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오빠가 제대했다.
그동안 혜란은 작은오빠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큰오빠와 마찬가지로 작은오빠 역시 주로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갔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었던 것이다. 혜란은 퇴근해 와서 작은오빠와 대면하는 순간 그저 씩 웃기만 했을 뿐 전역을 축하한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못했다. 사실 축하보다는 이제 또 방을 빼앗기는구나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작은오빠 또한 혜란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다니는 것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꼭 해야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 그게 혜란이네 집의 내력이었다.
서로 멋쩍기는 네 식구가 밥상 앞에 둘러앉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아버지가 간만에 술을 안 먹은 멀쩡한 상태여서 분위기는 더 어색했다. 워낙 때리고 부수는 데만 익숙한 혜란으로선 그렇게 무탈하고 안정적인 장면은 왠지 거북했던 것이다.
작은오빠는 군에 가 있는 동안 깨달은 게 많다며 앞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 큰오빠도 제대 후 그 비슷한 말을 했었다. 식구들이 모두 합심하면 우리 집도 금방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말 역시 듣던 소리였다. 내놓았던 자식 놈이 군에 가더니 이제야 사람이 되었구나 싶은 부모님의 표정 또한 큰오빠 때도 익히 보았던 것이었다.
혜란은 밥을 오래오래 씹으며 아직 군인 정신이 살아 있는 작은오빠를 안쓰러워했다. 갓 제대했을 때의 의욕과 열정이 얼마나 빠르고 쉽게 꺾이는지, 그것 역시 혜란은 이미 큰오빠한테서 봐 버렸던 것이다. 작은오빠도 시간문제일 뿐 달라질 건 없었다. 혜란은 자기 집이 어느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구제될 집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술을 끊거나 죽지 않는 한 말이다. 따라서 작은오빠의 순수하고 당찬 포부에 냉소적인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는 건 결코 혜란의 탓이 아니었다.
작은오빠가 제대했다고 하자 수연이도 좀 실망하는 눈치였다.
수연이는 구정 때까지만 있겠다는 조건으로 사장 집에 들어간 터라 조만간 방을 비워 줘야 했다. 그런 차에 혜란이 작은방을 혼자 쓰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눈을 반짝 빛냈는데,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그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은오빠가 아니었어도 수연이랑 함께 지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설령 수연이가 내밀 쥐꼬리만 한 생활비에 혹해서 받아들인다 해도 혜란이 싫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난리가 벌어지는 집안 꼴을 수연이한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설이 지났는데도 수연이가 나갈 생각은커녕 아무런 대책도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사장과 동수엄마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수연이는 그럼 월세라도 얻어 나가겠다며 가불을 요구했다. 동수엄마는 한 달도 안 된 신참한테 가불을 해 줄 수는 없다며 일한 만큼 돈을 쳐줄 테니 그냥 나가라고 했다. 수연이를 계속 두면 이래저래 성가시겠다 싶어 아예 내보내려는 계산이었다. 수연이는 일한 거 받아 봤자 몇 푼 안 되는데 그걸로 이 엄동설한에 어딜 가라는 거냐며 맞받았다. 수연이의 야무진 대꾸에 동수엄마는 요거 보통이 아니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즉시 사장네 식구들과 동수엄마의 응징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수연이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동수엄마가 싸늘하게 대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수연이를 멀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수연이가 싹싹하다고 좋아하던 사람들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혜란이 역시 그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할 때는 수연이와 잡담도 하지 않았고 친하다는 티도 될 수 있으면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연이는 꿋꿋했다. 웃음소리만 좀 약해졌을 뿐 평소와 다름없는 수연이가 혜란의 눈에는 참 대단해 보였다. 한편 동수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너무나 태연자약한 수연이한테 약이 바짝 오를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 퇴근해 버린 빈 탈의실에서 홀로 서성이는 수연이를 보고 있노라면 진정한 약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수연이는 사장네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단 몇 분이라도 늦추고 싶어 했다. 그런 수연이가 안타까워 혜란이도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빨리 퇴근 카드에 사인하라는 경리의 독촉을 받고서야 쫓기듯 밖으로 나오곤 했다. 수연이는 시린 발을 동동거리면서 탈의실 문틈으로 혜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며칠간의 신경전 끝에 결국 손을 든 건 동수엄마였다. 경리는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수연이에게 가불 봉투를 내밀었다. 수연이는 그 돈으로 회사 근처에 이만 오천 원짜리 월세 방을 구했다. 방을 얻자마자 수연이는 혜란을 초대했다. 갈수록 으슥한 골목길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니 녹이 슬어 대문의 반쪽은 달아나 버린 집이 나왔다. 그 대문 옆에 댓돌도 없이 문간방 하나만 덜렁 붙어 있었는데 그게 수연이의 방이었다.
연탄까지는 살 돈이 안 되었던지 방은 냉골이었다. 얇은 요 하나를 깔아 놓았지만 차디찬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지는 못했다. 살림살이라곤 사장 집에서 얻어 온 이불과 전기밥솥 그리고 수연이의 옷가방이 전부였다. 수연이는 전기밥솥에다 물을 부어 라면을 끓여 주었다. 혜란은 전기밥솥이 그런 용도로도 쓰인다는 걸 처음 알았다. 뜨거운 라면을 먹고 나니 몸이 좀 풀렸다. 둘은 외투를 입은 채 이불로 몸을 둘둘 말고 얘기를 나눴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지?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테고.”
“자존심? 그딴 게 밥 먹여 주냐? 마음고생? 당장 얼어 죽을 판인데 웬 감정 타령? 난 살인 말고는 뭐든 할 수 있어. 안 그러곤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까.”
“나도 언젠간 독립해서 혼자 사는 게 목푠데, 너무 겁주지 마.”
“아서라, 멀쩡한 집 놔두고 왜 고생을 사서 하니? 내가 지금껏 떠돌면서 깨달은 게 뭔 줄 알아? 그래도 새아빠한테 얹혀살 때가 좋았다는 거, 그 빌어먹을 교장 선생 집에 있을 때가 그나마 나았다는 거.”
“그 사람들은 널 괴롭히고 이용만 했다면서, 그래도 좋다는 거야?”
“혼자보단 나으니까.”
“그런가? 난 혼자 살고 싶은데?”
“하긴 너처럼 가족이 있는데 혼자 사는 거랑 나같이 아예 혼자인 거랑은 얘기가 다르겠다. 그래도 내 앞에선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내가 더 비참해지니까. 난 밤에 자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혼자 죽을까 봐 어떨 땐 잠들기가 무서워.......”
수연이의 나직나직한 목소리는 방안의 썰렁한 기운과 함께 짐짓 숙연함마저 자아냈다. 이미 산전수전 다 겪고 인생의 어떤 비밀을 손에 쥔 것 같은 수연이에 비하면 혜란은 가출이나 꿈꾸는 철부지 애송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혜란도 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 가족도 가족 나름이다, 서로 상처만 주는 가족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하지만 아무리 개떡 같은 식구라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다는 수연이의 논리에 밀려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혜란은 문득 소정이가 생각났다. 소정이도 이렇게 할 말을 많이 참진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혜란은 소정이가 가진 모든 걸 부러워했고, 그건 은연중에 소정이한테도 전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정이는 혹시라도 혜란이 기죽고 상처받을까 봐 매사에 조심했다. 그런데도 혜란은 그 양보와 배려조차 껄끄러워했고, 일방적으로 열등감에 시달려야 하는 자신만 피해자라고 믿었다. 무조건 져 줘야 했을 소정이의 심정이나 입장은 단 한 번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동등한 인간관계는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혜란이 수연이한테 급속도로 호감을 느낀 것은 자기와 처지가 비슷하다는 동병상련 때문이었다. 더 이상 소정이 앞에서처럼 주눅 들지 않아도 돼서 기뻤던 것이다. 한데 수연이의 마음은 또 그게 아니지 않은가. 각자의 생각이나 입장은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혜란은 수연이와 너무 빨리 가까워진 건 아닌가 하는 회의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