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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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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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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반


BY 하윤 2013-06-14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에도 혜란은 계속 학교에 남았다. 학기말고사 때까지 고삐를 늦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때는 바야흐로 신록이 무르익어 가는 초여름이었다. 창문 너머 라일락 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데다 정아의 맹렬한 유혹까지 곁들여져 혜란은 가끔 땡땡이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은 꽤 오랜만에 G대 잣나무 숲에 셋이서 가게 되었다. 맑고 시원한 숲의 기운은 온몸을 정화시켜 주었다. 그런데 지원이의 표정이 많이 어두웠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L그룹 면접 때문이라고 했다. 1차 필기시험을 떡하니 통과했을 때 혜란은 이미 합격한 걸로 받아들였는데 당사자는 또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혜란은 “넌 될 거야. 널 안 뽑으면 도대체 누굴 뽑겠니?” 라며 지원이를 응원했다.

“최종 발표가 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어. 변수란 게 있잖아?”

“야, 네가 벌벌 떨면 아예 원서도 못 받는 사람은 죽으란 말이니?”

지원이가 뜻밖에 약한 모습을 보이자, 시큰둥하게 떨어져 앉아 있던 정아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근데, 정아 넌 취업 같은 거에 관심 없었잖아?”

그랬다. 지금껏 정아는 인문계도 실업계도 아닌 별나라 학교에 다니는 듯 여유만만 했었다. 정아는 지금 현재 행복하면 그걸로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였다. 그런 정아의 입에서 원서 얘기가 나왔다는 것도 하나의 사건이었다.

“여상이니까 무조건 취업에만 목매야 한다는 게 기분 나빴을 뿐이지 나라고 왜 신경이 안 쓰이겠어? 내가 무슨 재벌 딸도 아니고.” 정아마저 솔직하게 나오니까 혜란도 뭔가를 고백하고 싶어졌다.

“맞아. 우리는 입학하는 순간부터 취업 말고는 절대 다른 생각을 못하게끔 세뇌를 당해 온 거야. 그것도 상위권 애들 중심으로만. 이도저도 아닌 애들은 무력감에 휩싸여 아무 생각도 못하게 됐고. 행여 나처럼 만화를 그리고 싶다든가 하는 꿈이 있어도 그걸 들먹인다는 건 엄두도 못 내는 거지.......”

‘상위권 애들’ 중 하나인 지원이가 곧장 반박했다.

“잘하는 애들 위주로 학교에서 밀어 준다지만 막상 그 입장이 돼 보면 좋지만은 않아.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하라니까 해야 되나 보다 할 뿐이니까. 나만 해도 뭘 알고 L그룹에 지원했겠어? 거기가 좋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게 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 너는 운이 좋은 거야. 시간이 오래 걸려도 그 꿈을 향해서 가야 한다고 봐, 나는.”

“그래, 혜란이 넌 만화가 해라. 그림도 잘 그리고 스토리도 잘 짓잖아?”

지원이와 정아는 모처럼 의견 일치를 이루었다. 혜란은 공부 때문에 잠시 밀쳐 두었던 만화에 대한 그리움이 뭉클 솟는 걸 느꼈다. 막연하기만 했던 미래가 성큼 다가온 듯해서 셋은 불안과 설렘이 뒤섞인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6월 중순쯤에 학기말고사 일정이 발표되었다.

7월 3일부터 5일간 치른다고 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원성을 쏟아냈지만 혜란은 내심 그 소식이 반가웠다. 느슨해진 스스로를 재정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벼르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혜란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생각’이라는 괴물이었다. 아버지의 술주정이나 가난의 구차함 따위는 당하는 그 순간만 눈 딱 감고 견뎌 내면 그만이지만, 이놈의 시작도 끝도 없는 ‘생각의 굴레’는 단 한 순간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중간고사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지만,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또 다시 서서히 그 괴물의 공격을 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매일 매일이 시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험 발표가 나자마자 혜란은 지금 이 순간부터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학기말 고사에만 집중하자고 최면을 걸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전투를 앞둔 전사처럼 묘한 흥분까지 몰려왔다. 반응은 곧 온몸으로도 왔다. 맨 먼저 배가 좍 당겨 오면서 미세한 두통의 조짐까지 느껴졌지만, 적당한 긴장 상태에서 오는 안정된 그 느낌이 오히려 좋았다.

그즈음 G대 앞에선 시위가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었다. 형체도 없는 최루탄 가스는 매번 매운 눈물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대학생들과 전경들이 삼엄하게 대치하고 있는 G대 교문 앞은 늘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느긋하게 수다를 떨다가도 그 앞에만 당도하면 정아와 혜란은 약속이나 한 듯이 코와 입을 틀어막고 후다닥 뛰어서 거기를 통과했다. 그런데 G대를 살짝만 벗어나면 행인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었고, 그러면 혜란은 좀 전의 그 상황들이 거짓말 같고 참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혜란으로선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잠깐씩 접하게 되는 마감 뉴스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아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은 그저 하나의 거대한 물음표였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자기랑 몇 살 차이 안 나는 저 대학생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싸우는지, 투쟁이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기는 한지, 모든 게 의문이었다. 그런데 혜란은 왠지 자기 같은 상고생은 세상일이나 사회에 참견할 자격이 없는 것 같고, 나중에 졸업 후 사회인이 된다 해도 그런 기회는 올 것 같지 않아 씁쓸했다.

 

학기말고사 이전에 먼저 넘어야 할 산은 실기 시험이었다.

실기 과목은 전체 교과의 반을 차지했는데 혜란은 체육이 가장 골치 아팠다. 마음씨 좋은 체육 선생이 배구, 농구, 테니스, 배드민턴 중 자신 있는 한 종목을 선택해 웬만큼 하는 모습만 보이면 최대한 통과시켜 주겠다고 했는데도 혜란은 한숨만 내쉬어야 했다. 지원이도 체육을 싫어했다. 그래서 지원이와 그중 쉬워 보이는 배드민턴으로 종목을 정한 뒤 체육 시간마다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그런데 혜란은 먼저 치른 말 타기 시험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그것도 연습을 해야 했다. 말 타기란, 등을 구부린 채 서 있는 여덟 명을 뜀틀처럼 연속으로 뛰어 넘는 종목이었다. 성공한 아이들은 모두 5점씩 받았는데, 아파서 쉬었거나 혜란이처럼 실패한 사람들은 아예 기본 점수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 누락된 아이들이 다 같이 체육 선생한테 몰려가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졸랐는데 다행히 허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배드민턴이야 다들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서로 부담 없이 연습을 할 수 있었지만, 말 타기는 자기 하나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희생해야 하는 일이어서 혜란은 선뜻 부탁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이들이 서로 나서서 연습 상대가 돼 주었다. 특히 교내 체육 대회 때면 여기저기 대표 선수로 뛰기 바쁜 정아는 몸소 시범까지 해 보이며 혜란을 도왔다. 장애물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정아의 자태는 가히 예술이었다. 혜란은 입을 짝 벌리고 감탄했다.

“아! 너처럼 운동 신경이 발달한 애랑 나 같은 몸치랑 같은 조건으로 시험을 봐야 한다는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니?”

“야, 운동 신경 그딴 거 다 필요 없어. 지원이 봐라, 저렇게 뻣뻣한 몸으로도 통과했잖아? 왜냐, 독종이니까!”

정아의 말이 맞았다. 지원이는 어떻게든 통과하겠다는 각오로 임했고, 혜란은 절대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먼저였으니 그 결과가 다를 수밖에. 정아는 일단 한 명만 넘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해 보라며 몇 번이고 등을 구부려 주었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조금 자신이 붙으니까 연습만 충분히 하면 여덟 명도 가능할 것 같았다.

말 타기 연습은 며칠간 계속되었다. 해질 무렵 배를 채우고 난 아이들이 소화도 시킬 겸 하나둘 운동장에 모이면 자연스럽게 말 타기를 시작했다. 혜란이만 하는 게 아니라 번갈아가며 했기 때문에 덜 미안했다. 혜란이 바닥에 넘어져 뒹굴거나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거나 하면 다들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깔깔대면서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면 오후의 나른함과 피로가 싹 달아났다. 드디어 한 사람도 못 넘어 쩔쩔매던 혜란이 다섯 사람을 연속으로 넘게 되자 친구들이 더 기뻐하며 박수를 쳐 주었다. 그들을 향해 V를 날리다가 혜란은 움칠했다. 지금의 자신과 소정이한테만 목을 맸던 예전의 자신이 같은 사람이 맞나 싶어 깜짝 놀랐던 것이다.

지금껏 무조건 ‘가’를 받았던 체육에서 ‘수’를 받고야 말겠다는 당찬 목표를 세운 것도 혜란이 달라졌다는 증거였다. 체육은 사실 수업 시수가 낮아서 성적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점수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혜란이 체육에 몇 시간씩이나 투자해가며 연습을 한 것은 거기서 ‘수’를 받아야 전 과목 ‘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 과목 ‘수’ 역시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중간고사를 잘 본 덕분에 한번 기대해 볼만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혜란은 결국 5점을 따지 못했다. 얼굴이며 손바닥이 까져 가면서까지 연습을 했지만 여덟 명을 동시에 넘는 데는 실패했다. 다행히 배드민턴에서는 75점을 다 건졌다. 취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 주려고, 쉬운 종목은 점수 배분을 많이 하고 어려운 종목은 조금만 해 준 체육 선생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제 목표대로 ‘수’를 받으려면 필기시험 20점 만점에서 적어도 16점은 받아야 했다. 열 문제 중 여덟 문제를 맞혀야 하는 것이다. 체육 선생은 체육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만 있으면 잘 맞출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특별히 이론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고 따로 범위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여덟 문제나 맞힌다는 건 힘들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우’였다. 전 과목 ‘수’의 야망이 초장부터 깨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혜란은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자기가 계속 5점에 연연하면 도와준 친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깨끗이 털어 버리기로 마음먹었더니 진짜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아쉬움을 완전히 떨쳐 버린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넌더리가 날 때까지 그 문제에만 집착했던 때와 비교하면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그건 점수 몇 점과는 댈 수도 없는 친구들의 우정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혜란은 자신의 노력으로 변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친구들이 혜란을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