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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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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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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학년


BY 하윤 2013-06-11

점점 가을이 깊어갔다.

혜란은 가을이 되면서 부쩍 G대 출입이 잦아졌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도 정아와 의기투합이 되면 지체 없이 가방을 싸곤 했다. 놀랍게도 지원이도 가끔 그 땡땡이에 합류했다. G대는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다웠다. 검붉은 건물 외벽에 붉게 물들어가는 담쟁이덩굴도 낭만적이었지만,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게 들어찬 전나무 숲속의 서늘한 가을 향은 영혼까지 맑게 해 주는 느낌이었다. 셋이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노라면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장소나 분위기에 따라 대화는 물론 사람까지 달라지는 것인지, G대에서만큼은 지원이도 공부나 취업 같은 건 다 잊고 십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갔다. 세 사람의 관심사는 단연 ‘남자’ ‘사랑’ ‘결혼’ 따위였다. 한번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한다면 결혼 전에 관계를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정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고 지원이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혜란은 중간이었다. 머리로는 안 되지만 가슴은 다른 대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화제는 자연스럽게 ‘임신’으로 이어졌다. 미혼 상태에서 임신을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가정 앞에선 셋 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혜란은 수연이를 떠올렸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그 일을 수연이는 직접 겪지 않았던가. 그때 혜란은 수연이가 무책임하고 무분별해서 생긴 일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이라고 특별히 달라질 건 없었다. 사랑 앞에선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고 그 무엇도 섣불리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혜란은 수연이가 임신 사실을 고백했을 때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한 게 새삼 미안했다.

정아는 남자친구가 여럿 있었다. 미팅에서 만나 가끔 데이트를 하는 남학생도 있었고, 동성 친구 이상으로 편하고 만만한 초등 동창도 있었고, 펜팔로 사귀는 군인도 있었다. 나이로 따지면 몇 살 차이는 안 나지만 그래도 군인이라고 하면 완전히 아저씨나 어른 같은 느낌인데 정아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러면서도 정아는 항상 새로운 만남을 꿈꾸었다. 그런 정아를 지원이는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하다고 비난했다. 정아는 지원이한테 수녀원이나 가라고 맞받았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혜란의 짝사랑을 응원할 때는 둘 다 죽이 잘 맞았다.

“지금은 일단 그 오빠가 대입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있으니까, 얌전히 기다렸다가 나중에 합격하면 본격적으로 대시를 하는 거야.”

“그때 당당하게 그 오빠 앞에 나서려면 혜란이 너도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한다든가 뭔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줘야겠지?”

둘은 정우오빠와 혜란을 주인공으로 삼아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혜란은 첨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자꾸 듣다 보니 정말로 그리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면 열심히 공부도 하고 살도 빼고 인격과 교양도 갖춰야 했으므로 괜히 속으로 마음이 급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열띤 이야기들은 G대를 나와 친구들과 헤어지고 차와 사람들로 북적대는 거리를 지나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조금씩 빛을 잃어갔다. 그리하여 집에 도착해 또 어디서 노닥거리다 이제 기어들어 오냐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을 때쯤이면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고즈넉한 전나무 숲속에선 아름다웠던 이야기들이 집에선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유치한 얘기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정우오빠와 사귀는 것도 모자라 결혼까지 꿈꾸다니,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물론 정아도 지원이도 정우오빠라는 ‘사람’보다는 ‘사랑’ 그 자체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을 혜란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어떤 대상으로서 정우오빠가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그래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그 순간만은 황홀하고 행복했으므로 혜란은 후회는 없었다. 또 그 어떤 말로 폄하를 해도 정우오빠는 혜란의 심장에 화석처럼 굳건하게 박혀 있었다.

 

수학여행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교실은 온통 수학여행 얘기로 들썩거렸다. 아이들은 뭘 입고 갈 것인지 가서 뭘 하고 놀 것인지 사진기는 누가 챙길 것인지 등등 계획을 짜느라 하루 종일 들떠 있었다. 수학여행비 이만 칠천 원을 못 낸 혜란만이 그 흥분된 분위기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그런 일은 워낙 몸에 배 있는지라 새삼 서러울 것도 없었다. 다만 지금껏 수학여행이라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솔직히 아이들이 왜 저렇게 기뻐하는지를 몰라 좀 답답할 뿐이었다.

수학여행을 왜 안 가느냐고 지원이가 물었을 때 혜란은 돈을 못 내서 못 간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너무나 덤덤한 자신의 태도에 스스로 놀랐다. 예전 같으면 무슨 죄라도 지은 양 구석에 처박혀서 고개도 못 들었을 일이었다. 정아도 뒤늦게야 그 사실을 알고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며 난리를 쳤다.

“왜? 말했으면 돈이라도 대 주게?”

“아니. 나도 안 가고 그 돈으로 둘이 놀러나 다니게.”

정아의 엉뚱한 대답에 혜란과 지원이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긴 뭐 수학여행이라고 별 거 있어? 이래저래 피곤하기만 하지.”

정아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수학여행이 피곤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멀미는 안 해도 되니 그거 하나는 다행이라고, 혜란도 내심 안도했다.

점심시간에는 뜻밖에도 소정이가 찾아왔다. 소정이는 잘 다녀오라며 여행용 세면도구 세트를 선물로 내밀었다. 혜란은 좀 당황했지만 철석같이 가는 걸로 알고 있는 소정이한테 차마 안 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소정이는 저녁에 전화까지 해 주었다.

“지금 기분이 어때? 아, 나도 또 가고 싶다.”

“그냥 그래.”

“가방은 다 챙겼어?”

“응.”

“새벽에 출발하려면 피곤할 테니 일찍 자.”

“저기, 소정아!”

“응?”

“아, 아니야.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수학여행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혜란은 오로지 정우오빠의 안부만이 궁금했다. 하지만 결국 말도 못 꺼냈다. 그냥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도 있는 건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소정이 앞에서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또 상대방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소정이의 일방적인 친절에도 혜란은 은근히 짜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