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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학년


BY 하윤 2013-06-09

*드디어 2학년

 

2학년이 되자 선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기 시작했다. 1학년은 갓 입학해서 뭘 모르고 3학년 때 무얼 하기엔 이미 때가 늦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첫 단추 운운하며 입학 첫날부터 엄포를 놓았던 선생들이 이제는 2학년 시절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와 밤 12시에야 귀가하는 인문계 애들의 반만 따라 해도 전부 다 좋은 데 취직할 수 있다는 둥, 입학할 때는 인문계보다 성적이 높았는데 갈수록 나태해지는 게 안타깝다는 둥, 이제 더는 머뭇거릴 시간도 없다는 둥, 선생들의 독려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2학년 교실은 공기부터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교실을 지배했다. 더구나 새로 혜란의 짝이 된 지원이라는 아이는 전형적인 공부벌레여서 화장실 같은 최소한의 용무 외에는 꼼짝 않고 앉아서 공부만 했다. 그러다 보니 혜란은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수다를 떠는 정아가 은근히 신경 쓰였다. 2학년이 되면서 정아와는 반이 갈렸는데, 그래 봤자 상업과는 1반과 2반뿐인 데다 정아가 워낙 날다람쥐처럼 돌아다니는지라 한 반인지 옆 반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쟤는 맨날 돌아다니면서 공부는 언제 한대?”

처음부터 정아를 못마땅해 하는 티가 역력했던 지원이는 결국 불만을 표시했다. 혜란은 정아 대신 사과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다시 쪼르르 달려온 정아한테 혜란은 목소리를 좀 낮추라고 눈치를 주었다. 사정을 알게 된 정아는 지원이가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럼 쉬는 시간에 떠들지 수업 시간에 떠들란 말이야?”

혜란은 깜짝 놀라 정아의 팔을 꼬집었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지원이는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뒤 정아는 더 악착같이 와서 떠들었고, 지원이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했다. 둘 사이에서 입장이 곤란해진 건 혜란이였다. 혜란은 솔직히 지원이의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성격이 좀 깐깐하기는 해도 공부밖에 모르는 지원이와 친해지면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정아랑 짝일 때는 책벌레 소리까지 들었던 혜란이 공부벌레인 지원이 옆에 있으니까 팔자 좋게 독서나 하며 펑펑 노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원이는 매주 두 권씩 꼬박꼬박 책을 대출해 읽는 혜란이가 신기하다고 했다.

“난 교과서 외의 책은 마음이 불안해서 볼 수가 없어. 그렇게 낭비한 시간은 나중에 분명히 대가를 치를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 점에서 보면 넌 참 용감하고 소신이 있는 것 같아. 공부해야 할 황금 같은 시간에 책을 본다는 게 웬만해선 쉽지 않잖아? 뭐 쓸데없이 떠들고 노는 것보다야 독서라도 하는 게 낫겠지만.”

지원이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학생의 본분과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혜란은 그런 지원이에 비해 어렵사리 복학까지 해 놓고도 공부는 뒷전인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혜란은 지난 1월 1일에 세웠던 3대 목표를 떠올렸다. 비록 겨울방학 땐 실패했지만, 새벽 운동은 꾸준히 나가고 있으니까 체중 감량은 현재 진행 중이라고 볼 수 있었다. 성격도 어떻게든 밝아지려고 애쓰는 중이니, 지금껏 등한시한 건 유일하게 공부뿐이었다. 1학년 때는 이래저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지만 2학년부터는 정말 본격적으로 관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막상 공부를 하려니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혜란은 일단 지원이가 하는 대로 따라해 보기로 했다. 그러자면 맨 먼저 책을 끊어야 했다. 혜란은 눈물을 머금고 도서관 책을 반납했다. 책이 없으니까 당장 다음 쉬는 시간부터 혜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마치 오래된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마냥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원이는 곧 있을 주산 검정 시험에 대비해 주산 연습이 한창이었다. 정아가 경험도 쌓을 겸 같이 한번 쳐 보자는 걸 혜란은 괜히 원서비만 날릴 것 같아 싫다고 했었다. 한데 책 읽던 시간만 몽땅 투자하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란은 수판과 문제집을 꺼냈다. 다른 아이들이 문제집 두세 권을 풀 동안 혜란은 한 권으로 버텼다. 새로 살 돈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끝을 보이고 있었다. 혜란은 어찌 할까 고민하다가 답만 가리고 재탕해서 쓰기로 했다. 그걸 본 지원이는 다음날 자기가 쓰던 문제집을 갖다 주었다. 앞부분만 조금 풀었을 뿐 뒷부분은 깨끗했다.

“이렇게 멀쩡한데 정말 내가 써도 돼?”

“응. 어차피 난 1급 준비 중이라 2급 문제집은 필요가 없어.”

그러니까 지원이는 주산 2급은 벌써 1학년 때 땄다는 소리였다!

혜란은 지원이를 따라 남아서 공부하기로 했다. 2학년 교실은 야간부한테 내 줘야 해서 둘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혜란은 도서관을 그토록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책을 빌릴 줄만 알았지 거기서 공부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방과 후 빽빽하게 자리를 채운 아이들이 신기하게만 보였다.

“남아서 공부한다고? 그럼 나도 남을래.”

정아는 혼자 집에 가기 싫다고 했다. 도서관 탁자는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타원형이었는데, 혜란은 졸지에 지원이와 정아 사이에 끼어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지원이는 책장 넘기는 소리에도 민감한 아이였고, 정아는 단 일분도 조용한 걸 못 참는 아이였으니 말이다. 정아는 수시로 바람 쐬러 나가자는 둥, 배고프니 뭐 사 먹으러 가자는 둥, 보채기에 바빴다. 몇 번은 정아가 원하는 대로 해 줬지만, 지원이 눈치도 보이고 군것질 할 돈도 없었기에 결국 혜란은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정아는 다음날부터 그냥 집으로 갔다. 정아의 변덕이야 새벽 운동 때 한 번 겪어 봤으니 크게 마음이 쓰이진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한데 막상 정아 없이 공부를 하려니까 도서관이 텅 비어 보이고 집중도 잘 안 되었다. 그래도 공부에 전념하려면 그런 상황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꾹 참았다. 반도 다르고 하교도 함께 하지 않으니 정아가 오지 않는 한 얼굴 보기가 힘들었지만 혜란은 먼저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정아가 오랜만에 혜란이네 교실에 나타났다. 정아는 혜란에게 곧장 오지 않고 다른 아이들과 한참 어울린 다음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에야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리곤 혜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혜란아, 선생님이 친한 친구 이름 써 내라고 해서 난 네 이름 썼다.”

사랑 고백이 그보다 달콤할 수 있을까. 혜란은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미안. 나한테 화 많이 났지?”

“실은 네가 지원이랑 남아서 공부한다고 했을 때 섭섭하긴 했어. 주산 시험도 안 친다더니 다시 친다고 한 것도 그렇고.......”

“미안.”

“괜찮아. 열심히 공부하는 게 뭐 미안할 일인가? 대신 나보다 지원이랑 더 친해지면 안 돼.”

정아는 지원이를 슬쩍 흘겨보며 말했다. 바짝 갖다 댄 정아의 입김이 혜란의 귀를 간질였다. 순간 혜란은 기분이 좀 묘했다. 그건 육십여 명의 아이들이 북적대는 교실에서 오직 정아와 자신만이 교감하는 듯한 은밀한 느낌이었다. 정아는 윙크로 마무리를 한 다음 교실을 나갔다. 혜란은 뭔가에 홀린 듯 정아가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아 덕분에 잠시 삐끗했던 둘 사이는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정아는 다시 방과 후에 남았다. 공부보다는 혜란을 기다려 준다는 의미가 더 컸다. 혜란은 정아의 그런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정아 없이 공부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에 막 익숙해지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처음보다는 정아의 공부 태도도 많이 좋아져 지원이와 크게 부딪히지는 않았다.

토요일은 주로 정아가 하자는 대로 시간을 보냈다. G대에 들르거나 이리저리 쏘다니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정아가 남자친구를 만나는 자리에 따라 나가기도 했다. 정아와 함께 놀면 재미는 있었지만 그 순간에도 공부만 하고 있을 지원이를 생각하면 혜란은 마음이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