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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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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BY 하윤 2013-05-18

하루는 뜻밖에도 소정이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개학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소정이의 생기발랄한 목소리는 혜란의 귀에 참 낯설게 들렸다. 소정이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그 제안 역시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혜란은 거절했다.

“야아, 웬만하면 나와. 우리 오빠가 보여 준대.”

“너네 오빠가?”

“오빠가 너도 영화 좋아하니까 같이 가자고 말해 보라던데, 나올 거지?”

그 말은 죽어 있던 혜란의 심장을 펄떡펄떡 뛰게 했다. 어이없게도 지난번에 뼛속까지 스며들었던 수치심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정우오빠를 한 번 더 볼 수만 있다면 그깟 쪽팔림 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혜란은 비상금을 탈탈 털어 차비를 마련한 다음 서랍장을 열었다. 서랍 한 칸에 사계절 옷이 몽땅 들어가 있는데도 공간이 남아돌 만큼 변변한 옷 하나가 없었다. 내내 같은 옷만 교복처럼 입고 학교에 다녔어도 별 생각 없었는데, 난생처음 옷 때문에 한숨이 나왔다. 고민 끝에 결국 전에 소정이네 집에 갔을 때도 입었던 하늘색 줄무늬 반팔 남방과 검정색 칠부 바지로 결정이 났다. 가능하면 정우오빠가 싫증내지 않게 다른 옷을 입고 싶었으나 나머지 옷이라야 더 형편없는 것들뿐이었다.

약속 장소는 시내 H극장 앞이었다. 정우오빠와 소정이는 벌써 와 있었다. 정우오빠는 초록색 야구 모자에 하얀 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고, 소정이는 오렌지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밝고 명랑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먼저 혜란을 발견한 정우오빠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토록 멋진 사람이 자신을 향해 다정한 웃음을 짓는다는 게 혜란으로선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소정이까지 합세해서 손을 흔들자 혜란은 왈칵 눈물이 솟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정우오빠는 빵과 팥빙수까지 사 주었다. 소정이는 그동안 밀린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혜란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방금 보고 나온 영화도 어떤 내용이었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났다. 혜란의 눈과 귀와 심장을 독차지한 사람은 오직 정우오빠뿐이었다. 정우오빠는 손수 포크에 빵을 찍어 혜란에게 권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포근한지 혜란은 또 울컥 눈가가 뜨거워졌다.

“오빠, 나한테도 좀 그렇게 잘해 보시지?”

소정이가 새침하게 말했다.

“넌 지금 팥빙수 먹고 있잖아?”

“흥, 빵도 먹을 거야.”

“알았다 알았어.”

정우오빠는 소정이한테도 빵을 건네주었다. 비록 농담이긴 하나 소정이가 자기 오빠를 독점하고 싶어 한다는 건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혜란은 묵묵히 빵만 씹었다.

잠시 후 소정이는 화장실에 갔다. 혜란은 따라 갈까 하다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정우오빠와 단둘만 남는다는 게 너무 두려우면서도 또 은근히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혜란은 제과점 유리 너머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구경했다. 아니 구경하는 척했다. 

“혜란아.”

정우오빠가 조용히 혜란을 불렀다. 혜란은 정우오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지그시 혜란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황스러웠지만 거부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정우오빠는 담담하게 말을 시작했다.

“그날, 많이 불편했지?”

순간, 혜란의 눈에선 또 눈물이 쏟아졌다.

“실은 그날 너희 동네에 사는 친구한테 갔다가 우연히 그 장면을 보게 된 거야. 경황이 없어 네 눈에 띄고 말았는데 두고두고 마음이 안 편하더라. 네가 나를 피하고 싶어 한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괜찮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상황만 다를 뿐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런 치부를 하나씩 안고 살아가잖아.......”

그토록 따뜻한 말은 지금껏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술주정뱅이의 딸’로 혜란을 대했다. 혜란은 그들의 막연한 동정이나 연민이 싫었다. 소정이의 맹목적인 친절이 부담스러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정우오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진정성이 느껴지면서도 과장되지 않아 좋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준다는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혜란은 손을 파르르 떨며 눈물을 찍어냈다.

“네가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나도 그리 사는 게 순탄하진 않아. 그러니까, 너만 힘들고 소외됐다는 생각은 하지 마.......”

정우오빠는 냅킨꽂이에서 냅킨을 몇 장 뽑아 주었다. 혜란은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소정이만 없다면 정우오빠 앞에서 눈물이 안 나올 때까지 펑펑 울고 싶었다.

정우오빠는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그는 턱에 손을 괸 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바람 쐬러 나오길 잘한 것 같아. 답답했던 마음이 좀 풀렸어. 앞으론 이런 자유를 누리기도 힘들겠지만....... 실은 오늘도 소정이랑 독서실 가는 척하고 몰래 나온 거거든.”

그러고 보니 방학이 끝나면 곧 2학기였다. 정우오빠의 대입 시험일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수에 찬 그 모습조차도 어쩜 그리 멋있는지 혜란은 애간장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저도 모르게 혜란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저기, 오빠....... 힘내세요.”

꿀 먹은 벙어리 같던 혜란이 스스로 입을 열자 정우오빠는 의외라는 듯 혜란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빙그레 웃었다.

“고맙다. 너도 힘낼 거지?”

그 말에 또 눈물이 왈칵 솟았다.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몰랐다.

소정이가 손의 물기를 털며 돌아왔다.

“야, 화장실에서 빠져 죽은 줄 알았다.”

“빠졌다가 겨우 살아온 동생한테 그러기야?”

정우오빠와 소정이는 얼굴을 맞대자 또 티격태격했다. 혜란은 그 모습을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이상하게 더는 부럽지도 샘이 나지도 않았다. 정우오빠와는 소정이가 절대 알지 못할 둘만의 교감을 나누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