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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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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BY 하윤 2013-05-14

 

5월 중간고사가 다가왔다.

소정이는 수학이나 화학, 부기 같은 과목에 강해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아이들의 질문을 받느라 정신없었다. 제 공부 시간을 다 뺏기는데도 소정이는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시험이 코앞에 닥치자 소정이는 혜란에게 자기 집으로 가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그때까지 혜란은 방과 후에 다른 데로 새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소정이네 집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러기로 했다. 버스비는 소정이가 내 주었다. 가다 보니 혜란이네 동네와 세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혜란은 돌아올 때는 걸어서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걷다 보니 조용하고 반듯반듯한 주택가가 나왔다. 꼬불꼬불한 골목에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혜란이네 동네와는 차원이 달랐다. 소정이네 집은 붉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이층 양옥이었다. 화초들이 잘 가꾸어진 마당에는 야외용 탁자와 의자까지 놓여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니 소정이 엄마가 웃으며 맞아 주었다. 딸기가 수놓인 앞치마 차림의 소정이 엄마는 얼른 부엌으로 돌아갔다. 커튼과 소파가 베이지색으로 통일된 거실은 아늑하고 깔끔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사는 소정이네 집에 대한 놀라움은 이층에 있는 소정이 방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문을 열면 바로 눈에 들어오는 넓은 창에는 핑크색 레이스 커튼이 살랑거렸고, 왼쪽 벽으로는 책장이 붙어 있는 책상과 옷장이, 오른쪽 벽으로는 침대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잡지 속 가구 광고의 한 장면 같았다. 혜란은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한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안 들어가고 뭐해?”

쟁반을 들고 곧 뒤따라온 소정이가 말했다. 쟁반에는 설탕을 듬뿍 뿌린 도넛과 우유와 오렌지 주스가 놓여 있었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우유랑 주스 둘 다 가져와 봤어.”

책상은 두 사람이 써도 될 만큼 널찍했고 보조 의자도 따로 있었다.

“이건 가끔 오빠랑 공부할 때 쓰는 거야.”

소정이는 보조 의자에 앉으며 혜란에게는 푹신한 의자를 권했다.

“너네 집 정말 잘 사는구나.......”

혜란은 입에서 살살 녹는 도넛을 먹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가?”

소정이는 살짝 웃었다. 전혀 뽐내는 티가 안 나는 그 여유로움이 지독하게 부러웠다.

“이 정도 환경이면 너도 충분히 대학에 갈 수 있잖아?”

“돈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 때문에 안 돼. 여자는 많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내가 인문계 보내 달라고 얼마나 울고불고 난리를 쳤는데....... 그래도 소용없었어. 아버지는 무조건 오빠밖에 몰라.”

소정이는 기다렸다는 듯 불만을 쏟아냈다. 혜란은 소정이가 유일하게 흥분하는 대학 얘기를 꺼낸 것이 미안해 입을 다물었다.

간식을 다 먹은 뒤 바로 공부를 시작했다. 소정이는 혜란이가 못 풀고 표시해 둔 부기 문제들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막막하기만 하던 문제들이 소정이의 손끝에서 척척 해결되는 걸 보니 신기하기만 했다.

“그나저나 나 땜에 네 공부를 못해서 어떡하니?”

“괜찮아. 네 거 하다 보면 자연스레 복습이 되니까.”

부기를 다 하고 수학으로 넘어가려 할 때 소정이 엄마가 소정이를 불렀다. 아래층에 내려갔다 온 소정이는 엄마 심부름을 다녀올 테니 잠시 쉬고 있으라고 했다.

“같이 갈까?”

“아니야. 두부만 사 갖고 금방 올 건데 뭐.”

혜란은 소정이 방을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책장에는 세계명작전집, 한국문학전집 등 주로 전집류들이 많았다. 그 많은 책들을 제 방에다 모셔 놓고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는 소정이가 부러웠다. 벽에는 단란해 보이는 소정이네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혜란은 그 사진을 보며 어쩜 이렇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엄마는 엄마답게 오빠는 오빠답게 생겼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소정이 오빠는 부드러운 머릿결이며 반듯한 이목구비가 마치 순정만화 속 주인공 같았다.

그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혜란은 “야, 니네 오빠 정말 잘 생겼다!”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데 소정이가 아니었다. 문 앞에는 사진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 소정이 오빠가 서 있었다. 혜란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인생에는 몇 번의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던가, 그때가 바로 그런 순간임을 혜란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 미안, 소정이 친구?”

그는 혜란이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혜란의 심장도 한 줌씩 졸아들었다. 그는 책상 위에 펼쳐 놓은 교과서와 문제집을 보고는 “아하, 시험공부 하러 왔구나?” 했다. 혜란이 대꾸는커녕 꼼짝도 하지 않자 그는 이상하다는 듯 혜란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데도 혜란은 너무 놀라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왼쪽 뺨에 나 있는 여드름 몇 개에 혜란의 마음은 한없이 설레고 쿵쾅거렸다.

그때 소정이가 나타났다.

“오빠! 오늘 야자 안 했어?”

“응. 일찍 끝났어.”

소정이는 제 오빠에게 혜란을 소개했다. 그의 이름은 한 정우였다.

“잘됐다, 오빠 우리 수학 좀 봐 줘. 헷갈리는 문제가 많아서.”

“그럴까?”

순간 혜란의 입에선 안 돼, 하는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왔다. 두 사람이 동시에 혜란을 쳐다보았다. 혜란은 너무 늦어서 그만 가야겠다고 했다.

“왜? 좀 더 하고 가.”

“아니야. 집에서 걱정할 거 같아.”

“전화하면 되잖아?”

혜란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정우오빠랑 같이 공부하다가는 자신의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진짜 이유를 말할 수도 없었다. 혜란이 곤란해 하자 소정이는 그럼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다.

“아니야. 집에 가서 먹을게.”

소정이가 버스 타는 데까지 바래다준다는 걸 뿌리치고, 소정이 엄마한테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도망치듯 그 집에서 나오자마자 혜란은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도 선뜻 속도를 줄일 수가 없었다. 뒤에서 뭔가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서야 혜란은 걸음을 멈추었다. 숨을 있는 대로 몰아쉬며 혜란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뭔가가 뒤를 따라오는 듯한 느낌은 여전했다. 집에 도착하고서야 혜란은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건 혜란이 허둥지둥 가방을 쌀 때 의아해 하던 정우오빠의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