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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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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반


BY 하윤 2013-06-14

혜란은 귀를 꽁꽁 틀어막은 채 공부에만 전념했다.

3학년 때 성적만 보는 곳도 의외로 많다는 말만이 유일한 위안이자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이번 중간고사에 혜란의 인생이 몽땅 걸려 있다는 뜻도 되어서 부담감 또한 엄청났다.

혜란은 학기 초부터 두통과 복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는데 중간고사가 다가올수록 그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다. 특히 배가 좍 죄어들었다가 솨 하고 풀리기를 반복하는 복통은, 배가 바짝 오그라드는 순간에는 숨도 잠시 멈추어야 할 만큼 고통이 심했다. 불안과 긴장이 고조될 때면 상태는 극에 달했다. 지금까지는 공부 말고는 절대 딴 짓을 하지 않음으로써 어느 정도 그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디데이가 임박할수록 그마저도 소용없어졌다. 눈을 부릅뜨고 책을 보고 있어도 두통과 복통은 숨 쉬듯이 혜란을 괴롭혔다. 겉으로는 평화로이 공부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온갖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혜란이 할 수 있는 건 꾹 참는 것밖에 없었다. 온몸이 바짝바짝 마르고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몸 안의 수분이 정말로 다 증발될까 봐 혜란은 수시로 물을 들이켰다. 심신이 피폐해져 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밤 9시까지 남아서 공부하는 일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그냥 책상에 쓰러져 잠을 자더라도 시간을 지켰다. 정아는 혜란이 독하다고 혀를 내둘렀고 지원이도 걱정스런 눈빛을 보냈다. 혜란은 여건만 허락한다면 학교에서 밤이라도 새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집에 왔다고 해서 곧장 발 뻗고 잘 수는 없었다. 눈꺼풀을 까뒤집어 가면서라도 자정까지는 공부를 해야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시간은 부족했고 해야 할 공부는 산더미였다.

혜란은 운동을 쉬느라 밀쳐 두었던 자명종을 꺼내 다시 새벽 5시에 맞췄다. 첨엔 본드라도 칠한 듯 눈이 떠지질 않았다. 억지로 깨서 책을 펼쳐도 머리만 멍한 것이, 한두 시간 더 활용하려다 괜히 하루를 다 날려 버리는 게 아닐까 염려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인문계 고3들은 일 년 내내 이보다 더 심하다는데, 겨우 두세 달 한 거 갖고 엄살떨 수는 없다는 생각과 오기로 악착같이 버텼다. 그리하여 며칠 비몽사몽 헤맨 끝에 드디어 자명종이 울리면 바로 눈을 떠서 책을 볼 수 있게끔 훈련이 되었다.

한번은 아침밥을 하러 나온 엄마가 작은방에 불이 환히 켜진 걸 보고, 불도 안 끄고 잠을 자냐며 한바탕 퍼부을 기세로 문을 벌컥 열었다가, 공부에 몰입해 있는 혜란의 모습에 기가 죽어 혼잣말을 하며 문을 닫기도 했다.

“저게 뭐에 씌어도 단단히 씌었구먼.......”

 

혜란의 공부법은 단순하고 무식했다.

시험 범위 안의 내용을 통째로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선생들이 나눠 주는 프린트 물과 꼼꼼하게 정리한 지원이의 노트를 바탕으로 모든 과목을 달달달 외웠다. 수학은 일단 제쳐 두었다. 그것만 물고 늘어지다 낭패를 본 쓰라린 기억은 2학년 때 한 번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의 희소식이 들려왔다. 이번 수학 시험은 전부 교과서 안에서 출제될 거라는 소식이었다. 혜란은 시험 범위 안의 문제들을 몽땅 외워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원리나 개념을 이해하고 식을 세워 풀기에는 머리도 시간도 안 따라 주니 그냥 풀이 과정과 답을 암기해 버리는 게 더 빨랐다. 그 많은 분량을 한꺼번에, 그것도 단시간에 집어넣으려니 머리에선 쥐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연습장이 새카맣게 되도록 교과서를 읽고 쓰는 수밖에는.

날이 갈수록 피로와 수면 부족이 누적되고 두통 복통에 귀의 통증까지 심해져 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문득문득 덮쳐 오는 회의였다.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그런다고 과연 뭐가 달라지기는 할지, 그런 의문들은 그나마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사기마저 뚝뚝 떨어뜨렸다. 현재의 노력에 대해 어떤 대가나 보상도 담보돼 있지 않다는 것은 맥 빠지는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혜란은 새록새록 정우오빠를 떠올렸다. 고작 중간고사 한 번에 목매는 것도 이렇게 힘겨운데, 고교 3년을 포함해 재수 삼수에 이르기까지 몇 년에 걸쳐 S대라는 괴물과 싸워야 했을 정우오빠의 고통은 거의 상상 불가였다. 생각이 그쯤에 이르면 혜란의 투정은 자연스럽게 쏙 들어갔다.

 

드디어 중간고사가 다음날로 다가왔을 때,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또 집을 나갔다.

밤 10시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혜란을 기다리고 있는 건 온통 어질러진 집과 인사불성이 돼 뻗어 있는 아버지뿐이었다. 자기 전에 한 과목이라도 더 훑어보려고 숨 가쁘게 달려왔던 혜란은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지랄, 네깟 게 이제 와서 공부는 무슨 공부, 그렇게 엄마 아버지가 합심해서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혜란은 부글부글 화가 솟구쳤다가 이내 체념 상태가 되었다. 시험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자기도 엄마처럼 어디든 달아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도망을 가려 해도 배가 너무 고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혜란은 일단 부엌을 뒤져 빈속부터 채웠다. 그러고 나니 조금 기운이 나서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혜란은 찬밥에 김치뿐인 밥상을 차려 아버지 앞에 내놓았다.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을 찾았다. 혜란은 얼른 물을 떠다 주었다. 아버지는 물 한 대접을 꿀꺽꿀꺽 들이키고는 밥상은 본 척도 않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혜란은 홀로 우적우적 밥을 먹었다. 혜란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올 때까지 아버지는 벽을 향해 돌아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술이 깨고 정신이 돌아오면 아버지는 늘 그런 식이었다. 간밤에 자신이 저지른 추태를 모른 척하는 것이다. 비겁하게!

4교시 시험이 모두 끝났을 때 혜란은 혼이 반쯤 나가 있었다. 어떻게 문제를 풀고 답지에 옮겨 적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시험 시작 전부터 골이 지끈거리기 시작하더니 한 문제 한 문제 풀 때마다 뇌 속을 손가락으로 헤집는 듯 엄청난 고통이 엄습해 왔다. 당장이라도 볼펜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솟았다. 그게 안 된다면 차라리 확 기절이라도 해 버렸으면 싶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첫날의 시험은 끝이 났다.

저녁 9시가 지나자 당직 선생이 3학년 교실을 돌며 귀가를 재촉했다. 혜란은 맨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교실을 나왔다. 캄캄한 복도를 걸어 나오려니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정아는 스릴 있다며 깔깔댔지만 혜란은 애써 잊고 있었던 집이 떠올라 금세 처량한 기분이 되었다. 엄마가 아직 집에 안 들어와 있을 경우를 상상하니 암담하기만 했다. 정아는 낮에 자신의 도시락을 나눠 주며 혜란이가 왜 점심을 안 싸 왔는지 궁금해 했지만, 혜란은 엄마가 집 나갔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 대충 둘러댔었다.

지원이와는 교문을 나와 바로 갈라지고, 어느새 정아와도 헤어져야 하는 지점까지 왔을 때 혜란은 그대로 정아 집까지 따라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정아가 어찌나 부럽던지 저도 모르게 눈물까지 핑 돌았다. 하지만 화목한 집은 원래 혜란의 몫이 아니었다. 혜란은 재빨리 마음을 접고 터벅터벅 집을 향해 걸었다.

 

엄마는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엄마가 집 나간 걸 트집 잡아 또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렸다. 혜란은 거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죽기 살기로 시험에만 집중했다. 잠자는 순간까지도 팽팽한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 초긴장 상태가 며칠 지속되다 보니 시험 마지막 날에는 죽으면 죽었지 이제 더는 못하겠다 싶은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5일간의 시험은 끝이 났다.

혜란은 서둘러 가채점을 해 보았다. 총점은 750점 만점에 710점, 평균은 50점 만점에 47점이었다. 늘 40점 밑에서만 맴돌던 혜란에게 그렇게 높은 점수는 난생 처음이었다. 지원이의 평균이 46점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혜란의 심장은 더 세차게 뛰었다. 비록 1점 차에 단 한 번일망정 지원이를 이긴 것이었다. 놀랄 일은 수학에서도 벌어졌다. 늘 전체 평균을 깎아먹기만 했던 수학에서 혜란은 한 문제만 틀려 48점을 받은 것이다. 교과서 위주의 문제에다 전체적으로 쉽게 출제가 되었다고는 해도 혜란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와우! 진짜 끝내준다. 정말로 성적이 이렇게 오를 수도 있는 거구나, 응? 혜란이 너 손바닥이 새카맣게 되도록 공부할 때 진작 알아보긴 했다만.......”

정아는 지원이를 꺾어서 더 통쾌하다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런 정아의 극성이 부담스러웠겠지만 이번만은 계속 떠들어 주었으면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고 황홀했다. 풍선 한 천개쯤에 매달려 하늘로 둥둥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두 달 반 정도 전력투구한 것치곤 너무 과한 결과가 아닌가 싶어 민망하기도 하고, 왜 좀 더 일찍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하는 후회도 들고, 뒤늦게나마 이런 성취감을 맛보게 되어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아무튼 오만가지 생각들이 교차했다. 그중에서도 혜란의 마음을 가장 뜨겁게 달군 것은 이제 앞으로 뭐가 덤벼 와도 끄떡없을 것 같은 자신감이었다. 그건 새벽 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성취감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덕분에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날아든 L그룹의 원서를 단숨에 거머쥔 지원이를 혜란은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부럽고 샘이 나서 마음이 복잡했을 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취업과장선생이 지원이를 보자마자 오케이 했다는 등의 뒷말이 떠돌아도 느긋하게 들어 넘길 수 있었다.

“무역과 일등도 떨어졌대. 공부만 따지만 걔가 지원이보다 더 나은데. 대체 취업과장은 무슨 기준으로 지원이를 뽑은 거야? 예뻐서? 근데 지원이 걔 어디가 예뻐? 차갑고 도도한 것도 매력이라면 할 말 없지만. 솔직히 같은 여자 입장에서 보면 그냥 평범하지 않니?”

“아이고, 우리가 보기엔 별론데 은근히 남자가 많이 따르는 건 바로 너거든!”

혜란은 정아를 실실 골려 주었다. 전에는 정아가 지원이를 공격할 때마다 혜란도 은근슬쩍 맞장구를 쳐 주었는데 이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겼다. 오히려 지원이가 한 번에 합격했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건 참 놀라운 경험이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여유롭게 받아들일 때 오히려 마음이 더 가뿐해진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