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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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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학년


BY 하윤 2013-06-12

혜란의 인내심은 겨울방학 전날 한계에 다다랐다.

이대로 아무 소식도 못 들은 채 방학에 들어갈 순 없다는 생각에 다급해진 혜란은 1교시가 끝나자마자 3학년 교실이 있는 4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혜란은 교실 뒷문을 빼꼼 열고 안을 살펴보았다. 소정이는 창가 쪽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데 쉬는 시간이면 으레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소정이가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 혜란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혜란은 문 쪽에 앉은 한 아이한테 소정이를 좀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곧 소정이가 나왔다. 혜란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이던 소정이의 얼굴은 혜란을 보더니 더 낯설게 일그러졌다. 그리곤 울음을 참기라도 하듯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봐도 소정이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이었다.

“미안, 내가 괜히 왔나 보다. 갈게.”

혜란이 당황해서 그냥 가려고 하자 소정이가 덥석 팔을 잡았다. 소정이의 뺨은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긴 있구나! 혜란은 재빨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때 수업종이 울렸다. 소정이는 이따 점심시간에 도서관에서 다시 보자고 했다. 그러기로 하고 후다닥 계단을 내려오는데 자꾸만 발이 헛나갔다. 점심시간이 천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4교시 끝나기가 무섭게 혜란은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난방이 안 되는 도서관은 썰렁했다. 소정이는 벌써 와 있었다.

“어, 빨리 왔네? 밥도 안 먹고 온 거야?”

혜란은 애써 밝은 척했다. 소정이는 조용히 웃었다. 혜란은 소정이 옆에 앉을까 하다가 맞은편 의자를 끄집어냈다.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타원형의 베이지색 탁자 표면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소정이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만년필이었다. 혜란은 그 물건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오빠의 유품이야. 다른 건 다 태웠어. 아버지가 꼴도 보기 싫다고, 오빠와 관련 있는 물건은 모조리 다 버리랬어.......”

혜란은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유품’이라는 말이 거슬려서, 자신이 알고 있는 뜻 말고 또 다른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혜란아! 우리 오빠, 이제 이 세상에 없어.......”

소정이는 결국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혜란은 일단 휴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혜란이 화장실 휴지를 둘둘 말아 들고 왔을 때 소정이는 어느 정도 진정이 돼 있었다. 혜란이 시커먼 재생지를 내밀자 소정이는 고맙다고 하며 받았다. 그걸로 얼굴을 닦은 다음 소정이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시험 전날까지만 해도 정우오빠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는 것, 오히려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는 것, 굳이 특이했던 점을 하나 꼽자면 밤 11시쯤 자러 들어갈 때 엄마한테 그동안 자기 땜에 고생했으니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권했다는 것 정도, 한데 새벽에 엄마가 밥을 짓고 도시락까지 다 쌌는데도 일어나는 기척이 없더라는 것, 그래서 엄마가 들어가 깨웠는데 어찌나 깊이 잠들었는지 아무리 흔들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는 것.......

“엄마는 오빠 머리맡에 있는 약병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어. 아버지가 미친 듯이 오빠를 들쳐 업고 응급실로 달려갔지만.......”

소정이는 또 다시 감정이 북받치는지 휴지로 코를 틀어막았다.

“약병에는 아직 약이 남아 있었어. 그 정도로 사 모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라는 거야. 그만큼 치밀하게 계획해 왔다는 거지. 오빠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오래도록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난 더 충격이었어. 평소의 오빠를 봐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혜란은 소정이가 하는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 잔인한 농담 같았다. 만년필 하나 덜렁 갖다 놓고 정우오빠가 죽었다고 하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오빠를 미워하기만 했던 거야. 내가 실업계에 온 것도 오빠 때문이고, 집안 분위기가 우울한 것도 다 재수 삼수까지 한 오빠 때문이고, 아버지의 극단적인 편애마저 오빠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실은 오빠가 가장 피해자였는데.......”

너무 미안해서 오빠한테 사과도 못하겠다고, 자기 자신에게 벌을 주는 게 먼저라고 말하며 흐느끼는 소정이를, 혜란은 멍청히 보고만 있었다. 어떻게든 위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드는데, 온몸이 마비된 듯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근데 오빠 서랍을 정리하다 이걸 발견했어.”

소정이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큼직한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빨간색 하트 모양의 상자였다. 아, 그것은 혜란이 정우오빠한테 주었던 초콜릿 상자였다.

“다른 건 다 정리했는데, 이건 어쩐지 버리면 안 될 것 같아 내내 갖고 있었어. 오빠한테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게 너무 뜻밖이어서.......” “설마? 어디 독서실 같은 데서 알게 된 여학생이 전체적으로 다 돌린 게 아닐까?”

“아무 의미도 없는데 그렇게 깊숙이 보관하고 있었을까? 그것도 빈 통을.”

“그, 그러게.......”

“처음 이걸 보는 순간은 어찌나 섭섭하고 배신감이 느껴지던지. 오빠랑 나는 비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빠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던 것 같아서 말이야. 근데 지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런 추억 하나라도 간직하고 갔다는 게.......”

어느새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예비종이 울렸다. 소정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란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혜란은 만년필을 집어 소정이에게 주었다. 소정이는 얘기를 들어 줘서 고맙다고 하며 만년필을 받았다. 그 만년필 내가 가지면 안 돼? 소정이는 혜란의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도, 소리 없는 혜란의 절규도, 그 무엇도 눈치 채지 못했다.

2학년과 3학년 교실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둘은 헤어졌다. 소정이는 힘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혜란은 소정이가 안 보일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소정이를 알게 된 이래 그렇게 슬픈 뒷모습은 처음이었다. 마음이 짠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엉뚱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세상은 어쩜 공평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전부를 다 가진 듯 완벽해 보였던 소정이도 결국 저런 불행을 맞이하는구나 하는 생각. 백만분의 일초만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어찌나 선명하던지 부정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이 얼마나 고약하고 못된 건지를 깨닫는 순간 혜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우오빠가 죽었다는데, 소정이가 자기 오빠를 잃었다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자신이 악마 같았다.

 

“지금 아니면 내가 언제 너한테 이런 걸 사 주겠니?”

“너 왜 나한테 편지 안 썼어?”

이어폰을 귀에 꽂은 듯 정우오빠가 했던 말들이 쉬지 않고 혜란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는 흘려들었던 그 말들이 10개월 후 독침이 되어 자신의 심장에 꽂힐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정우오빠와 같이 있다는 사실만이 황송해서, 그가 사 준 음식들을 꾸역꾸역 입에 처넣기에만 바빠서, 벼랑에 몰려 있었을 그의 심정을 헤아려보는 일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혜란은 똑같은 장면만 계속 반복해서 떠올리는 자신의 머리통을, 가능하다면 박살을 내서라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수연이는 힘들 때마다 술을 찾았었다. 그때는 그게 못마땅했는데 이젠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걸 먹고 정우오빠를 떨쳐 버릴 수만 있다면, 혜란도 열 병이고 스무 병이고 들이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수연이 없이 혼자서 먹는 법은 익히지 못했다. 그래서 혜란은 아무 짓도 할 수가 없었다. 수술 중의 각성 상태처럼, 의식도 통증도 생생한데 몸은 꼼짝할 수 없어 죽음 같은 시간을 견디는 수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