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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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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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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반


BY 하윤 2013-06-13

4월 중순이 되자 운동장의 벚나무들이 일제히 몽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는 아직 쌀쌀하지만 낮 시간에는 제법 햇살이 따사로웠고 바람도 부드러웠다. 정아는 수시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혜란의 마음도 괜스레 싱숭생숭해졌지만 더는 휩쓸릴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그 와중에 수연이한테서 연락이 왔다. 수연이는 얼굴 본 지 너무 오래 됐다며 한번 만나자고 했다. 하긴 마지막으로 수연이를 본 게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혜란은 중간고사 끝날 때까지는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수연이 앞에선 웬만하면 학교 다니는 티를 안 내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수연이는 학교로 찾아가도 되느냐고 물었는데 차마 그것까지는 혜란도 거절할 수 없었다.

며칠 후 수연이는 정말로 혜란이네 교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교실 밖에서 기웃대던 수연이는 늘어져라 하품을 하던 정아의 눈에 가장 먼저 포착되었다.

“혜란아, 누가 너 찾는데?”

혜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수연이를 쳐다보았다. 남아서 공부하던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무슨 건수가 없나 하고 몸을 뒤꼬던 정아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혜란은 얼른 수연이의 손을 잡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벚나무 아래 벤치에 앉으니 4층 복도 창문으로 열심히 손을 흔드는 정아가 보였다. 혜란은 수연이 앞에서 정아와 친한 척을 하기가 좀 그래서 모른 척했는데, 오히려 수연이가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쟤, 너랑 친하지?”

“왜?”

“네가 좋아 죽겠다고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잖아.”

“원래 좀 저래.”

혜란은 부러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나저나 너 공부하는 모습, 보기 좋더라.”

“좋기는, 죽을 맛인데.......”

“나도 공부하다 한번 죽어 봤으면 좋겠다.”

그 말에 혜란은 더 이상 공부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수연이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암만 힘들어도 자기보단 나으니까 엄살떨지 말라고,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혜란의 입을 막아 버리곤 했다. 혜란은 화제를 돌렸다.

“이 시간에 어떻게 왔어?”

“오늘 결근했어.”

“왜?”

“그냥. 갑자기 너도 보고 싶고 봄바람도 쐬고 싶고 그래서....... 여기 오길 잘한 것 같아. 꽃이 참 예쁘다.”

“우리 학교는 이 벚꽃 말고는 볼 게 없어.”

“무슨 소리야? T시에서 S여상 하면 다들 알아주던데? 취직이 그렇게 잘 된다면서?”

“그럼 뭐해? 내가 취직이 잘 돼야지.”

“왜? 자신 없니?”

“좀 그렇지 뭐. 일단 성적이 돼야 취직도 잘 되는 거니까.”

“암만 그래도 다시 공장에 다닌다거나 하지는 않을 거 아냐?”

혜란은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급격하게 침울해지는 수연이의 표정 때문이었다. 혜란은 수연이의 심정이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봉제 공장에 다닐 때 같은 회사에 다니는데도 공원과 경리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차별을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혜란은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워섬겼다. 하지만 수연이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문득 예감이 안 좋았다. 혜란은 수연이한테서 뭔가 심각한 고백을 또 들을 것만 같아 가슴이 덜컥했다. 잠시 후 수연이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예전의 ‘임신’에 맞먹을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수연이는 현재 가방 공장에 다니고 있는데 거기 사장한테 성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그 사장이란 놈은 나이도 쉰이 다 돼 가고 군대 간 아들까지 있는 유부남이었다. 문제는 그게 한 번으로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데 있었다. 잔업을 하고 난 뒤 집에 바래다준다기에 차를 얻어 탔다가 처음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그런 식으로 몇 번 더 이어진 끝에 이제는 사장이 아예 수연이의 자취방으로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혜란은 기가 막혔다. 그런데 더 어이없는 것은 전혀 분노하지 않는 수연이의 태도였다.

“당장 거기 때려 쳐! 거기 아니면 일할 데가 없니?”

“다른 데 어디? 어딜 가도 다 똑같아. 누가 나 같은 애를 사람 취급이나 해 주는 줄 아니? 딴 데 가서 생판 낯선 인간들한테 무시당하는 것도 이젠 질렸고, 억지로 적응하려고 몸부림치는 것도 정말 지긋지긋하다. 차라리 익숙한 데서 익숙한 인간들한테 당하는 게 낫지. 사람 다 거기서 거기잖아, 별 거 있어?”

수연이는 극도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었다. 거기다 놀랍게도 그 사장을 의지하고 있었다. 아니 좋아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수연아! 우리 이제 스무 살이야. 그렇게 막 살면 안 돼. 유부남에다 나이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랑 뭘 어쩌려고 그래?”

“그래도 나한테 잘해 줘. 지금까지 이렇게 잘해 주는 사람은 없었어.......”

수연이는 고집스레 말했다. 그리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수연이는 바싹 마른 꽃잎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쉽게 바스러질 것 같은 꽃잎. 그런 수연이에게 스물이라는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수연이의 어깨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이의 절망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그런 애를 붙들고 인간의 도리가 어떠니 윤리가 어떠니 들먹이는 건 너무 잔인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수연아, 나중에 네 남편 될 사람을 생각해 봐. 사장이 아무리 잘해 줘도 네 장래까지 책임져 줄 건 아니잖아? 그렇다면 길게 봐야지. 당장은 좀 힘들지 몰라도 지금 정리하는 게 맞아. 너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자신이 없어. 이제는 사장이 며칠 뜸하면 내가 기다려. 이 넓은 세상에서 나를 찾아줄 사람이라곤 그 사람뿐이니까. 넌 혼자 지내보지 않아서 내 심정 모를 거야. 얼마나 무섭고 외로운지 몰라. 설령 도둑이 문을 두드린대도 반길 판이야.......”

혜란은 와락 수연이의 손을 잡았다.

“수연아, 미안해. 내가 너무 무심했어.”

“아니야. 그래도 가끔 이런 내 속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다는 게 어딘데.”

그때 언제 왔는지 정아가 혜란의 어깨를 툭 쳤다.

“뭐야? 왜 이렇게 심각해? 영화 찍냐?”

정아 옆에는 지원이도 있었다.

“친구 소개 안 해 줄 거야?”

“아, 맞다. 그래야지.”

혜란은 세 사람을 서로 소개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조신하게 눈인사만 하는 지원이와 달리 정아는 수연이의 손을 붙잡고 법석을 떨었다.

“와! 혜란이 친구면 내 친구도 되지 뭐. 반갑다 친구야. 어느 학교 다녀?” 수연이는 볼이 발갛게 된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수연이는 벌써 졸업했지. 자자, 밥 먹으러 나온 거면 얼른들 가.”

혜란은 정아와 지원이의 등을 떠밀었다.

“미안, 정신없었지?”

겨우 애들을 교문 밖으로 쫓아내고 돌아오니 수연이는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어쩐지 그 웃음이 눈물보다 더 아프게 와 닿았다. 혜란은 가만히 수연이 옆에 앉았다. 서편 하늘에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쟤들도 뭘 먹으러 가나 본데 넌 저녁 안 먹어? 가자. 내가 사 줄게.”

“난 도시락 싸 왔어.”

도시락은 이미 먹어치웠지만 밥 먹고 어쩌고 하다 보면 시간이 다 가 버릴 것 같아 혜란은 수연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오늘만 좀 일찍 가면 안 돼? 오랜만에 만난 건데.”

“미안. 시험이 정말 코앞이라서.”

“그래? 내가 날을 잘못 잡았네. 시험이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줄은 몰랐어. 미안.”

수연이는 결국 삐쳐 버렸다. 혜란이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준다고 하자, 됐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비꼬았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툭툭 함부로 말을 내뱉는 수연이가 못마땅하기는 혜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둘은 교문 앞에서 찜찜하게 헤어졌다.

“너 앞으로도 계속 나랑 친구 할 수 있어?”

수연이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당연하지.”

혜란은 냉큼 대답했지만 수연이는 쓸쓸하게 등을 돌렸다. 혜란은 수연이가 언덕바지를 다 내려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수연이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곤 순식간에 혜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간 혜란은 마음이 아팠다. 자기가 이렇게까지 이기적인 인간이었나 싶어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흐르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지금은 오로지 중간고사에만 집중하자! 혜란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분식집에서 막 나온 정아와 지원이가 혜란을 불렀다. 정아는 입가에 떡볶이 국물을 묻힌 채 소리쳤다.

“야! 아까 그 친구는 갔어?”

“응. 근데 입부터 좀 닦지.”

“걔 정말 예쁘더라. 같이 다니면 네가 기 좀 죽겠던데?”

정아는 손등으로 입 주변을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왜? 내가 어때서? 끼리끼리 만난다는 말 몰라?”

“하이고,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지만.”

정아는 달아났고, 혜란은 쫓아갔다. 그 모양을 본 지원이는 허리까지 꺾어가며 웃어댔다. 지원이가 웃는 걸 보고 정아와 혜란도 따라 웃었다. 어둠이 내리는 운동장에 그들 세 사람의 웃음소리만 크게 울려 퍼졌다. 혜란은 환하게 웃는 정아와 지원이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직 이렇다 할 좌절이나 시련을 경험하지 못한 그 아이들과 산전수전 다 겪은 수연이가 같은 또래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혜란은 완전히 정아와 지원이 쪽에 속하고 싶었다. 그게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스무 살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