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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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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퇴 후


BY 하윤 2013-05-30

5월에도 수연이는 여전히 바빴다.

6시가 되기도 전에 손을 탁탁 털고 퇴근하는 건 그렇다 쳐도, 아침 출근 때 한두 번 지각을 한다 싶더니 어느 틈에 몇 십 분 늦는 건 일상이 돼 버린 데다, 가끔 한 번씩 조퇴에 결근까지 하는 건 누가 봐도 아니다 싶었다. 저런 애를 대체 언제까지 봐 줄 거냐고, 사람들이 수군댔다. 동수엄마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조금만 더 두고 보지 뭐.......” 했다. 분위기가 어찌나 살벌한지 옆에서 지켜보는 혜란이 더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한창 사랑에 빠진 수연이한테 바른 소리 해 봤자 귀에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어느 날, 혜란이 퇴근해서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어디선가 수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란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하긴 그 시간에 수연이가 거기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며 혜란은 다시 신호등에 집중했다. 한데 또 들렸다. 아주 낮고 조심스러웠지만 분명히 수연이가 혜란을 부르고 있었다. 혜란은 그제야 샛길에 숨어서 자신에게 손짓하는 수연이를 발견했다. 회사 사람들이 있나 없나 주변을 살피며 혜란은 쪼르르 수연이한테로 달려갔다.

“너, 야학 안 갔어?”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자. 내가 맛있는 해물탕 해 줄게.”

수연이는 장바구니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혜란은 일단 수연이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안전한 장소에 이르자 혜란은 다시 물었다. 왜 야학을 안 갔는지.

“오빠가 그만두는 바람에 나도 때려치웠어. 오빠한테 영장이 나왔거든.”

그러니까 수연이는 이미 야학은 그만뒀고, 그럼에도 여전히 바빴던 건 남자 때문이었던 것이다.

“오빠 군대 가기 전에 추억을 많이 만들어 놓아야 되잖아?”

혜란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자 수연이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혜란은 당장이라도 발길을 돌리고 싶었지만 수연이의 손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방안에 드러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는 자기 집처럼 자연스럽게 혜란을 맞았다. 오랜만에 가보는 수연이의 방은 많이 변해 있었다. 베개가 두 개인 것이 특히 놀라웠다.

“둘이 같이 사는 거야?”

혜란은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해물을 다듬는 수연이한테 귓속말로 물었다.

“쉿, 주인아줌마가 알면 안 돼. 수도 요금을 두 배로 내야 되거든.”

수연이의 반응이 어찌나 당당하고 예사로운지, 그런 질문을 한 혜란이 오히려 눈치 없는 애가 돼 버렸다. ‘동거’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수연이가 이상한 건지, 그 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 꺼려하는 자신이 잘못된 건지, 혜란은 순간 헷갈렸다.

손도 까딱 안 하고 드러누워 있던 남자는 밥상이 다 차려지자 자리에서 꾸물거리며 일어났다. 국물을 한 숟갈 떠서 맛보는 남자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수연이는 남자가 맛있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수연이는 소주를 꺼내 종이컵에 따랐다. 혜란도 한 잔 받았다. 술이 들어가니까 남자는 말이 많아졌다. 수연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남자가 무슨 말만 하면 까르르 웃었다. 남자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것 같은 수연이가 가여울 지경이었다.

술이 떨어지자 남자는 수연이한테 술을 사 오라고 했다. 혜란은 자기도 이참에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더 놀다 가라고 둘이서 어찌나 세게 붙잡는지 엉겁결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수연이가 술을 사러 나간 뒤에야 혜란은 남자와 둘만 방에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 남자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집안 좋고 머리 좋고 인물 좋은 거야 이미 수연이한테 질리도록 들어왔지만, 술 때문에 눈이 살짝 풀리긴 했어도 귀공자처럼 멀끔한 남자의 외모만은 부정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수연이가 정신을 못 차릴 만도 하다 싶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남자가 혜란의 손을 덥석 잡더니 자신의 가슴팍으로 확 끌어당기는 게 아닌가. 혜란이 버둥대자 남자는 “가만있어 봐. 넌 내가 싫어? 난 처음부터 너한테 관심 있었는데.......” 라고 했다. 그 말에 혜란은 멈칫했다. 그게 정말일까, 하는 순진한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곧장 남자의 얼굴이 다가왔다. 술 냄새가 확 끼쳤다. 그제야 지금 남자가 하려는 짓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혜란은 마구 저항했다. 남자는 어떻게든 입을 맞추려고 혜란의 양팔을 꽉 잡았다. 혜란은 머리로 남자의 턱을 세게 받았다. 남자는 윽, 소리와 함께 혜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 틈에 도망치려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남자가 먼저 혜란의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씨발, 꼴에 비싸게 굴긴. 야, 나 아니면 너 같은 공순이 누가 건드려 주기나 한대?”

그 말에 혜란은 더 이상 저항할 명분을 잃어 버렸다. 정말로 자기 같은 공순이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그대로 멍청히 서 있으려니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나 진짜, 얘 완전 골 때리네. 왜 울고 지랄이야?”

남자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혜란을 놓아 주었다. 혜란은 도중에 수연이를 만날지 몰라 무작정 반대편 길로 갔다. 낯설고 캄캄한 골목을 혜란은 하염없이 걸었다. 공순이 따위.......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계속 혜란을 공격했다. 정우오빠도 혹 자신을 그렇게 보지는 않는지, 정말 불쌍해서 잘해 준 건 아닌지,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혜란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어디선가 진한 꽃향기가 밤바람에 실려 왔다. 혜란은 라일락이 활짝 핀 담장에 기대어 오래오래 울었다.

 

다음날 수연이는 혜란이 왜 말도 없이 가 버렸는지 묻지 않았다. 혜란도 그 일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초여름 기운이 완연해지면서 정원에는 넝쿨장미들이 다투어 피어났다.

혜란은 오며가며 그 장미들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졌다. 점심시간에는 일부러 꽃을 보러 나오기도 했다. 하루는 언제 왔는지 수연이가 옆에 서 있었다. 그날 이후로 수연이와는 데면데면하게 지내 왔기 때문에 그렇게 잠깐 같이 서 있는 것도 참 어색했다.

“오늘 우리 집에 갈래?”

혜란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수연이를 쳐다보았다.

“걱정 마. 그 인간은 없으니까.”

수연이의 방은 어딘지 휑했다. 남자의 물건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베개며 벽에 걸린 옷가지, 재떨이, 가방 같은 것들이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수연이는 예전처럼 전기밥솥에다 라면을 끓여 주었다. 그런데 자기는 입맛이 없다며 한 개만 끓였다. 그러고 보니 수연이는 요즘 회사에서도 거의 점심을 먹지 않았다.

“그래도 나 혼자 먹기는 좀 그렇다.”

“괜찮아. 얼른 먹어. 불겠다.”

수연이는 젓가락을 혜란이 손에 쥐어 주었다. 혜란이 라면을 먹는 동안 수연이는 물도 떠 오고 김치를 얹어 주기도 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옆에 있는 사람한테 곰살가운 건 수연이의 천성인 것 같았다. 하지만 수연이의 새삼스런 다정함이 혜란으로선 불편하고 착잡하기만 했다. 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혜란아, 나 그날 다 봤어.......”

상을 물리고 난 뒤 수연이가 조용히 말했다. 혜란은 너무 놀라 가만히 있었다.

“나 땜에 그런 일 당하게 해서 미안해. 또 지금까지 모른 척한 것도 미안해.”

“알고 있었구나.......”

“그런 새낀 줄 진작에 알고 있었어. 이기적이고, 저 혼자 잘났고, 다른 사람은 다 병신인 줄 아는 새끼야. 하지만 그걸 알았을 땐 이미 내 눈에 콩깍지가 씐 뒤였기 때문에 난 끝까지 그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었어....... 야학에 자원 봉사를 나올 정도면 그래도 근본은 착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나를 속이면서 오빠한테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빠는 더 나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어....... 그래도 난 참을 수 있었어. 오빠가 날 떠나지만 않으면 되니까. 그래서 그날 너한테 하는 짓을 보고도 그냥 덮었던 건데.......”

“근데?”

“그 새끼, 하루는 내가 일하러 간 사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거 있지. 근데 웃기는 건 내가 그 인간에 대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야. 집도 전화번호도.......”

“잘 됐네 뭐. 어차피 오래 못 갈 거라는 건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래도 난, 끝까지 잘해 보고 싶었어. 정말이지 혼자는 너무너무 싫거든.”

훌쩍거리던 수연이는 이내 펑펑 소리 내어 울었다.

“울지 마, 수연아. 그런 인간한텐 눈물도 아까워.”

“그 새끼 땜에 우는 거 아니야. 흑흑....... 혜란아, 나 어쩌면 좋아?”

“.......”

“나 임신했어.......”

“뭐?”

"입덧 땜에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먹겠어......."

수연이는 결국 바닥에 엎드린 채 대성통곡을 했다. 하지만 혜란의 귀에는 수연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 임신했어, 나 임신했어, 나 임신했어, 소리만 계속 귓가에 윙윙거렸다. 그 말은 ‘동거’라는 말을 처음 입에 올렸을 때처럼 두렵고 낯설었다. ‘남자’ ‘사랑’ ‘연애’ 같은 낱말은 한없이 달콤하고 아름다운데,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동거’나 ‘임신’은 왜 그렇게 충격적이고 무섭게 들리는 건지.

혜란은 무어라 할 말이 없어 수연이가 진정될 때까지 지켜보기만 했다. 어느 정도 울고 난 수연이는 혜란이 건네 준 물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커다란 눈망울이 붉어지고 얼굴이 해쓱해졌는데도 수연이는 그 어느 때보다 예뻐 보였다. 임신이라는 말을 들어서일까, 동갑인데도 혜란 자신은 절대 흉내 내거나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성숙한 여자의 매력이 수연이한테서 느껴졌다. 수연이는 담담하게, 병원에 갈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순간, 혜란의 머리를 스친 생각은 앞부분은 다 서론이었고 이제부터가 본론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월급은 이달 치까지 다 당겨썼어. 오빠는 학생이라 돈이 없었거든.”

지금까지의 데이트 비용을 몽땅 수연이가 부담해 왔다는 것도 기가 막혔지만, ‘그 인간’ ‘그 새끼’ 라고 했다가 다시 ‘오빠’ 라고 하는 걸 보니 혜란은 더더욱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

“너도 알다시피 나도 적금 넣고 나면 겨우 만원 남는 걸로 한 달을 사는데.......”

“적금은 한 달 건너뛰어도 되잖아?”

“우리 엄마가 다 관리하는데? 어림없어.”

“공장 사정이 어려워서 월급이 한 달 늦게 나온다고 하면 안 될까? 그 전에 내가 갚아 줄게.”

엄마한테 그런 거짓말이 통하지도 않겠지만 수연이가 그 전에 갚아 준다는 말도 별로 믿음이 안 갔다.

“그 남자한테 책임지라고 해. 학교에 가서 수소문해 보면 주소 같은 건 알 수 있을 텐데?”

수연이는 강하게 거부했다. 구질구질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온갖 눈총과 괄시를 받으면서도 사장 집에서 뻔뻔하리만치 당당하게 버텨 내던 그 수연이가 맞나 싶었다. 수연이는 그 나쁜 놈을 정말 사랑하는 걸까, 혜란은 혼란스러웠다.

“혜란아, 제발 나 좀 살려줘....... 네가 말하기 힘들면 내가 직접 너희 엄마한테 부탁드려 볼게, 응?”

수연이는 절절매듯이 혜란에게 매달렸다. 혜란은 차마 그 얼굴에다 대고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수연이의 낯빛은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리곤 혜란의 손을 부여잡고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확답을 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 기뻐하니까 혜란은 좀 당혹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