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반도체를 필수공익사업으로 지정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149

자퇴 후


BY 하윤 2013-05-28

그즈음 새로운 시다가 한 명 들어왔다.

혜란은 신참이 들어와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 달도 못 채우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 굳이 정을 붙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은 좀 달랐다. 혜란과 동갑내기인 여자애가 들어온 것이었다. 동수엄마는 혜란에게 그 애를 맡겼다. 혜란은 처음 자기가 배웠던 대로 실밥 따기부터 가르쳐 주었다. 그 애는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민첩해서 하나를 알려 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척척 해냈다. 현장의 분위기나 일의 흐름을 모두 파악하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리는데, 그 애는 이틀 만에 초짜의 때를 완전히 벗어 버렸다.

또 어찌나 싹싹하고 붙임성이 좋은지 공장에서 성격이 제일 까다로운 재봉사 언니랑 붙여 놔도 아무 탈 없이 잘 지냈다. 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동수엄마조차 그 애의 애교에 녹아나는 걸 보면서 혜란은 위기감을 느꼈다. 동갑이라 잘해 보고 싶었던 마음이 동갑한테 질 수 없다는 심리로 변해 버렸다. 혜란은 의도적으로 그 애를 멀리했다. 그럴수록 그 애는 혜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혜란은 꿋꿋이 모른 척했다.

그런 어느 날, 그 애가 뜨거운 물 한 컵을 혜란이 앞에 내밀었다. 혜란은 점심을 먹은 뒤 뜨거운 물을 천천히 마시는 걸 좋아했다. 작업장 중앙의 난로에서 펄펄 끓고 있는 주전자까지 다녀오는 게 번거롭긴 했지만 두세 번은 갖다 먹었다. 그때도 막 물을 뜨러 일어날 참이었는데 그 애가 기다렸다는 듯 컵을 내민 것이었다.

“마셔. 너, 물 많이 먹더라?”

혜란은 말없이 물을 받았다. 그 애는 혜란이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우리 아직 정식으로 인사도 못했네? 난 수연이라고 해.”

“네 이름은 혜란이지? 가만 보니까 동수엄마는 너만 찾더라? 네가 그렇게 일을 잘 한다며? 농땡이 피울 줄도 모르고.”

“근데 넌 원래 그렇게 말이 없니? 나 가르칠 때도 그렇고, 필요한 말 외에는 진짜 안 하더라?”

수연이는 한 마디 하고 나면 일초도 못 돼서 금방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대답할 틈도 없이 떠들어 놓고선 혜란에게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섭섭하다고 했다. 혜란은 마지못해 한 마디 했다.

“말 많이 하지 마. 먼지 들어가.”

“뭐?”

“입 크게 벌리지 말라니까.”

혜란은 진심으로 말했는데, 수연이는 배를 잡고 떼굴떼굴 굴렀다. 얼마나 격하게 웃었는지 눈가의 눈물을 찍어낼 정도였다. 혜란은 수연이가 신기했다. 어쩜 저렇게 주변 사람들 눈치도 안 보고 있는 대로 깔깔댈 수 있을까. 자기가 저렇게 소리 내어 웃어 본 게 언제였던가, 기억도 안 났다. 소정이가 까르르 웃을 때도 혜란은 그저 미소만 짓곤 했다. 어쩌면 한 번도 소리 내어 웃어 본 적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한바탕 웃은 걸로 완전히 친구가 됐다고 생각한 건지 수연이는 본격적으로 자기 얘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나 참, 일단 와 보라기에 난 당연히 숙사가 있는 줄 알고 왔는데 없다지 뭐야....... 전화도 제대로 못 받는 경리 년을 뭐 하러 사무실에 앉혀 두는지 몰라. 듣자 하니 사장의 먼 친척 조카딸이라며? 그것도 빽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당장 잘 곳도 없다고 배 째라고 했더니, 동수엄마가 우선 사장 집에서 지내게 해 줬어. 너 사장 집에 안 들어가 봤지? 집 끝내주게 좋아. 빈 방도 많더라. 신세 지는 대신 설거지나 청소는 내가 하고 있어. 이래봬도 나 집안일 잘해. 전직이 가정부거든. 그 집 오빠가 치근대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학교에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주인아저씨가 교장 선생인데, 날 맡는 조건으로 학교에 보내 준다고 했거든. 나중에야 그럴 인간들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말이야. 한번은 그 오빠가 밤에 내 방엘 들어 왔는데, 하필 그걸 교장 마누라가 보고 말았지 뭐야. 아니, 잘못은 지 새끼가 했는데, 왜 내 머리를 쥐어뜯는 거냐고? 하도 억울하고 분해서 그 집에 있던 현금 다 훔쳐서 새벽에 나와 버렸어. 그래 봤자 내가 일해 준 거에 비하면 잔돈푼밖에 안 되지만 말이야. 그게 일 년 전이야. 그 뒤 식당이며 공장이며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어. 여기가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점심시간이 한 시간쯤 됐더라면 수연이는 자기가 태어난 병원의 천정 색깔까지 말했을지도 모른다. 혜란은 얼떨떨한 눈으로 수연이를 쳐다보았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그렇게 극적인 자기 얘기를 술술 털어놓는 애는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근데 참 신기하게도 수연이의 얘기가 끝났을 때, 혜란이 그 애한테 갖고 있던 경계심은 완벽하게 사라져 있었다. 수연이가 자신의 치부를 숨김없이 드러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혜란은 ‘비밀’이라는 것이 무조건 심각하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배웠다. 당사자의 마음가짐이나 태도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가벼워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혜란은 오후 내내 수연이와 붙어서 일했다. 일하면서 수다를 떤다는 것은 전에는 상상도 못해 본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둘씩 셋씩 모여 앉아 떠들어도 혜란은 입을 꾹 다물고 일만 했었다. 그런 혜란을 수연이가 순식간에 바꾸어 버린 것이었다. 수연이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우리 엄마는 열여덟 살에 나를 낳았대. 미혼모 시설에서 나온 뒤 스무 살 차이 나는 남자를 만나 내가 아홉 살 정도 될 때까지 잘 참고 살다가, 어느 날 집을 나가 버렸어. 난 울지 않았어. 언젠가는 엄마가 떠날 줄 알았거든. 새아빠나 나한테 애착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때부터 내가 밥해 먹으며 학교를 다녔어. 새아빠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을 했기 때문에 거의 나 혼자 살았다고 보면 돼. 혼자 사는 게 어찌나 무섭고 외롭던지, 새아빠가 집에 오는 날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어. 그 인간, 술 처먹으면 가끔 나한테 집적대기도 했는데 그런데도 막 기다려지지 뭐야. 근데 하루는 새아빠가 어떤 여자를 달고 오더라. 그리곤 아까 말한 그 교장 선생 집으로 나를 넘겨 버린 거야.......”

“그럼 학교는?”

“초등학교는 어찌어찌 다녔는데 중학교는 근처에도 못 가 봤지 뭐. 교장 선생이 집안일 얌전히 하고 있으면 중학교 보내 준대서 잔뜩 기대했는데, 그놈의 아들 새끼 땜에 그만 물 건너가 버렸고.”

"실은 나도 고등학교 자퇴했어."

수연이의 얘기만 듣는 게 미안해서 혜란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어, 왜?”

“왜긴, 공납금을 못 내니까 쫓겨난 거지. 부지런히 돈 모아서 올 이 학기 때 복학할 예정이야.”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고?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다니? 계속 만나면 되지.”

“그게 가능할까?”

거칠 게 없어 보이는 수연이가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게 좀 의외긴 했지만 그 심정은 혜란도 잘 알 것 같았다. 혜란 자신도 언젠가는 소정이와 멀어질 거라는 불안감에 늘 시달렸으니까. 혜란은 오래오래 수연이의 친구가 돼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그 모든 변화가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라는 게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