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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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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반


BY 하윤 2013-06-15

혜란은 학창 시절의 마지막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방학식 날, 혜란은 생각지도 못했던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았다. 지난 학기에 비해 월등하게 성적이 오른 학생에게 주는 상이었다. 임 선생은 봉투를 건네주며 환하게 웃었다. “혜란아, 정말 열심히 해 줬구나. 고맙다.”

그 어떤 보상보다 임 선생의 그 한 마디가 혜란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 벅찬 감동과 기쁨은 방학을 시작하자마자 곧장 빛바랜 과거가 되어 버렸다. 공부만 할 때는 잠시 접어 둘 수 있었던 온갖 문제들이 하나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먼저, 만화. 혜란은 다시 한 번 만화에 도전하기로 했다. 공부에 혼을 쏟았던 것만큼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림은 공부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조건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노력과 인내와 시간, 거기다 어쩌면 가장 중요하달 수 있는 재능이 필요한 일이었다.

두 번째는 부모님과의 갈등. 부업 일거리가 없어 심술이 난 엄마는 툭하면 방문을 열어젖히며 시비를 걸었고, 아버지도 술만 먹고 오면 혜란을 불러 앉힌 다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누구네 집 딸은 벌써 취직을 했다더라, 보통 3학년 되면 곧장 취업 나가는 거 아니었느냐, 대체 무슨 생각으로 허구한 날 방구석에 처박혀 있느냐, 등등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냈다. 아직 졸업도 안 한 자신을 벌써 백수 취급하는 아버지가 혜란은 도무지 황당하기만 했다.

지금이 겨울방학이라면 또 모르겠다. 혜란은 아버지 얼굴에 보란 듯이 찬물을 끼얹고 싶었다. 아버지! 나는 취직 안 하고 서울로 갈 거예요. 가서 만화를 그릴 겁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어요! 그렇게 소리쳐 주고 싶었다. 그런 다음 처참하게 일그러질 아버지의 얼굴을 찬찬히 구경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랬다. 세 번째 문제는, 여전히 꼼짝달싹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였다. 졸업 때까지 내야 할 공납금이 아직 두 번이나 더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혜란은 죽었다 생각하고 방학이 끝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개학 첫날부터 날아든 원서들은 혜란의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바야흐로 취업 전쟁에 불이 붙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지원이는 괜찮은 자리만 들어왔다 하면 혜란에게 도전해 보라고 부추겼다. 1학기 때도 그랬지만 지금 의뢰가 들어오는 회사들도 5학기 합산 성적이 전교 20~30퍼센트 안에는 들어야 지원 자격이 주어지는 곳들이 많았다. 지원이는 3학년 1학기 성적만 보고 혜란이 그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실상은 40퍼센트 안에도 겨우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자신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1, 2학년 때의 성적에 발목 잡혔다는 소리를 차마 지원이한테 하기는 싫어, 혜란은 일단 만화 쪽으로 갈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둘러대야 했다.

그렇게 되니 정말로 만화 말고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혜란은 눈과 귀를 막고 오직 만화를 완결 짓는 데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2학기부터는 남지 않고 곧장 하교했다. 하지만 집에서 혼자 만화와 씨름하다 보면 모두들 동쪽을 향해 가고 있는데 자기만 서쪽을 고집하는 것 같아 불안했다. 또 취업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무슨 죄라도 짓고 있는 듯 가슴이 답답했다.

 

3학년은 10월 안에 모든 성적 처리가 완료되어야 하므로, 2학기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합쳐 100점 만점으로 시험을 한 번에 끝낸다는 발표가 났다. 혜란은 시험 준비에 매달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사실 그 시험은 형식적인 성격이 강해서 선생들도 아이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혜란은 1학기 때 잠깐 반짝하더니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 두려웠다. 특히 임 선생이 실망할 걸 생각하면 길을 가다가도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혜란은 오랜만에 교실에 남았다. 1학기 때에 비하면 남아서 공부하는 아이들도 몇 명 안 되었다. 지원이와 정아는 각자 일이 있어 일찍 갔는데, 그래서인지 교실이 더 썰렁했다. 혜란은 공부할 의욕을 잃은 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벌써 절반 이상 몸을 턴 노란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찬바람만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 나무에 새 잎이 날 때쯤이면 자신은 이미 학교를 떠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시렸다.

계속 잡생각에만 빠져 시간을 허비하면서도 혜란은 매일 꿋꿋이 남았다. 하지만 결국 닷새째 되던 날은 후다닥 가방을 싸고야 말았다. 그날도 창밖만 우두커니 보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사방이 깜깜해져 있었다. 몇 명 안 되던 아이들은 마침 밥을 먹으러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분명 해가 지는 걸 보고 있었으면서도 어두워지고 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게 와락 무서워져 혜란은 교실을 뛰쳐나와 버렸다.

 

일주일간의 졸업고사는 맥없이 끝이 났다.

시험이 끝나던 날, 지원이는 하교할 생각도 않고 책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지원이는 졸업고사가 끝나는 대로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말하자면 그날은 지원이가 마지막으로 등교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지간해선 감상에 빠지는 법이 없는 지원이의 얼굴 표정이 좀 복잡해 보였다.

혜란이 그만 집에 가자고 하자 지원이는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정아는 골절상을 입은 할머니 병간호로 한 달 내내 수업만 끝났다 하면 총알처럼 사라졌기 때문에 같이 갈 수 없었다. 한데 지원이는 학교 앞 분식집이 아닌 자기의 자취방으로 혜란을 데려갔다. 지원이가 자취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집에 가 본 건 처음이었다. 지원이는 좁은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직접 떡볶이를 만들어서 상에 내왔다.

“와!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네 방에서 네가 해 준 떡볶이를 먹다니.”

“나도 실은 진작부터 너희들 데려오고 싶었어.”

“근데 왜 그러지 않았어?”

“내 생활이 흐트러질까 봐 겁이 났던 거지. 친구들 하나둘 데려오다 보면 결국 여기가 만만한 아지트가 될 거고, 그러면 공부에 방해를 받게 될 테니까.......”

언제였던가, 한번은 각자가 존경하는 사람을 한 사람씩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순신, 세종대왕, 아인슈타인, 나이팅게일 같은 위인들의 이름이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뜻밖의 대답이 지원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지원이는 자기 부모님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지원이가 그때 했던 말을 혜란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평범한 시골 농부입니다. 힘들게 농사를 지어 저희 칠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냈습니다. 아버진 칠순 가까운 연세인데도 막내인 저를 공부시키기 위해 이곳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언니나 오빠들은 너무 힘드니까 그냥 산업체 학교 같은 데로 보내라고 했지만, 두 분은 나한테 아무 걱정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대학까지 못 보내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저는 우리 부모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합니다.......

“그때 난 부모를 존경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네가 참 부러웠어. 그나저나 이제 좋은 데 취직했으니 부모님 은혜에 확실하게 보답한 셈이네?”

혜란의 말에 지원이는 설핏 미소를 지었지만 어딘지 쓸쓸한 표정이었다.

“참 이상해....... 지난 삼년간 기를 쓰고 공부했는데, 그래서 소원대로 됐는데, 지금 내 마음은 전혀 기쁘지가 않아. 뭐랄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것 같아. 지금까지는 무조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었지만 이젠 그게 아니잖아? 나 혼자 모든 일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게 너무 겁나. 사실 지금까지도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다른 때 같으면 지원이의 그런 엄살이 고깝게 들렸겠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당장 내일부터 학교가 아닌 회사로 출근하게 된 지원이의 불안한 마음이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혜란이 역시 자퇴도 해 보고 사회생활까지 해 봤는데도 지원이의 심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새로운 상황과 맞닥뜨린다는 것은 늘 그렇게 새로운 두려움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행히 지원이는 답답한 마음을 훌훌 털어놓아선지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떡볶이로 배를 채운 후 둘은 방바닥에 드러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지원이는 출근용으로 산 정장을 혜란이 앞에서 입어 보기도 했다. 구두까지 갖춰 신은 지원이의 모습은 정말 풋풋한 사회 초년생 같았다. 가까이 사는 오빠나 언니들이 돌봐 주었다고는 해도 스스로 그 모든 일을 해낸 지원이가 참 대단해 보였다.

혜란은 해가 지기 전에 지원이 집에서 나왔다. 어쨌거나 졸업고사도 끝났고, 지원이와도 한층 더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그럭저럭 만족한 하루였다. 그런데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일부턴 학교에 가도 지원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중요한 뭔가를 아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당연히 학교에 가고, 학교에 가선 당연히 친구들을 만나고, 몸을 뒤틀면서도 당연히 수업을 듣고, 그렇게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당연한 일상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 될 줄 전혀 몰랐던 아이처럼 혜란은 당황스러웠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것 같다는 지원이의 말이 자꾸 신경 쓰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