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이가 L그룹에 합격했다.
기말고사 전날, 3교시 영어 시간에 갑작스런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는데, L그룹에 지원했던 다섯 명 중 두 명이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두 명 중 한 명이 지원이였다. 교실에선 일제히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원이는 두 손으로 놀란 얼굴을 가렸다. 영어 선생은 지원이에게 축하를 보냈고, 다른 사람들도 열심히만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곧 수업은 재개되었다.
하지만 한번 흐트러진 분위기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합격 소식은 담임을 통해 조용히 전달해도 될 텐데 왜 굳이 수업 중에 방송으로 떠드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다른 사람의 합격 사례를 보고 나머지 사람들도 분발했으면 하는 의도인지는 몰라도 혜란의 눈에는 오히려 부작용이 더 커 보였다. 특별히 자극을 주지 않아도 잘하는 애들은 잘하게 돼 있었다. 이래저래 기가 죽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나머지 대다수의 아이들일뿐.
혜란은 지원이가 원서를 받았을 때 이미 마음을 비웠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기꺼이 박수 쳐 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스피커에서 지원이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간발의 차이일망정 축하하는 마음보다 질투하는 마음이 먼저 치솟는 것을 분명 느꼈던 것이다. ‘합격할 것이다’와 ‘합격했다’ 사이에 그토록 미묘한 차이가 숨어 있을 줄은 혜란도 미처 몰랐다. 혜란은 그 마음을 감추려는 듯 더 과장되게 축하를 했다. 그런데 지원이는 왠지 시들한 표정이었다.
“좀 더 기다려 볼 걸 그랬나 봐.......”
“뭐가?”
“요즘 한창 증권 회사 원서가 들어오고 있잖아? 취업과장선생님도 지금까지는 은행이 대세였지만 앞으로는 증권 회사가 더 뜰 거래. 좀 생소한 분야이긴 해도 급여나 상여금 등 조건도 은행보다 더 낫고. L그룹은 대기업이라는 것 말고는 사실 끌리는 게 하나도 없는데 내가 너무 경솔했던 것 같아. 이렇게 쉽게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두고 보는 건데. 일단 취업부터 하고 보자는 강박증 때문에.......”
“L그룹이면 어디 내놔도 안 빠지는 직장이잖아? 거기 떡하니 붙었는데 뭘 고민하고 그래? 너 자꾸 그러면 나 진짜로 삐친다. 아직 취업보도실 문 앞에도 못 가 본 사람 앞에서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뭐냐고?”
“너야말로 뭐가 걱정이야? 중간고사도 완벽하게 쳐 놓았으면서.”
“아이고, 겨우 그거 갖고 어딜 넘볼 거라고.......”
“넌 참 이상해. 왜 그렇게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니?”
“사실이 그렇잖아.”
“어쨌든 나 먼저 갈게. 오늘은 공부가 안 될 거 같아.”
지원이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더니 그대로 가 버렸다. 바로 내일이 시험인데 말이다. 혜란은 기분이 확 나빠졌다. 하긴 취업이 확정된 마당에 시험 따위가 대수겠어? 혜란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며 애꿎은 책만 노려보았다.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가 안 된다고 지원이처럼 덥석 가방을 쌀 수도 없었다. 자신은 지원이와 처지가 다른 것이다, 하늘과 땅만큼. 혜란은 의자를 바짝 당겨 자세를 바로잡았다. 죽을 만큼 고독했지만 별 수 없었다.
기말고사가 모두 끝나던 날, 혜란은 미장원으로 직행했다.
“최대한 짧게 잘라 주세요.”
앞머리 옆머리 할 것 없이 한꺼번에 뒤로 넘겨 질끈 묶고 다녔던 긴 머리가 단숨에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진작부터 별러 왔던 일이라 발밑에 툭툭 떨어지는 머리카락들한테 혜란은 한 톨의 미련도 없었다. 빚 청산이라도 하는 것처럼 시원하기만 했다. 이윽고 거침없던 가위 소리가 멈췄다. 미용사는 스펀지로 목과 어깨의 머리카락들을 털어 주었다. 혜란은 안경을 쓰고 거울을 보았다. 낯선 아이가 거울 속에 있었다. 정아와 지원이는 보기 좋다고, 진작 자르지 그랬냐고 앞 다투어 말했다.
“이제 앞머리는 그때그때 잘라 주고 뒷머리도 끝이 뒤집어지지 않게 빗을 안으로 말아 넣어 수시로 빗어 줘.”
정아가 꼼꼼하게 일러 주었다. 혜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껏 미련스럽게 머리를 길러 묶고 다닌 것은 돈 때문이었는데, 이젠 자주 미용실 출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세 사람은 미장원을 나왔다. 바람에 찰랑거리는 단발머리가 어색하면서도 기분 좋았다. 시험도 끝났고, 머리도 잘랐고, 셋이 모처럼 뭉치기도 했는데, 그 다음은 뭘 해야 할지 몰라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때 정아가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할머니는?”
“오늘 고모 집에 갔어.”
당장 돈을 거둬서 장을 본 다음 정아 집으로 갔다. 일단 라면부터 끓여 먹었다. 그런 다음 쟁반 가득 담긴 과자를 집어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잠시 후 부엌으로 나갔던 정아가 뭔가를 또 들고 왔다. 소주였다. 지원이는 무슨 탈선 현장을 본 양 눈이 동그래졌다. 세 사람은 홀짝홀짝 술을 나눠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 술을 먹는다는 지원이는 매번 잔을 깔끔하게 비운 것은 물론 다 먹고 나서도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기까지 했다. 정아와 혜란은 배를 잡고 웃었다. 한 병이 순식간에 비었다. 정아는 쪼르르 달려가더니 또 한 병을 들고 왔다. 이미 알딸딸해진 혜란은 깜짝 놀랐다. 지원이야 멋모르고 먹는다지만 정아는 진짜 잘 마셨다. 한 잔 두 잔 할머니 상대를 해 주다 보니 어느새 술이 늘었다고 했다. 정말 그렇게 먹고도 정아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난 해방감에다 알코올까지 들어가니 이제 다들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다. 정아는 장롱에서 카세트 라디오를 꺼내 거기다 팝송 테이프를 넣고 볼륨을 최대한 높였다. 곧 방이 떠나갈 듯 강렬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셋은 벌떡 일어나 몸을 흔들었다. 좁은 방안에서 서로 깔깔대며 부딪치고 노래도 악을 써 가며 따라 불렀다. 주인집에서 시끄럽다고 달려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이내 노랫소리에 묻혀 버렸다. 하루쯤 미쳐 날뛴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 언제 또 이런 기분을 느껴 보겠어? 시험에서 해방되는 것도 이젠 마지막인데....... 그런 생각들이 없던 용기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근데 ‘마지막’이란 말이 예리한 칼끝처럼 혜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혜란은 더 악을 썼다. 얼마 후 지칠 대로 지쳐 하나둘 방바닥에 나자빠졌을 땐 다들 온몸이 땀으로 범벅돼 있었다.
며칠 후, 중간과 기말을 합친 3학년 1학기 최종 성적이 나왔다.
혜란은 열일곱 과목 중 ‘우’가 세 개고 나머진 모두 ‘수’로, 상업과 119명 중 7등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지원이는 9등이었다. 혜란은 통지표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문득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미국 드라마를 볼 때마다 얼마나 그들이 신기하고 부러웠던가. 피 튀기는 두뇌 싸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혜란은 학문의 기쁨을 좀 더 느끼고 싶었다. 허나 혜란이 당면한 최우선의 과제는 오직 취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