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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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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BY 하윤 2013-05-17

7월 21일, 고등학교 들어와 첫 여름방학을 맞았다.

소정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떠들어댔다. 혜란은 방학이 하나도 안 반가웠다. 공납금 독촉에서 잠시 해방되는 것만 빼고는. 사방이 꽉꽉 막혀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반지하에서 여름을 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밥 때가 되어 엄마가 뭘 하나 끓이기라도 하면 온 집안은 금세 찜통이 되었다. 선풍기는 큰방 차지라 혜란은 코딱지만 한 작은방에 틀어박혀 부채 하나로 더위와 싸워야 했다.

하지만 객지에 나가 있던 큰오빠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나마 누리던 호사도 물 건너 가버렸다. 스물다섯 살인 큰오빠는 공고를 중퇴한 이후로 지금까지 밖으로만 떠돌았다. 들어가는 직장마다 일 년을 넘긴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7개월을 버티고 돌아왔다. 부모님의 표정이 시큰둥하거나 말거나 큰오빠는 작은방을 점거한 채 밤이고 낮이고 잠만 잤다. 혜란은 이 방 저 방 쫓겨 다니는 피난민 신세가 되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집 안에는 한여름과 어울리지 않게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결국 큰오빠가 돌아온 지 보름쯤 되던 날,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해가 지기도 전에 낮술이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는 들어오자마자 작은방 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엎드려서 만화책을 보던 큰오빠는 놀라지도 않고 멀뚱히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너 이놈의 새끼, 언제까지 방구들만 짊어지고 들어앉아 있을 거냐?”

큰오빠는 슬그머니 일어나 앉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냅다 방으로 뛰어 들어가 큰오빠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큰오빠도 인상이 험악해졌다.

“이거 놔요! 내가 뭐 놀고 싶어서 노는 줄 알아요?”

“어디든 한군데만 꾹 처박혀서 진드근히 일만 하라 안 했나? 고걸 못 참고 홀랑 그만두고 홀랑 그만두고 한 놈이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누군 뭐 일부러 그러냐고요? 안 맞으니까 그만두는 거지!”

“그러면 뭐 나는 적성에 맞아서 이날까지 노가다나 하러 댕기는 줄 아나? 먹고살려면 뭐든지 참고 해야 할 거 아니냐? 돈 있을 때는 낯짝도 안 보이다가 돈만 똑 떨어지면 집에 기어들어와 허구한 날 엎어져 자는 꼴 더는 못 봐 주겠다. 당장 나가라!”

“에이 씨!”

큰오빠는 아버지의 손을 홱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잽싸게 큰오빠의 뒷덜미를 낚아챘지만 장정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눈을 벌겋게 뜬 채 큰오빠를 놓친 아버지는 만만한 엄마한테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마침 저녁밥상을 들여오던 엄마도 지지 않고 맞받았다. 순식간에 밥상이 날아올라 방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엄마는 맨발로 도망쳤다. 아버지는 쓰레받기를 집어 들고 그 뒤를 쫓아갔다. 혜란은 부모님의 뒤를 따라가야 할지, 깨진 접시와 김치 국물 같은 것들로 엉망이 된 방부터 치워야 할지 헷갈려서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솔직히 그냥 집에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동네사람들한테 얼굴 팔린 거야 셀 수도 없지만 그래도 매번 창피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들고 나간 쓰레받기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게 엄마 머리에 정통으로 날아가 꽂힌다면? 뒷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혜란은 뒤축이 뭉그러진 엄마의 신발을 움켜쥐고 대문을 튀어 나가 골목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한 골목이 다 끝나가도록 보이지 않던 부모님은 하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대로에서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웅성거리며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아버지의 욕설과 엄마의 울부짖음이 새나왔다. 혜란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버지는 바닥에 쓰러진 엄마에게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기어서라도 달아나려고 하자 아버지는 산발이 된 엄마의 머리칼을 휘어잡고 마구 흔들다가 사정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사람들은 그 잔혹함에 혀를 내두를 뿐 누구 하나 말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혜란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아버지를 붙잡았다.

“뭐야? 이거 못 놔?”

아버지는 혜란을 뿌리쳤다. 혜란은 다시 아버지의 팔에 매달렸다.

“집으로 가요, 아버지. 제발 집으로 가요.......”

혜란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애원했다. 그 틈을 타 엄마는 후다닥 달아났다.

“야! 이 씨발년아, 너 거기 안 서? 잡히면 죽는다!”

혜란은 엄마를 쫓아가려는 아버지를 온몸으로 막았다. 결사적인 혜란의 제지에 아버지도 지쳤는지 어느 순간 힘을 풀었다. 혜란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를 부축해 걸음을 옮겼다. 사열하듯 사람들이 길을 내주었다. 아버지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입만 살아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입에 걸레라도 쑤셔 박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혜란은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겼다.

흥미로운 장면은 끝났다 싶었던지 구경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제 갈 길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데도 끝까지 미동도 없이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아직도 구경할 게 남았느냐는 듯 혜란은 흘깃 그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순간, 혜란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수치심으로 죽을 수도 있다면 딱 그 순간이었다. 혜란과 눈이 마주치자 당혹스런 표정이 더욱 선명해지던 그 사람은 바로 정우오빠였다.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를 정도로 혜란은 혼이 빠져 버렸다. 방바닥에 널브러져 잠시 숨을 고르던 아버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왔다.

“이 쌍년 들어오기만 해 봐라. 오늘 너 죽고 나도 죽는다.”

혜란은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긴 채 다음 상황에 대비했다. 혼자 씩씩대던 아버지는 칼을 쥔 채 대자로 뻗어 잠이 들었다. 칼을 뺏고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아 혜란은 쪼그리고 앉은 채 엄마가 오기만 기다렸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한숨 자고 난 아버지는 다시 술을 마시러 밖으로 나갔다. 그 상태에서 더 취하면 정말 끝장이므로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하지만 혜란은 아버지가 나가는 걸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싫었다.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곧장 엄마가 나타났다. 언제나처럼 골목 어딘가에 숨어 집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으리라. 엄마는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그건 몇 십번 재탕한 드라마처럼 너무나 익숙하고 지겨운 장면이었다. 혜란은 묵묵히 엄마의 손놀림을 구경만 했다. 그쯤에서 말려 줘야 되는데, 혜란이 가만히 있으니까 엄마는 더 약이 올라 유일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어디 나 없이도 한번 잘 살아 봐라!”

그건 혜란에게는 가장 무서운 협박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혜란은 엄마의 보따리를 덥석 부여잡았다.

“이거 놔라! 애비고 딸년이고 다 징글징글하다. 얼른 놓으라니까!”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혜란은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래야 엄마의 심기가 조금이라도 누그러들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렇게 빌다 보면 정말로 자기가 죽을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결국 눈물까지 쏟곤 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까 정우오빠와 맞닥뜨렸을 때 꾹꾹 눌러 참았던 감정이 봇물처럼 터진 것이었다. 그 일은 혜란이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온갖 끔찍한 일들 중 가장 최악에 속했다. 정우오빠 앞에서 발가벗다 못해 내장까지 다 드러내 보인 것 같은 수치심에 혜란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유난히 격한 혜란의 통곡 때문인지, 기운이 다한 때문인지, 결국 엄마가 먼저 보따리를 놓았다. 그 바람에 혜란은 보따리를 안고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런데도 흐느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엄마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골 아프다, 그만 닥쳐라. 누가 뒈졌냐?”

 

그 날 이후 큰오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덕분에 작은방은 다시 혜란의 차지가 되었지만, 집안 가득 드리워진 우울하고 무기력한 기운 때문에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