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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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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


BY 하윤 2013-06-01

혜란은 조용히 야간부로 옮기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복학하기 전에 임 선생한테 한 번 더 확인을 거친 일이기도 했다. 그때 임 선생은 야간부 행을 위한 몇 가지 절차를 일러주었는데, 가장 관건은 오후 5시 이전에 퇴근이 가능한 일자리를 구하는 일이었다. 혜란은 직물 공장과 봉제 공장을 소개해 주었던 이웃아줌마한테 음료수 한 박스를 사 들고 가서 이번에도 도움을 청했다. 화장품 방문 판매도 하고 계주이기도 한 그 아줌마는 동네에서 마당발로 통했다. 다행히 며칠 지나지 않아 인형을 만든다는 조그마한 공장을 소개 받았다.

혜란은 방과 후에 그 아줌마가 일러준 대로 인형 공장을 찾아갔다. 걸어가기엔 좀 멀고 버스를 타기엔 차비가 아까운 거리였다. 공장은 대로에서 한참 들어간 후미진 뒷골목에 있었다. 일반 가정집의 지하실을 개조해서 만든 영세한 공장이었다. 사장이란 사람도 너무 늙고 후줄근해서 도저히 사장 같지가 않았다. 월급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혜란은 사장한테 공손하게 인사를 한 다음 용건을 말했다. 그런데 사장은 혜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일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뭔 증명서니 확인서니 내놓으라는 거야? 며칠 일하는 거 보고 되겠다 싶으면 그때 가서 떼 줄 테니 그리 알아!”

혜란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잘 안 됐다고 하자 엄마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지랄, 그깟 종이쪼가리 하나 써 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워서 안 된대?”

“.......”

“너, 똑바로 말은 잘 했냐? 병신같이 우물쭈물 하다 온 거 아니야?”

엄마는 즉시 화살을 혜란에게로 돌렸다. 혜란은 대꾸하기도 싫어 작은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일이 틀어져서 정작 미칠 것 같은 사람은 혜란 자신이었다. 그런데 위로는 못할망정 무조건 몰아세우는 엄마가 이해가 안 되었다. 하지만 엄마나 원망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다음 대책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혜란은 사면의 거대한 벽에 둘러싸인 듯 막막했다. 잠을 설쳐가면서까지 고민해도 답이 없었다.

혜란은 어쩔 수 없이 임 선생한테 매달려 보기로 했다.

“선생님, 일자릴 하나 구하긴 했는데, 며칠 일을 해야 증명서를 떼 준대요. 그래서 말인데요, 일단 야간부로 먼저 옮길 수는 없을까요?”

혜란은 수십 번도 넘게 연습한 그 말을, 교무실 앞에서 또 한 번 되뇌었다. 완벽했다.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 임 선생한테 그 말을 하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수업 끝나자마자 총알같이 달려와 놓고도 혜란은 한 시간이 넘도록 교무실 앞에서 서성이고만 있었다. 임 선생을 왜 그렇게 어려워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바보 같은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서 혜란은 큰맘 먹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 임 선생 자리는 비어 있었다. 사람도 없는데 혼자 쇼를 했다 싶으니까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혜란은 밖으로 나와 다시 임 선생을 기다렸다. 하지만 들락날락하는 선생들과 아이들 눈치가 보여 더는 길게 있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은 등교하자마자 바로 교무실로 갔다. 방과 후까지 기다릴 일이며 혹시 또 못 만나 하루를 그냥 날려 버릴 것까지 계산하니, 일단 그 일부터 해치워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막 출근해서 자리를 정돈 중이던 임 선생은 혜란을 보더니 “어, 혜란아?” 하며 활짝 웃었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왔는데도 혜란은 임 선생을 보자마자 바짝 얼어 버렸다.

“어때? 새로운 반에 적응은 잘 하고 있니?”

“네.......”

“근데 아침부터 무슨 일? 나한테 뭐 할 말 있니?”

복학 절차도 끝났고 새 담임한테 인수인계도 다 끝낸 마당에 다른 볼일이 또 뭐가 있느냐는 듯한 임 선생의 태도에 혜란은 적잖이 당황했다. 야간부 건에 대해선 까맣게 잊은 듯해서였다. 혜란은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 용건을 말했다. 임 선생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혜란의 얘기가 끝난 뒤에도 임 선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골똘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혜란은 임 선생의 그런 신중하고 차분한 면이 존경스러우면서도 두려웠다. 이윽고 임 선생은 혜란의 눈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혜란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겠어. 또 다시 예전의 상황이 되풀이될까 봐 미리 도망가고 싶어 하는 네 심정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어쩌지? 재직 증명서 없이 야간부로 먼저 옮기는 건 불가능해. 또 조건을 다 갖춰도 바로 되는 게 아니라 야간부에 빈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

“그러니 좀 힘들더라도 주간에 그냥 다니는 쪽으로 마음을 굳혀 봐. 그게 나중에 취업을 할 때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유리할 거야.”

혜란은, 선생님! 얘기가 다르잖아요? 제가 복학을 망설일 때는 학교로 돌아오기만 하면 어떤 조건이든 다 가능할 것처럼 말했잖아요? 라며 따지고 싶었지만, 가만히 임 선생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미리 도망가고 싶어 한다는 임 선생의 말에 가슴이 뜨끔했던 것이다. 그건 사실이었다. 혜란이 야간부를 간절히 원한 것은, 막상 복학은 했지만 예전에 비해 집안 형편이 나아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에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은근히 야간부로 가길 바란다는 점도 작용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이유는 앞으로 닥칠 일들로부터 미리 도망치고 싶은 자신의 마음 때문이었던 것이다.

혜란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냥 교무실을 나와야 했다. 임 선생한테 살짝 배신감을 느꼈지만 제자에게 최선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스승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복학할 때 가장 믿었던 것이 야간부였는데, 자기가 벌어 떳떳하게 학교에 다니겠다던 그 목표가 사라지고 나니 혜란은 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혜란은 복학한 지 몇 주가 지나도록 새로운 반에 적응하지 못한 채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고 있었다. 야간부로 옮겼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겠지만, 이제 싫든 좋든 그 반에 남게 된 이상 생각을 고쳐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필기 때문에라도 친구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하지만 혜란이 먼저 선을 그은 데다 짝도 없어서 딱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가 교탁 앞에 섰다. 담임은 분희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부득이 휴학을 결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분희라는 아이는 창백한 피부에 체구까지 작고 가냘픈 것이 정말로 많이 아파 보였다. 그런데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외모와 달리 분희의 목소리는 씩씩했다.

“난 꼭 건강해져서 다시 학교로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다들 나 잊어버리면 안 돼. 나보다 먼저 졸업하고 취직하는 것까지는 봐 줄게. 모두 잘 지내.......”

분희는 자청해서 노래까지 한 곡 불렀다. 반 아이들과 일일이 악수도 했다. 악수할 때 다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쩔쩔매는데 반해, 분희는 혼자 경품에 당첨돼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었다. 이방인처럼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혜란은 분희가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분희가 손을 내밀었다. 혜란은 책상 밑에 감추고 있던 손을 천천히 꺼냈다. 앙증맞은 분희의 손이 솥뚜껑 같은 혜란의 손안에 들어왔다. 분희는 혜란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상냥하고 따뜻하던지 혜란은 몸이 막 근질근질해지면서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혜란도 어떻게든 웃어 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입가의 근육은 더 굳어졌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분희 엄마가 걱정스런 얼굴로 교실을 기웃거렸다. 이제 정말로 헤어질 순간이 왔다는 생각에, 몇몇 아이들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울음은 삽시간에 교실 여기저기로 번졌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분희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영영 못 볼 것도 아닌데 왜 울어? 자주 놀러 올게. 울지 마.” 하며 우는 아이들을 달래기까지 했다. 학교에 놀러 오겠다는 말도 놀라웠지만 그게 빈말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혜란을 더 경악케 했다. 분희는 학교를 무슨 친한 친구네 집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혜란에게는 거대한 공포로만 다가오는 학교를.

담임은 모두 하교하라고 말한 뒤 분희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밖으로 나갔다. 교실은 이내 엄청난 울음바다로 변해 버렸다. 그 애랑 하등의 연관도 없는 혜란이조차 콧날이 시큰할 정도이니 다른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분위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우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분희의 중도 하차를 안타까워하는 마음만은 하나같이 진심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같은 반 친구들이 아니면 도저히 나눌 수 없는 의리와 우정이었다.

혜란은 그제야 임 선생과 작년의 반 친구들한테 자기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그때는 조용히 사라져 주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믿었는데, 분희를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혜란은 지난날의 무지와 독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변명하고도 싶었다. 분희는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파서 그만두는 거니까, 공납금을 못 내 쫓겨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혜란은 그렇게 계속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하지만 만약에 분희였다면 자신과 처지가 같았어도 지금처럼 씩씩하게 떠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은 곧, 혜란 자신이 분희처럼 아파서 떠났다 해도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는 말과 같았다. 문제는 각자의 성격이었다. 혜란은 자신의 소심한 성격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