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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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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유 선해


BY 데미안 2013-03-15

1997. 5. 15.

 언제든가...

고등학교 사춘기를 겪으면서, 그리고 사춘기를 끝내면서 함께 묻었던 일기...

그 일기라는 걸 얼마만에 써 보는지.

새롭네...쑥스럽기도 하네...

다시 펜을 들고 노트라는 걸 펼쳐서 하얀  백지 위에 글자를 만들어 간다는 게...

우습다. 왜 이리 신기하게 느껴지는지. 마치 처음 글자를 배우는 아이처럼 설렌다.

어느새 세월이 이리도 흘렀단 말이지. 세월이 유수라더니...

내 나이 오십을 코앞에 두고 있지 않는가. 그동안 난 무얼 했을까?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이리도 살아 왔을까...

내 곁에 있는 건 무어며 무얼 위해 살았을까....

나란 존재...김 정숙이라는 내 이름 석자... 잊고 살았네.

정숙아...정숙아...왜이리 낯설까...왜이리 간지러울까...

정숙아! 하는 소리보다 선해야! 하는 소리에 나는 뒤돌아본다.

선해 엄마... 선해야...

어느날부턴가 아는 이들 모두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더라. 나 또한 익숙한 듯 당연한 듯 그 소리에 반응하고...

급 우울이 몰려온다.

하루 아침에 이렇듯 갑자기 내가 내 존재를 알아 버렸다.

누구 아내, 누구 엄마가 아닌 김 정숙이라는 여자라는 걸 나는 오늘 깨달았다.

어디에서?...

딸아이 봄 옷이나 한 벌 장만해줄까 해서 백화점에 갔더랬지.

그곳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김. 정. 숙?

생소한 그 이름이 내 이름인줄 몰랐지. 참 어처구니없지...

한참이나 후에 그 이름이 내 이름이구나 싶어 돌아보았지.

강 현세!

현세 오빠...현세 선배... 현세씨...!

그 순간 난 내가 정숙이라는 한 여자로 돌아가는 걸 느꼈다.

부인을 위해 고른 색깔 좋은 스카프를 손에 든 채 강 현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어쩌면...어쩌면 그리 말끔한 그 성격답게 곱게도 나이 들었는지...

나는 다시 스무살 시절의 정숙이 되어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1.

보름을 쉬었다.

선해는 규모가 꽤 큰 해오름 출판사에서 근무한다.

대학 졸업하고 영문과 전공을 살려 1년정도 번역을 하면서 프리랜서로 지냈다. 짬짬이 통역일도 하고...

수입도 제법 쏠쏠했고 시간도 많고 해서 그 일을 하면서 대학 때 가지 못했던 곳들을 찾아 여행도 즐겼다.

그렇게 프리한 생활을 즐기던 중 학교 선배의 추천으로 지금의 출판사에 오게 된 것이다.

번잡한 도시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곳에 위치한 해오름 출판사는 여느 직장처럼 따분하거나 딱딱하지 않아 좋았다.

그곳에서 선해는 교정과 번역일을 한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게 좀...스트레스이기는 하지만.

 

선해의 자리는 햇살이 따스하게 스며드는 창가였다.

눈을 돌리면 비가 오는지...눈이 오는지...바람이 부는지...낙엽이 날리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좋았다.

선해의 눈이 너른 정원에 둘러져 있는 장미에 가 꽂혔다.

벌써 장미가 피었다. 도도하게  빨간 입술을 드밀며 그 향으로 유혹이나 하듯이 장미 한 송이가 유달리 빨갛다.

그 창가에 책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가 놓여져 있는 책상 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영어판 책과 원고지...

그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그 분위기와는 이질적인 세권의 분홍 일기장.

엄마의 일기였다. 출근을 하면서 들고온 그 일기장을 선해는 아직 펼쳐 보지 못하고 있었다.

차마...차마 펼치기가 두려운걸까...

펼치면 안될 것 같은 강한 거부감도 들었다. 두려움이 주는 거부감일 것이다.

하여튼 선해는 그 일기장을 앞에 두고 꼼짝하지 않았다.

일기장 표지는 고급스러웠다. 동네 문구점에서 산 게 아닌듯 했다.

김 여사의 성격이 보인다. 뭘 하나 사더라도 언제나 실용적이고  그만큼  또 최고여야 하고 보기도 좋아야 하는...

김 여사는 과일을 고를때도 비록, 한 개를 먹는 한이 있어도 품질이 최상인 것을 선택했다.

아마 일기장 하나 고르는데도 심사숙고해서 골랐을 김여사일 것이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또 다시금 눈물이 삐죽이 고개를 드민다.

그립다...진짜 그립다. 밉다...진짜 김여사가 밉다.

바늘 하나가 가슴 중앙에 박혀 수시로 그녀를 찔러대고 있었다. 욱씬거린다.

그리움보다 지금은 김여사가 더 많이 미운 선해였다. 홀로 남겨 두고 간 김여사의 그 선택이 밉다...

이해도 되지 않는다. 왜...왜 그래야만 했을까? 무엇이 김여사를 벼랑으로 몰았을까?

단지...단지...우울증때문에?  그렇다면 그 우울증의 원인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외로웠을까...

그렇게 입버릇하던 사랑하는 내 딸... 사랑하는 내 딸이 곁에 있어도 외로웠을까?

활동적인 김여사는 아니더라도 늘 웃음을 웃을 줄 아는 김여사였다.

그렇게 쉬이 생을 놓을 김여사는 아니였는데...

눈물 한 방울이 일기장 표지위로 떨어졌다. 황급히 손으로 눈가를 닦으면서 선해는 생각했다.

일기...어쩌면 엄마의 일기속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선뜻  손조차 댈 수 없는 건 왜일까... 두렵나?  왜? 무엇이?

김여사는 이 속에 무엇을 숨겨두고 있었을까...

무엇이 김여사를 그리 힘들게 했을까...

 

2.

[유 선해]

저 홀로 생각 속에 잠겨 있느라 선해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가 자신의 앞에 서서 이름을 부를때까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일기장만 죽일듯 노려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해오름 출판사 편집장이자 사장, 백 동하.

그리고 유명 작가이기도 하면서 몇 달전부터 유 선해의 애인이 된 남자.

고개를 꺾은 채 선해는 멍한, 촛점이 없는 눈으로 자신의  까칠한 연인을 올려다 보았다.

백 동하가 그런 선해를 보며 사납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 자식이...!

정신이 딴 곳에 가 있지 않은가!

자신을 볼 땐 언제나 그 눈속에 반짝이는 별 하나를 띄우고 입가에는 수줍은 듯 달짝한 미소를 피우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게 몽땅 사라지고 그 자리엔 공허만이 남았다.

[유 선해!]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 동하가 힘을 실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서야 물기 어린 두 눈을 깜빡이던 선해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서야 눈 앞의 남자를 눈 속에 담았다.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동하는 키가 컸다. 고등학교때 이미 185를 훌쩍 넘더니 군대를 제대할 무렵에는 190을 넘었다. 그리고 덩치가 보통 사람들보다 더 우람했다. 처음 면접에서 동하를 보았을 때 선해는 그가 주는 위압감에 지레 눌려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었다. 그 모습에 못마땅한 듯 동하는 인상을 구겼고...

그때처럼 동하가 그 표정을 하며 선해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잊고 있는 제 여자의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백 번 이해를 한다... 지금은 백 번 그 속을 헤아리고도 남는다. 허나...!

동하는 긴 한숨을 토해내면서, 선해의 찰랑거리는 단발 머리 속으로 손을 넣었다.

[다른 곳 헤매지 마라. 내 앞에선 나만 봐.  날 보면서 웃고...날 보면서 울어. 다 받아줄테니  날 이용하라구. 어디, 영혼이라도 저당 잡힌 듯 그렇게 넋 놓고 있는 거, 보고 싶지 않다. 알아 들어, 유 선해?]

[네에...네에, 편집장님]

선해는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놈의 편집장 소린...!]

하면서 동하는 선해를 끌어다 자신의 가슴으로 품었다.

선해는 그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가슴은 언제나 따스했던 걸로 안다. 남자의 가슴이 그다지도 넓고 따스한다는 걸 선해는 동하의 가슴에서 처음 알았다. 자신의 아버지조차 자신을 그렇게 안아 준 기억은 없었다.

방향을 잃고 헤매던 생각들을 하나 하나 모으면서 선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 남자의 품은 왜 이다지도 편안한걸까...

김여사 장례식장에 조문왔을 때, 선해는 표정없는 동하가 자신을 깊은 눈으로 가만히 응시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돌아갈 때는 누구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힘있게 한번 움켜 쥐었다 놓아 주기도 했었다.

 

동하의 큼직한 손이 작고 얇은 선해의 허리를 휘어 감았고 남은 다른 손은 그 매끄러운 머리를 쓸었다. 선해가 보지 못하지만 그의 입가에 미소가 쓰렸다.  안쓰럽기만 한 자신의 작은 연인을 되찾은 데서 오는 안도감이었다.

언듯, 동하의 눈에 선해의 책상 위에 나란히 놓여져 있는 분홍 일기장에 가 꽂혔다.

[너의 정신을 안드로메다에서 허우적대게 만든 저거, 뭐냐?]

동하의 말에 눈을 감고 그의 따스함을 만끽하던  선해가 몸을 굳히며 살며시 고개를 틀었다.

[보아하니 일기장 같은데... 네 건가?]

선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내리면서 그가 다시 물었다. 선해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엄마의 일기장이예요]

[...그런데?]

[서랍...깊숙이 숨겨져 있었는데......]

선해의 말이 자꾸만 속으로 숨어 들었다.

[아직 읽지 않았군. 들고 나왔다는 건 읽어 볼 마음이 있다는 소리고...... 두려운건가?]

선해의 망설임을 정확히 읽은 동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적고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엄마였어요. 그래서 가계부도 쓰지 않는데... 그런 엄마가 일기를 썼어요.  세권이나 되는... 그 속에 무엇이 있을지...겁나요, 편집장님. 그러나 보고 싶어요. 그래서 더 두려운지도 모르겠어요]

동하는 손가락으로 선해의 턱을 들어 올렸다. 선해는 날카롭게 빛나는 동하의 눈을 마주 보았다.

[덮어 두고 싶다면 지금 바로 태워 버려라. 그러나 그게 아니면...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다면...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마음을 알고 싶다면 그 두려움을 버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두려움과 직접 대면하는 방법밖에 없다. 비록, 그래서 상처 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야. 상처야 치유하면 되지만 두려움은 극복만이 해결책이다. 선택해]

지극히 현실적이고 동하다운 말이었다.

[그리고 빨리 나의 유 선해로 돌아와라. 외롭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무덤덤하게 내뱉는 동하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해의 입술에 닿는 동하의 입술은 뜨겁고 강렬하고 ...그녀를 목말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