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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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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


BY 하윤 2013-06-01

1985년 8월 26일, 혜란은 여름방학이 끝나는 날에 맞춰 엄마와 같이 학교에 갔다.

임 선생은 혜란과 엄마의 손을 번갈아 잡으며 와 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곤 혜란의 자료를 챙겨 교무 주임한테 보고하고, 서무실에 가서 공납금을 내게 하고, 새 담임을 소개해 주는 등의 복학 절차를 하나하나 도와주었다. 얼떨떨한 상태로 임 선생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혜란은 새 담임이 시간표를 건네주며 “그럼 내일 보자.” 라고 했을 때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토록 고대해 왔던 순간이 단 몇 분 만에 끝나 버린 것이었다.

혜란은 엄마와 교무실을 나왔다. 개학일이라 각 교실마다 청소가 한창이었다. 아이들이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소리가 복도까지 흘러넘쳤다. 그 소리를 들으니 학교에 다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혜란의 마음은 담담했다. 감격은커녕 또다시 시작될 전쟁이 눈앞에 아른거릴 뿐이었다.

“오늘도 날이 엄청날 모양이다, 아직 열시도 안 됐는데 벌써 이래 찌기 시작하는 걸 보면. 뭔 놈의 날씨가 수그러들 줄을 모를까? 아이고, 징글징글하다....... 그나저나 인자 돈 땜에 큰일이다. 아직 네가 붓던 적금도 석 달이나 더 넣어야 되는데. 너희 아버지는 일도 없고.......”

언덕바지를 내려오며 엄마는 이런저런 불평과 걱정을 늘어놓았다. 혜란은 아무런 대꾸 없이 듣고만 있었다. 복학 절차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오늘 같은 날 할 말이 그것밖에 없는 걸까, 딸이 복학을 했는데 축하나 격려의 말 한 마디쯤 해 주면 무슨 큰일이 벌어지나, 혜란은 무심한 엄마가 새삼 섭섭했다.

 

다음날 아침, 혜란은 일찍 눈을 떴지만 계속 버티고 누워 있었다.

째깍째깍, 시간이 흐를수록 숨통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시간을 어제 이전으로 돌리고 싶었다. 어제 학교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그랬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허탈감이 덮쳐 오더니, 급기야 저녁이 되고 밤이 깊어갈 무렵에는 그 무게와 크기가 몇 백 배로 불어나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마치 눈뜨고 가위라도 눌린 것 같은 공포였다. 혜란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끙끙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뜬눈으로 뒤척이다 아침을 맞은 것이었다. 그냥 시침 뚝 떼고 도시락 챙겨 봉제 공장으로 출근하고 싶었다. 학교에 안 갈 수만 있다면 못할 게 없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너 지금 뭐 하니, 빨리 나와서 밥 안 먹고? 첫날부터 지각할래?”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혜란은 마지못해 일어났다. 지난밤에 챙겨 둔 책가방이 낯설게 보였다. 그 가방은 입학할 때 남이 쓰던 걸 얻은 것이었는데, 책상 밑에 처박혀 있는 동안 더 낡아 있었다. 혜란은 그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괜히 동네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였다. 봉제 공장에 도시락 가방 들고 첫 출근 할 때도 눈치가 보였는데 이젠 그 반대가 된 것이다. 혜란은 재빨리 동네를 벗어났다.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에 접어들고부터는 마음이 좀 편해졌다. 학교로 가는 길은 몇 갈래가 있는데, 혜란은 G대를 지나는 등굣길을 택했다. 한발씩 내디딜 때마다 예전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특히 자퇴하던 날, 무력감에 휩싸여 걸었던 기억은 어제처럼 생생했다.

혜란은 새 담임과 함께 새 교실로 들어갔다. 담임은 작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쉬었다가 다시 복학한 학생이라고 혜란을 소개했다. 모두들 자신의 입에서 인사말 한 마디쯤이 나오길 기다리는 눈치였으나, 혜란은 모른 척 뻣뻣하게 서 있기만 했다. 잠시 틈을 주었던 담임은 비어 있는 뒷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했다. 육십여 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혜란은 겨우 자기 자리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짝도 없는 맨 뒷자리에 앉고서야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반가워. 난 정아라고 해.”

담임이 조회를 마치고 나가자마자 혜란이 앞자리의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손에 놀란 혜란은 말없이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맑은 눈에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 혜란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복학생이면 선밴데, 그래도 이젠 한 반이니까 말 놓아도 되지?”

그 애는 건방지다 싶을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혜란은 마지못해 정아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근데 왜 학교를 쉬게 된 거야?”

혜란의 손을 꽉 잡은 채 정아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혜란을 에워싼 아이들의 눈빛이 일제히 반짝거렸다. 그것이 불순하다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일 뿐이라는 게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혜란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혜란이 입을 꾹 다문 채 눈꺼풀을 내리깔자 분위기가 금방 싸해졌다. 머쓱해진 정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등을 돌렸고, 다른 아이들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음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는 아무도 혜란이 곁에 오지 않았다.

 

외톨이여서 나쁠 건 없었다.

한 가지 불편한 게 있다면 노트를 빌려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잔업 수당 받은 걸로 안경 도수를 거의 2년 만에 엄청 높였는데도, 칠판 글씨는 여전히 가물가물했다. 소정이 생각이 절로 났다. 복학하면 맨 먼저 할 일이 소정이를 만나는 것이었는데, 혜란은 며칠이 지나도록 미루고만 있었다. 소정이 교실로 가다가 발걸음을 멈춘 것만도 벌써 몇 번인지 몰랐다. 소정이가 자길 보면 반가워할지, 막상 찾아가면 귀찮아하지는 않을지, 그냥 옛날 친구로만 남아야 하는 건 아닌지 등등 쓸데없는 생각들이 자꾸만 혜란을 옭아매고 있었다.

결국 소정이가 먼저 혜란을 찾아왔다. 점심시간에 주산 연습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쳐서 쳐다보니 소정이였다. 혜란은 반갑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소정이는 “와! 우리 진짜 학교에서 다시 만났네.” 하며 활짝 웃었다. 소정이가 웃으니까 혜란도 용기가 생겨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몇 초간 서로 마주보며 실실 웃기만 했다. 그렇게 웃다 보니 신기하게도 온갖 의심과 불안은 다 사라지고, 단숨에 사이좋았던 예전의 감정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반 아이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흘깃거렸다. 소정이는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며 혜란의 손을 잡아끌었다.

소정이가 혜란을 데려간 곳은 도서관이었다. 작년에 내부 수리 중이었던 도서관은 말끔하게 새 단장이 끝나 있었다. 그동안 책에 굶주렸던 혜란은 신천지라도 발견한 기분이었다. 혜란은 소정이와 열람실 탁자에 마주보고 앉았다. 조용한 데서 둘만 있으려니 혜란은 다시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소정이는 전과 다름없이 자연스럽게 혜란을 대했다. 그러고 보니 소정이는 웃는 표정이며 명랑한 말투며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바로 와 보려고 했는데 괜히 좀 바빴어. 급수 시험도 있었고. 넌 어때? 다닐 만해?”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어.......”

소정이는 2학년 2학기가 되니 정말 발등에 불 떨어진 거 같다며 한바탕 엄살을 떨었다. 실컷 잘해 내고 있으면서도 유난을 떠는 건 소정이의 주특기였는데, 그 모습을 다시 눈앞에서 보니 반가웠다. 하지만 시간이 그냥 흐르진 않는 법, 분명히 달라진 모습도 눈에 띄었다. 예를 들면 혜란이 갓 입학했을 때 선배들한테서 느꼈던 성숙한 분위기를 소정이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자신이 정지해 있는 동안 소정이는 성큼성큼 앞서 나간 것이었다. 둘 사이의 간격이 더 벌어진 것 같아 혜란은 마음이 허전했다.

수업 예비종이 울렸다. 둘은 도서관을 나왔다. 혜란은 가장 궁금했던 정우오빠의 안부를 한 마디도 물어보지 못해 애가 바짝 탔다. 그래서 1, 2학년 교실이 갈라지는 지점에 이르기 전에 어떻게든 얘기를 꺼내 보려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도중에 소정이의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한 반은 아닌 것 같은데 서로 꽤 친해 보였다. 혜란은 소정이한테 그 친구들과 같이 가라는 손짓을 했다. 소정이는 혜란에게 살짝 손을 흔들곤 그 일행을 따라갔다. 까르르 웃고 장난치며 걸어가는 소정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예전의 고통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혜란은 소정이가 전부인데 소정이한테는 자신이 수많은 친구들 중 한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것 또한 여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