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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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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BY 하윤 2013-05-15

다음날 소정이는 일찍 등교해서 혜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혜란아, 어제는 잘 들어갔어? 저녁도 안 먹이고 그냥 보냈다고 엄마한테 한 소리 들었어. 근데 갑자기 왜 그렇게 서두른 거야? 내가 뭐 잘못했나?”

“아니야.......”

“그럼 오늘 우리 집에 한 번 더 가자. 수학은 끝내야 되잖아? 우리 오빠도 일찍 와서 도와준다는데.”

“그럴까?”

머리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혜란의 입은 딴 소리를 했다. 혜란은 자신의 본심을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심장이 터져 죽는 한이 있어도 정우오빠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소정이 방에 넓고 둥근 상을 펼쳐 놓고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정우오빠는 어떤 문제든 막힘이 없었다. 문제를 쓱 보기만 하면 술술 풀어 나가는 정우오빠도 놀라웠지만, 그걸 한 번에 알아듣는 소정이도 새삼 신기했다. 한 마디로 혜란은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수준들이었다. 설령 따라갈 실력이 됐어도 애초에 공부는 물 건너간 상태였다. 정우오빠를 다시 보는 순간 마법에 빠진 듯 혜란의 의식은 몽롱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 그의 속눈썹, 그의 여드름, 그의 손가락 등등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들이 제각각 혜란의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을 때 혜란은 또 한 번 격정에 휩싸였다. 정우오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영화 이야기는 소정이한테 듣던 것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데다 에로틱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공부할 때는 썩은 동태눈이던 혜란이 갑자기 눈을 초롱초롱 빛내니까, 정우오빠도 흥이 나는지 원래 쉬기로 했던 시간을 훌쩍 넘겨가면서까지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공통된 화제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얼마나 즐겁고 황홀한지 혜란은 처음 알았다.

정우오빠는 잠깐 자기 방으로 가더니 영화 잡지며 배우들의 브로마이드 같은 걸 잔뜩 안고 돌아왔다.

“이거 가질래? 배우들 사진 갖고 싶다며?”

혜란은 믿어지지 않아 눈만 동그랗게 떴다. 서점 유리문에 도도하게 붙어 있던 배우들의 브로마이드를 가진다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혜란은 소정이의 눈치를 살폈다. 소정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란은 잡지 세 권을 가방에 우겨넣고 브로마이드는 돌돌 말았다. 마릴린 먼로나 클라크 게이블 같은 전설적인 배우들도 좋았지만, 혜란의 입이 귀까지 걸린 까닭은 드디어 오드리 헵번의 얼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백 사진 속 오드리 헵번은 청초한 요정 같았다.

“근데 오빠, 오드리 헵번은 제일 아끼던 거잖아? 정말 주는 거야?”

“덕분에 혜란이가 웃었으니 손해 볼 건 없지 뭐.”

정우오빠의 말에 혜란은 볼이 빨개지면서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런 혜란이 신기하다는 듯 따라 웃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웃고 있던 세 사람의 얼굴은 그대로 경직돼 버렸다. 잔뜩 표정이 일그러진 소정이 아버지는 문을 열어젖힌 채 우뚝 서 있었다.

“애들 방금 저녁 먹고 잠깐 쉬는 중이에요.......”

언제 뒤따라 왔는지 소정이 엄마가 상황 설명을 했는데, 어딘지 쩔쩔매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소정이도 “아빠, 일찍 오셨네요?” 하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이미 살벌해진 분위기를 되돌릴 수 없었다. 혜란은 그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정우오빠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서 알 수 있었다.

“아빠, 내 친구 왔어요. 시험공부 하는 중이었어요. 혜란아, 인사 드려. 우리 아빠야.”

혜란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소정이 아버지에게 혜란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몇 초가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다들 침을 꼴깍 삼키며 소정이 아버지의 처분만 기다렸다. 드디어 소정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정우 너, 곧 시험이라며?”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백마디 말보다 더 무서운 한 마디였다. 정우오빠는 힘없이 네, 했다. 소정이 아버지가 내려가고 난 뒤에도 방안의 공기는 한동안 얼어붙어 있었다. 일단 자신이 그 집에서 사라져 줘야 될 것 같아 혜란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다행히 소정이 아버지는 씻는 중이어서 소정이 엄마한테만 인사를 해도 되었다. 소정이 엄마는 밤길 조심해서 가라고 했다. 살짝 긴장한 듯했지만 친절한 모습은 여전했다. 저렇게 상냥한 엄마만 있으면 아버지가 좀 엄하고 무서운들 어떠랴 싶었다. 소정이는 풀죽은 목소리로 잘 가라고만 했다. 바래다준다고 해도 물론 거절했겠지만 막상 그 말을 못 들으니 서운했다. 정우오빠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소정이네 동네는 차가 다닐 만큼 길이 널찍하고 가로등도 밝아서, 꼬불꼬불 긴 골목길에 달랑 하나 있는 가로등마저 꺼져 있기가 일쑤인 혜란이네 동네에 비하면 호사스러웠다. 혜란은 전날 정신없이 뛰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천천히 걸었다. 나오기 전에 정우오빠의 얼굴을 한 번 더 못 본 것이 아쉬웠다. 이제 다시 볼 기약이 없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그런데 문득 조용한 골목길에 자신의 발소리가 아닌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혜란이 걸음을 늦추면 그쪽도 늦추었고 빨리 하면 그쪽도 빨라졌다. 등골이 오싹해진 혜란은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큰길을 바로 눈앞에 두고 뒤쫓아 온 사람에게 어깨를 붙들리고 말았다. 너무 무서우니까 뒤를 돌아볼 수도 없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이렇게 겁이 많으면서 어제는 혼자 갈 수 있다고 큰소리 친 거야?”

뒤를 쫓아온 사람은 놀랍게도 정우오빠였다!

“가방 이리 줘. 버스 타는 데까지 바래다줄게.”

“괜찮아요.”

혜란은 책가방과 쇼핑 가방을 움켜쥐고 완강하게 거부했다.

“뭐가 괜찮아? 가방 엄청 무거울 텐데.”

정우오빠는 혜란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더니 쇼핑 가방도 달라고 했다. 혜란은 그건 가벼우니까 자기가 들겠다고 했다. 버스 정류장은 큰길로 나와 오십 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혜란은 이제 됐으니 그만 가라고 했다. 정우오빠는 버스 타는 걸 보고 가겠다고 했다. 혜란은 난감했다. 올 때는 소정이가 내 주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차비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정우오빠한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몇 대의 버스를 그냥 보낸 뒤에도 정우오빠가 갈 생각을 안 하는 바람에 혜란은 별수 없이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그래? 어쩌나, 나도 빈손으로 나와서 돈이 없는데.......”

“괜찮아요. 걸어가면 돼요. 어제도 걸어갔는데요 뭐.”

“그럼 내가 같이 가 줄게.”

“아, 아니에요.”

정우오빠는 혜란의 가방을 들고 성큼성큼 앞장섰다. 혜란은 잠시 당황했지만 속으로는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혜란이 뒤에 뚝 떨어져서 따라가니까 정우오빠는 걸음을 멈추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상큼한 오월의 밤거리를 정우오빠와 나란히 걷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혜란이 넌 꿈이 뭐니?”

“꿈이요?”

“그래. 네가 잘하는 거라든가 앞으로 하고 싶은 거라든가.”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하긴 해요. 어릴 때부터 쭉 그려 왔거든요.”

“그럼 만화가 하면 되겠네?”

혜란은 그냥 웃기만 했다.

“오빠는요?”

“나? 난 내 꿈이 없어. 아버지 꿈만 있지.”

정우오빠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서 더 아프게 들렸다.

“넌 소정이랑 성격이 많이 다른 것 같아.”

“나도 내 성격이 너무 싫어요.”

“어,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닌데? 아직 철부지 같은 소정이에 비해 넌 신중하고 차분해서 보기 좋다는 뜻인데.”

정우오빠의 솔직하고 따뜻한 화술 덕분에 혜란은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렸다. 그래서 집에 도착할 때쯤에는 스스럼없이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혜란은 자기 집이 지구 반대편쯤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어, 이 동네야? 내 친구도 이 근처에 사는데.”

정우오빠는 혜란의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혜란은 펄쩍 뛰었다. 절대, 죽어도, 안 될 일이었다. 주인집 옆에 개집처럼 붙어 있는 자기 집을 보여 주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혜란이 완강하게 거부하자 정우오빠는 할 수 없다는 듯 가방을 돌려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혜란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간혹 남의 집 창에서 새나오는 희미한 불빛 말고는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는 깜깜한 길이었다. 발밑에 뭐가 있는지도 모를 만큼 새까만 어둠이라 보폭을 최대한 짧게 하여 조심조심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느닷없이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혜란은 너무 놀라 피가 거꾸로 솟는 줄 알았다.

“이렇게 어두운데 혼자 갈 수 있다고?”

정우오빠였다. 그는 걱정이 돼서 뒤따라 와 봤다고 했다. 혜란은 초라한 자신의 집을 들킬 일이 걱정이면서도 정우오빠를 다시 만난 게 뛸 듯이 반가웠다. 정우오빠와 어깨가 닿을 듯 나란히 골목길을 걷고 있으려니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던 그 길이 세상에서 가장 친근하게 느껴졌다. 정우오빠는 혜란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돌아섰다.

다행히 큰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혜란은 살금살금 작은방으로 들어가 한참 동안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좀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전부 꿈만 같았다. 아무리 되새김질을 해도 현실 같지가 않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우오빠한테서 얻어 온 선물들을 보면 그건 꿈이 아니었다. 혜란은 가슴이 너무 벌렁거려서 쉬이 잠들 수가 없었다.

 

다음날, 모처럼 혜란의 얼굴이 환해진 것과 달리 소정이의 표정은 어두웠다.

“너 가고 나서 한바탕 더 난리가 났었어. 오빠가 말도 없이 나가선 한 시간이나 지나서 들어온 거야. 금방 야단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셨어.”

“어딜 갔다 왔는지 말 안 했어?”

“그냥 답답해서 바람 쐬고 왔대.”

혜란의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정우오빠가 왜 소정이한테 사실대로 얘길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만의 비밀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