번 경리를 구한다는 인쇄소에 면접을 보러 갔다가 너무나 열악한 근무 환경에 놀란 뒤로는 혼자 나서기가 무서워졌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취업보도실 앞을 얼쩡거리는 버릇은 고칠 수가 없었다. 수업만 끝나면 자석처럼 그쪽으로 끌려가는 자신이 좌판에 내놓은 떨이같이 여겨질 때면, 혜란은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운동장에서 떨고 있는 겨울나무가 꼭 자기 모습 같았다.

날이 갈수록 교실의 빈자리는 늘어갔다.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은 창문 덜컹대는 소리만 요란할 뿐 더없이 조용했다. 임 선생은 국어 시간이 되면 수업은 안 해도 교실로 와서 남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 주었다. 주로 아이들과 일대일로 얘기를 나누었는데 어찌나 목소리가 나직나직한지 나중에는 임 선생이 있다는 사실도 까먹을 정도였다. 한번은 그날도 혜란은 책에 빠져 있었는데 언제 왔는지 임 선생이 혜란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다. 그리곤 빙그레 웃으며 혜란이 옆에 앉았다. 혜란은 임 선생의 손길이 이마를 스칠 때부터 그대로 정지 상태가 돼 버렸다.

“혜란아, 요즘 많이 힘들지?”

임 선생의 다정한 말을 듣는 순간 혜란은 눈 밑이 파르르 떨리나 싶더니 순식간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많이 힘들지? 예전에도 혜란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이 있었다. 정우오빠.......

“남들 다 취업 나가는데 혼자만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하지? 그래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앞으로 살아 보면 알겠지만 지금이 네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간일 거야. 그때 가서 왜 진작 실컷 즐기지 못했나, 후회하지 말고 지금 맘껏 놀아. 친구들이랑 추억도 많이 쌓고 책도 많이 읽으면서 말이야.......”

임 선생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혜란은 눈물이 쏟아질까 봐 눈에 힘을 잔뜩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임 선생 말대로 여유를 부릴 자신은 없었지만 그 다정한 목소리만은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곧 임 선생은 옆 분단의 다른 아이한테로 자리를 옮겼다. 혜란은 계속 책을 읽는 척하며 몰래몰래 눈물을 찍어냈다.

왜 눈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지는 혜란도 알 수 없었다. 이유가 너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하나도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그 순간 자기 자신이 절대적으로 고독하다는 사실이었다. 취업이든 뭐든 오직 혼자서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두렵고 외로웠던 것이다.

 

정아는 아침저녁으로 테니스를 치느라 바빴다.

운동화에 흙이 뽀얗게 앉도록 테니스를 치고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혀서 교실로 들어오는 정아를 볼 때면 혜란은 늘 두 가지 감정이 교차되었다. 다들 마른 장작처럼 생기를 잃어 가는데 혼자서만 기운이 펄펄한 정아가 멋져 보이다가도, 참 좋은 팔자다 싶어 고까운 마음도 들었던 것이다.

정아는 혜란에게도 테니스를 권했다. 혜란은 지금 자기 처지에 테니스는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 거절했다. 하지만 책 읽는 것도 질릴 대로 질려 버린 어느 날 혜란은 슬그머니 운동장으로 나가 보았다. 벽에다 대고 혼자 공을 치고 있던 정아가 손을 흔들며 반겼다. 정아는 신이 나서 테니스를 가르쳐 주었다. 텅 빈 코트에서 정아랑 마주보며 이리저리 뛰다 보니 정말로 기분이 상쾌해졌다. 세상에는 이렇게 취업 말고도 재미있는 일이 많은데 자기는 왜 궁상만 떨고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테니스를 치는 시간은 짧았고, 그 시간이 지나면 혜란은 다시 습관처럼 우울해졌다.

M금고 합격 소식도 큰 효과가 없었다. 스피커를 통해 혜란의 이름이 불리자 친구들이 환성을 지르며 축하해 주었는데도 혜란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어느 정도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데다, 합격보다는 언제 발령이 나느냐가 관건이었기 때문에 딱히 좋아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뭐야? 취업 됐다고 벌써 거만 떠는 거야?”

정아가 농담을 했지만 받아 줄 기분도 안 났다. 어디든 합격만 되면 모든 고민이 끝날 줄 알았는데 마음은 더 무겁고 답답했다. 혜란은 지원이가 생각났다. 반에서 제일 먼저 취업이 확정된 지원이가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다며 착잡해했을 때 혜란은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오히려 잘난 척한다고 심술까지 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취업이 되었다고 무작정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 순간부터 새로운 걱정과 고민이 등장한다는 것을. 지금의 혜란은 옆에 정아도 있고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도 많지만, 항상 앞서 나간 죄로 뭐든지 혼자 감당해야 했을 지원이를 생각하니 혜란은 마음이 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