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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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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퇴 후


BY 하윤 2013-05-24

“이런 등신을 봤나! 그러면 십 원짜리 하나 못 받고 그대로 쫓겨났다 이 말이냐? 그 자리에 드러누워서라도 돈을 받아 갖고 기어 나와도 나와야 할 거 아니냐?”

어떤 일이건 혜란의 탓으로 몰아붙이는 엄마의 억지는 여전했다. 자다 깬 아버지는 혜란과는 눈도 안 마주치고 엄마한테만 시끄럽다고 빽 소리를 지른 뒤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아버지의 냉랭한 태도가 섭섭하긴 했지만 덕분에 혜란은 엄마의 하염없는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동안 비어 있던 작은방은 썰렁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런데 전에는 답답하고 지겹기만 했던 그 방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거의 한 달 만에 돌아온 자신을 마치 아침에 나갔던 양 무덤덤하게 맞이하는 부모님 또한 은근히 혜란을 안심시켰다. 하루아침에 망해 버린 공장처럼 느닷없이 뒤통수를 치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책상 위에 웬 선물꾸러미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너 가고 하룬가 이틀 있다가, 선생하고 반 아이들이 우르르 다녀갔다.”

엄마한테서 얘기를 전해 듣고도 혜란은 한참 동안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종이학이 가득 담긴 유리 상자, 열쇠 달린 일기장, 분홍색 앨범, 그리고 수십 통의 편지들이 부연 먼지를 뒤집어 쓴 채 혜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혜란은 선뜻 마음이 동하질 않았다. 사실 소정이 말고는 반 아이들 모두 혜란과는 데면데면한 사이였었다. 자퇴를 하지 않았다면 누구도 혜란에게 편지 따위를 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혜란이 자퇴했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는 사물에 불과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다.

이윽고 혜란은 ‘너희들이 의무적으로 편지를 써 줬으니 나도 그렇게 읽어 주겠다.’는 심보로 시큰둥하게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한 장 두 장 읽어 나가는 사이 혜란의 가슴은 저도 모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또박또박 길게 쓴 편지, 달랑 몇 줄만 쓴 편지 등 각자의 필체만큼이나 다양한 편지들이었지만 내용만은 한결같았다. 반 아이들은 모두 혜란과 좀 더 가깝게 지내지 못한 걸 아쉬워했고, 혜란의 자퇴를 안타까워했고, 꼭 다시 학교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시 돌아오라는 말에 혜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학교는 한번 떠나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다시 돌아갈 수도 있었구나! 혜란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깜깜했던 밤길에 등불을 만난 기분이었다. 혜란은 당장 ‘복학’을 최우선의 목표로 잡았다. 아침마다 도살장에라도 끌려가는 듯 몸서리를 치며 등교를 했었는데, 그런 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다니, 정말 혜란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베틀 소리를 듣는 내내 학교를 그리워한 건 사실이었다.

혜란은 맨 마지막까지 아껴 두었던 소정이의 편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소정이는 단단히 삐쳐 있었다. 어떻게 자기한테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갈 수가 있느냐며 당장 답장부터 하지 않으면 앞으로 영영 안 볼 거라고 엄포를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을 염려하는 마음이 크다는 게 느껴져서 혜란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혜란은 당장 노트를 찢어 소정이한테 답장부터 썼다.

 

12월에 접어들면서 기온은 뚝 떨어지고 밤은 더 일찍 찾아왔다.

9시 뉴스가 끝나기도 전에 부모님은 잠이 들었고, 그러면 혜란은 작은방으로 건너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은 해질 대로 해져 원래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사방 벽에서 구멍이 숭숭 뚫린 듯 새어드는 외풍을 막기 위해선 그거라도 둘둘 말아야 했다. 그렇게 해도 온 방안에 가득 찬 한기는 코가 시리고 손이 곱을 정도여서 혜란은 그야말로 머리만 쏙 내놓고 책을 읽거나 일기를 썼다. 겨울은 가난이 가장 극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도드라지는 계절이었지만, 날이 추워 일감이 뚝 끊어진 아버지가 술 먹고 행패만 안 부리면 혜란은 더 이상 아무런 불만도 욕심도 없었다.

그런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바깥에선 바람소리만 을씨년스러울 뿐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돌연 바람소리를 가르며 혜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찹쌀떡 장수의 외침이나 행인들의 발소리 같은 것에만 익숙했던 혜란의 귀에 처음 그 소리는 분간이 잘 안 되었다. 그런데 조금 시간차를 두고 다시 들려왔을 때는 분명히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혜란은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저만치 귀퉁이에 누군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어두워서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혜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려 하자 상대방은 나야, 하며 서너 걸음 앞으로 나왔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서 있는 그 사람은 바로 정우오빠였다. 혜란은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놀랐지? 들어가서 옷 좀 든든하게 입고 나와. 나랑 얘기 좀 하자.”

혜란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안으로 들어가 겉옷을 걸치고 다시 나왔다. 정우오빠가 앞장서서 걸었다. 골목길을 나와 대로를 따라 한참을 걷는 동안에도 정우오빠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혜란은 조금 얼떨떨한 걸 빼면 전혀 두렵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정우오빠와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어느새 G대 근처까지 이르고서야 정우오빠는 걸음을 멈췄다.

“춥지? 저기라도 들어갈까?”

정우오빠가 가리킨 곳은 ‘티파니’라는 간판이 붙은 지하 커피숍이었다. 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오빠가 먼저 낡은 나무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출입문에 매달려 있던 종이 뎅그렁 소리를 냈다. 마무리를 하고 있던 주인여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잠깐 커피 한 잔만 마시고 나가면 안 될까요?”

정우오빠가 예의 바르게 양해를 구하자 여자는 그러라고 했다. 혜란은 정우오빠가 권하는 자리에 엉거주춤 앉았다. 어두운 데서는 잘 모르겠다가 밝은 데서 그의 얼굴과 마주하니 새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어, 오드리 헵번이다!”

실내를 둘러보던 정우오빠가 반갑다는 듯 소리쳤다. ‘티파니’라는 이름답게 벽 곳곳에는 오드리 헵번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여기 주인도 오드리 헵번 엄청 좋아하나 보다.”

정우오빠는 혜란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 다정해서 혜란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동안 잘 지냈어?”

“네.......”

“너 학교 그만뒀다는 소식 듣고 많이 놀랐어. 바로 와 보고 싶었는데 시험 땜에 이제야 오게 됐네.”

“참, 시험은....... 잘 쳤어요?”

혜란은 그제야 대입 시험일이 이미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바보같이!

“응.”

정우오빠는 짧게 대답했다. 시험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난로마저 꺼 버렸는지 커피숍 안은 추웠고 음악도 없었다. 여자가 내 온 커피조차 금방 식어 버렸다. 혜란은 커피 잔에 살짝 흠이 난 것을 발견하고 그것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요즘 일 다닌다면서?”

“네.”

“힘들지 않니?”

힘들지 않니, 그런 말은 엄마 아버지한테서도 못 들어 본 말이었다. 혜란 역시 힘이 들고 안 들고를 따진다는 건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우오빠의 말을 듣고 보니 자퇴 전후의 그 과정들이 자신에게는 참 힘든 일이었으며, 여태 잘 견뎌 냈던 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위로나 칭찬 한 마디쯤 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정우오빠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혜란은 막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부모님이 원망스럽진 않니?”

그 또한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좋은 부모였다가 갑자기 나빠졌으면 어떨지 몰라도 워낙 처음부터 자격 미달이었기에 새삼 원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널 보면 참 배울 게 많아. 내가 안고 있는 문제 따위는 아주 하찮게 느껴지고 말이야. 뭐랄까, 웬만한 일 갖고는 징징대면 안 된다고 나무라는 것 같아서.......”

정우오빠는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혜란은 그저 얌전히 웃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혜란은 계속 몸을 떨고 있었다. 추운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 백배 천배는 더 마음이 떨려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참으면 안 돼. 힘들면 힘들다고 바로바로 털어놓는 게 좋아. 그게 하나하나 쌓이면 나중엔 감당이 안 될 테니까.”

정우오빠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혜란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다니는 독서실 주소야. 가끔 너무 힘들면 편지 써. 맛있는 거 사 줄게.”

쪽지를 받는 혜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나가자. 더 있다간 쫓겨나겠다.”

정우오빠는 카운터 쪽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는 팔짱을 낀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은 아까보다 더 거세게 불고 있었다.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추운 날씨였다. 정우오빠는 사시나무 떨듯 떠는 혜란을 보곤 옷이 좀 얇구나, 춥겠다, 라며 옷깃을 여며 주었다. 그리곤 혜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온기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이제 혜란은 추위보다 가슴이 터질 듯한 황홀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정우오빠는 그 상태로 혜란을 다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정우오빠는 혜란의 집 앞에서 돌아섰다. 혜란은 정우오빠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니 사라지고 난 뒤에도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학교를 그만둔 자기가 걱정되어 시험이 끝나자마자 달려왔다는 정우오빠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혹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정우오빠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닌가 하여 더 흥분한 건 사실이지만, 이번 일은 이성으로서의 감정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이 밤에 정우오빠가 자기 집까지 달려와 주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감동만 되씹어도 앞으로 한 십년은 거뜬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