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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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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반


BY 하윤 2013-06-13

부기 2급 합격자 발표가 났다.

혜란은 총알같이 게시판 앞으로 달려갔다. 16절지 크기의 공고문 앞에는 이미 수많은 머리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혜란은 일단 뒤쪽으로 물러나 심호흡부터 했다.

붙은 아이들의 환호와 떨어진 아이들의 탄식이 뒤섞여 시끌벅적하던 게시판 앞은 얼마 지나지 않아 썰물이 빠지듯 조용해졌다. 혜란은 그제야 천천히 다가가 명단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깨알 같은 숫자들 틈에서 혜란은 2147번이라는 번호와 선명하게 찍힌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혜란은 침착하게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런 다음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먹으로 찍어내며 잽싸게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혜란은 거기서 쪼그려 앉아 울다가 나중에는 다리에 쥐가 나서 서서 울었다.

상업 과목은 다 혜란과 안 맞았지만 부기는 특히 상극이었다. 대손충당금이니 감가상각이니 매출순이익이니 하는 용어는 아무리 들어도 딴 나라 말 같았고, 허구한 날 T자 계정을 그려 놓고 항목과 숫자를 채워 넣는 일은 따분하기만 했다. 주산이나 타자는 어떻게든 혼자서 연습만 하면 된다지만, 부기는 일일이 지원이한테 물어보면서 풀어야 했기 때문에 그 스트레스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런 부기를 한방에 붙어 버렸으니 감정이 북받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혜란은 문득 정아를 떠올랐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정아도 시험을 쳤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혜란은 얼른 교실로 뛰어갔다. 4층 계단을 단숨에 올라가고 있는데 마침 정아가 내려오고 있었다. 책가방을 손에 든 채. 혜란은 숨을 헐떡이며 정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아의 시무룩한 표정 때문에 말을 붙이기가 망설여졌다. 그럴 때면 으레 정아가 먼저 왜? 사람 첨 봐? 하며 말을 걸어 주는데, 이번에는 무심히 혜란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 버리는 게 아닌가.

머쓱해진 혜란은 터벅터벅 교실로 돌아왔다. 남아 있던 아이들이 결과를 궁금해 했다. 혜란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들은 조용조용 축하한다고 했다. 떨어진 사람을 배려해서였다. 그건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된 게 아니고 1, 2학년 때부터 수없이 그런 과정들을 거치는 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분위기였다. 다들 정아에 대해서도 안타깝다고 한 마디씩 했다. 맨날 둘이 붙어 있다가 혜란이 혼자 남으니까 정아의 불합격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혜란은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정아의 풀 죽은 모습만 자꾸 어른거렸다. 전에 둘 다 떨어졌을 때 정아는 자기 기분은 아랑곳 않고 혜란을 위로해 주기에 바빴다. 이번에는 혜란이 그 역할을 해 줬어야 했다. 아까 정아 뒤를 곧장 따라 갔어야 했다. 혜란은 정아가 자기 옆을 스쳐 지나갈 때 분명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공부할 시간을 날려 버릴 수는 없다는 계산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정아를 그냥 보내 버렸다. 그래 놓고 후회하는 척이라니, 혜란은 자신이 너무 가증스러웠다.

그런데 솔직히 어느 정도 이기적이지 않고선 공부에 매진할 수가 없었다. 이것저것 다 신경 쓰다 보면 죽도 밥도 안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혜란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더 독해져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암만 그래도 정아를 혼자 보낸 건 큰 잘못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 와중에도 혜란은, 그렇게 치사해지면서까지 남았으니 그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또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더니 거짓말처럼 정아가 나타났다. 혜란은 너무 놀라 어! 하고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왜? 그새 나 보고 싶어 죽을 거 같았어?”

정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능청을 떨었다.

“어, 어떻게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어?”

“가다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문득 내가 지금 왜 여기 있지, 난 교실에 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지 뭐야.”

정아는 씩 웃으며 자기 자리에 앉았다. 정아가 존경스러웠다. 어쩜 그렇게 감정 조절이 신속하고 깔끔할 수 있는지.

“또, 내가 가 버리면 나중에 너 혼자 걸어와야 되잖아? 위험한 밤길에.”

“너, 나 감동시키려고 작정했지?”

혜란은 정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지금껏 정아한테 감동받은 적은 많지만 이번 것은 단연 최고였다.

“어, 둘이 손잡고 뭐해? 이 끈적끈적하고 요상한 분위기는 뭐지?”

언제 왔는지 집에 밥 먹으러 갔던 지원이가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몰랐어? 우리 사귀잖아.”

정아의 대꾸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창밖으로는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혜란은 집중을 잘 하다가도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그 순간만 되면 울컥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더 깜깜해지기 전에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은 초조감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정아만 옆에 있으면 끄떡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