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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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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BY 하윤 2013-05-16

그날 이후 혜란은 오로지 기말고사만 기다렸다.

정우오빠를 공식적으로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그 기간 동안 혜란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그리움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때면 무작정 소정이네 집에 쳐들어가고도 싶었지만 꾹 참아야 했다. 소정이 아버지가 무섭기도 했고, 자신의 마음을 소정이한테 들킬까 봐 겁도 났던 것이다.

드디어 기말고사 일정이 발표되자마자 혜란은 당장 시험공부를 같이 하자고 청했다. 소정이는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사흘 연속 소정이네 집에 가서 밤 10시까지 버티어 봤음에도 정우오빠를 만날 수는 없었다.

“우리 오빠 얼굴은 이제 나도 보기 힘들어. 아침엔 나보다 일찍 나가고 저녁에 야자 끝나면 바로 독서실 가서 새벽 한 시에야 들어오니까. 주말에는 아예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하고.......”

혜란은 소정이네 집에 가기만 하면 정우오빠를 당연히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왔던 게 얼마나 순진한 착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온 세상의 빛이 다 꺼진 듯 상실감이 엄습해 왔다. 또 하루 4시간도 채 못 자면서 기계처럼 공부만 한다는 그의 근황을 듣고 나니 가슴 한 구석이 저려 왔다.

혜란은 입학한 이후 줄곧 공납금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1기분을 내고 나면 어느새 2기분 기한이 지나 있는 식이었다. 난감해하는 임 선생을 대할 때마다 혜란이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혜란은 그 기도에 이제부턴 정우오빠의 몫까지 보태기로 했다. 올 한해가 후딱 가 버려야 정우오빠의 고생도 끝이 날 테니까. 혜란은 다만 시간이 문제일 뿐 그가 S대건 어디건 한방에 척 붙으리라는 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기말고사에서 혜란이네 반이 일등을 하자 임 선생은 수박 파티를 열어 주었다.

반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수박을 먹는 동안 임 선생은 노래까지 불러 주었다. ‘험한 세상에 다리 되어’ 라는 팝송이었다. 정신없이 떠들던 아이들은 임 선생의 잔잔한 목소리에 이내 고요해졌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여름 오후였다. 혜란은 아름다운 그 순간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슬프고 아쉬웠다. 그래서 소정이를 붙잡았다.

“소정아, 우리 이거 끝나고 좀 남을까?”

“그럴까?”

뒷정리를 마치고 아이들이 하나둘 교실을 빠져나갔다. 곧 야간부 등교 시간이라 두 사람도 운동장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기세가 한풀 꺾인 태양은 텅 빈 운동장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혜란은 소정이와 뭔가 진지한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소정이는 수박 파티 때 보았던 아이들의 장기 자랑 얘기로 깔깔대기 바빴다. 이상하게 소정이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얘기만 하려 들었다. 진짜 친한 사이라면 가끔은 속 깊은 얘기도 좀 나눠야 할 것 같은데 소정이는 그런 대화 자체를 꺼렸다. 혜란이가 툭하면 교무실에 불려 가는데도 자세한 내막은 알려고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날은 혜란이 큰맘 먹고 자기 집 얘기며 고민을 툭 털어놓을 생각이었는데 도무지 그럴 기회가 생기질 않았다. 결국 소정이의 쓸데없는 수다만 듣다가 시간이 다 가 버렸다. 소정이를 버스에 태워 보내면서 혜란은 거기까지가 그들 두 사람의 한계라는 생각을 했다. 붉은 노을을 등에 지고 혜란은 터덜터덜 걸었다. 너무 허탈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