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겨울에 일을 시작한 혜란은 여름이 오기만 학수고대했는데, 봉제 공장에선 여름이 최악이라는 사실을 막상 부닥치고서야 알게 되었다. 환풍기와 마찬가지로 헐떡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역시 별 소용이 없었는데, 그마저도 재봉사들 차지여서 바닥에 퍼질러 앉아 일하는 시다들은 더운 바람 한 줄기조차 얻어 쐬기가 힘들었다. 여름이 되자 시다에게는 중요한 임무가 하나 더 주어졌다. 주전자 물이 떨어지지 않게 바로바로 채워 놓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다 시키던 재봉사들은 날이 더우니까 더 꾀가 나서 화장실 다녀오는 것도 대신 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시킬 태세였다. 가만히 앉아서 실밥만 따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여기저기서 부를 때마다 달려가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혜란은 안경과 땀으로 찰싹 달라붙은 브래지어를 벗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가장 애를 먹었다.
불쾌지수가 높아서인지 자잘한 다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났다. 어디서 목소리가 좀 높아진다 싶으면 곧바로 원색적인 욕설이 뒤따라 나왔고 때로는 물건들이 공중으로 날아다녔다. 주로 아줌마들끼리 싸우는 경우가 많았지만, 혜란이 또래의 시다에서부터 아가씨들, 재봉틀 기사, 재단사 등등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싸움은 어디서나 터졌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아줌마들끼리의 싸움이었다. 그들을 볼 때마다 혜란은 늘 엄마를 떠올렸다. 항상 불평불만과 울분에 가득 차 있고 누구든 건드리기만 해 봐라 하는 무식하고 드센 모습이 꼭 닮았기 때문이었다. 동수엄마는 일보다도 싸움 뜯어 말리고 사람들 기분 풀어 주는 일에 더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래서인지 문제도 안 일으키고 묵묵히 일만 하는 혜란을 많이 예뻐했다. 언제부턴가는 빨리 기술을 배우라는 주문도 했다. 재봉사들한테 혜란이 좀 잘 봐 주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기술은 누가 따로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각자 알아서 요령껏 배워야 했다. 그러자면 특정 재봉사 한 사람을 잘 모셔서 총애를 받아야 하는데, 아무리 잘 보여도 자신의 쉬는 시간을 쪼개 가면서까지 가르쳐 주려는 사람은 잘 없었다.
그런데 혜란이 같은 경우는 동수엄마의 한 마디에 다들 호의적으로 나왔다. 서로 가르쳐 주겠다는 바람에 난처할 정도였다. 혜란의 입장에선 곧 그만둘 건데 머리 아파 가면서까지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직 몇 주나 남았는데 먼저 그만둔다고 말하기도 그랬다. 후임을 구하려면 미리미리 말해 주는 게 맞지만 이곳의 관행은 그렇지가 못해서, 오늘 말하고 내일 그만두거나 아니면 아예 그만두고 통보만 하는 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슬쩍슬쩍 배우는 시늉만 냈는데 그게 왠지 동수엄마와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 같아 혜란은 마음이 안 편했다. 또 동수엄마가 나중에 실망할 생각을 하면 한 번씩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다 보니 잔업은 이제 혜란의 몫으로 굳어져 버렸다.
혜란은 앞으로 계속 잔업을 도맡아야 한다면 끔찍했겠지만 얼마 안 남았으니 그때까지는 선선히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잔업을 하면 수당도 나오고 저녁도 얻어먹을 수 있어 아주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저녁을 중국집에서 시켜 주는데 경리가 항상 우동만 시킨다는 점이었다. 혜란은 먹을 사람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음식을 시키는 경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잔업 하는 사람이라야 몇 명 되지도 않는데, 메뉴 좀 물어봐 주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혜란은 짜장면도 먹고 싶고 짬뽕도 먹고 싶은데, 단지 경리의 게으름 때문에 맨날 우동만 먹어야 한다는 게 억울하다 못해 나중에는 서럽기까지 했다. 혜란은 앞으로 복학을 해서 취직을 하게 된다면 절대 저런 경리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하면서 눈물의 우동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 버린 작업장은 고요하고 쓸쓸했다. 동수엄마를 비롯하여 네다섯 명 정도만 남아 일을 하다 보니 분위기가 낮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재봉틀 두세 대만 밟을 뿐인데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고 낮에는 소음에 묻혀 들리지도 않던 선풍기와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까지 시끄럽게 여겨졌다. 그럴 때면 혜란은 왠지 세상과 영영 격리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슬펐다. 동수엄마도 있고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잔업 자체가 힘들기보다는 10시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혜란은 매번 힘들었다.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대로변은 가로등도 있고 상가도 있어 괜찮았지만 등불 하나 없이 컴컴한 골목길을 통과하는 게 항상 문제였다. 골목과 마주설 때마다 혜란은 습관처럼 정우오빠를 떠올렸다. 그가 든든한 기사처럼 집까지 동행해 주었던 일은 여전히 혜란에게는 황홀한 추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이고 골목이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혜란은 골목 입구에 서서 같이 걸어 들어갈 행인을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동수엄마는 그 말을 듣더니 그게 더 위험하다고 펄쩍 뛰었다. 어떻게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건지 이해는 안 됐지만, 어쨌든 그 다음부턴 동수엄마의 말대로 혼자서 다녔다. 골목 앞에 당도하면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바로 뛰기 시작했다. 서성거리다 보면 두려움이 더 커지기 때문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뒤에서 금방이라도 뭐가 잡아당길 것 같아 혜란은 죽기 살기로 뛰었다. 집 앞에 이르러서야 겨우 가쁜 숨을 몰아쉬노라면, 심장은 꽤 오래 팔딱팔딱 뛰었고 등에선 땀이 줄줄줄 흘렀다.
대문을 살짝 밀고 집으로 들어가면 부모님은 대개 잠들어 있었다. 혜란은 부모님이 깰까 봐 최대한 소리를 죽여 가며 세수를 했다. 그때쯤이면 긴장이 사라짐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피곤이 와르르 덮쳐 왔지만 기분만은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혜란은 일기장을 펼쳐 놓고 힘든 시간을 잘 참아내고 성취한 자부심과 기쁨을 오래오래 만끽했다. 일에서 만족을 느낄 줄은 상상도 못했던 혜란에게 그것은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혜란은 봉제 공장에 다니는 동안 성실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잔업을 하는 동안 동수엄마를 재조명하게 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동수엄마는 남들 두세 배는 움직이면서도 절대 지치는 법이 없었다. 전에는 사장의 처형이고 돈을 많이 받으니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일 자체를 즐기지 않고서는 그런 에너지가 나올 수 없다는 걸 이번에야 깨달았던 것이다.
혜란은 억지로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 보았다. 그래,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즐겁게 하자. 그랬더니 확실히 시간도 잘 가고 마음이 편했다. 물론 곧 그만둔다는 심리적인 안도감도 크게 작용했을 테지만 말이다. 혜란은 노동의 가치와 고귀함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 아쉬웠다.
1985년 8월 20일, 혜란은 마지막 출근을 했다.
첫 출근 때도 그랬던 것처럼 경리는 변함없이 사무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젠 저 싸가지 경리를 안 봐도 된다 생각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 콧구멍만 한 탈의실에서 서로 부딪쳐 가며 옷을 갈아입는 것도, 이 사람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춰 주는 것도, 먼지를 반찬삼아 도시락을 까먹는 것도, 짧은 점심시간을 아쉬워하는 것도, 퇴근 시간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것도, 이젠 모두 안녕이었다.
혜란은 사람들한테 공손하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잘 가라.” “그동안 고생 많았다.” “어딜 가든지 잘 살아라.” 등등 다양한 격려의 말이 쏟아졌는데, 그 중 “공부 열심히 해 갖고 다신 이런 데 오지 마라.” 하는 소리가 가장 의미심장하게 와 닿았다.
동수엄마는 다행히 외근 중이었다.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힌 이후로 혜란은 동수엄마를 대하기가 가장 곤혹스러웠다. 자신을 전폭적으로 믿어 주고 지지해 준 동수엄마를 위해서는 일을 더 열심히 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만두게 생겼으니 미안해서 낯을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동수엄마는 흔쾌히 “딴 일도 아니고 학교로 돌아간다는데 얼마든지 보내 줘야지.” 라고 말해 주었다. 어찌나 고맙던지 복학을 취소하고 그대로 계속 동수엄마한테 충성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퇴근 도장도 찍었겠다, 이제 대문만 풀쩍 넘으면 되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미련이 혜란의 발목을 잡았다. 혜란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탈의실이 눈에 들어왔다. 시린 발을 구르며 문틈으로 손을 흔들어 주던 수연이가 거기 서 있었다. 혜란은 도망치듯 밖으로 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