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이런 행동을 한적이 없는 재범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난 당황스러웠다.
한편으로 생각하니 은근히 화가 치민다.
제가 나에게 무엇이길래. 내가 어디에 있든지 관여한다는 말인가.
“왜그래! 내가 어디 있는지 말해야 돼”
잠시 폰 속의 침묵이 흘렀다.
“어디인지 알고 있어요. 제가 모를줄 알고 그러세요”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까......
“제가 그리로 갈까요!!”
협박조다
참 어이가 없다.
“아니, 내가 있는곳을 어떻게 알지?”
“알면 안돼요.....”
“아니.....알면 안된다니.......내가 뭐 죄라도 지었단말야?”
“그럼, 아니란 말이세요.....”
뭔가 뒤틀린게 분명하다.
동욱을 떠나보낸 허무감 탓에 충동과 허전함을 다독이지 못하고
남편과 환상추억을 잠시 반추하고 싶어 호텔방을 찾았을뿐인데......
“누구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정말 실망입니다 ”
난 목소리를 낮추어 무언가 오해한 것같은 그에게 말했다.
“내일, 얘기해. 밤이니까.......”
순간의 침묵속으로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러실 수는 없어요. 정말 누님, 이러실 수 없어요....”
울먹이는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내가 취할 요량은 무엇.....?
“저어....뭔가 오해한거 같은데......내일 얘기하자구 응 ....알았지....?”
난 재범이를 달랬다.
“나, 혼자 있어. 나 있는데를 안다니까 말인데..나 정말 혼자 있으니까 오해하지마.....”
“정말이죠?”
“그래, 다음에 얘기할게.....나도 복잡하거든.....”
“정말이시죠? 믿어도 돼죠?”
뭘 다짐하는것인가?
그런 것 같다. 내가 호텔에 들어온 것을 보았거나 아니면 오늘 자신의 사무실에서 별로 좋지 않은 표정으로 나왔으니까 다른 맘을 먹은줄 알고 넘겨잡거나.......
“내일, 사무실로 갈게....”
난 전화를 끊었다.
재범의 목소리로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재범이의 희망은 무엇일까?
더러는 총각과 유부녀가 좋아하는 연속극을 은근히 부러워 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재범의 사무실에서 만난 혜란이를 보면서 그동안 가슴 한켠에 숨겨 두었던 재범에 대한 기대는 욕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설혹 재범이가 나를 원한다해도 그건 안될일이라는걸.....
<가야지.....>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난 거울을 본다. 사랑의 욕구를 채운 여자처럼 난 화장을 고친다. 얼굴의 주름이 안쓰럽다.
<여자나이 마흔두살.....그냥....지나갈것인가.....아니면 또다른 사랑의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을까? 열녀문을 세우는 시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느 노래의 말처럼 아무나하고 사랑을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저런 상념속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내가 측은해 진다.
임자(?) 없는 여자의 외로움 아니면 서러움.....
갑자기 내 몸이 궁금해진다. 내 가슴을 더듬어 본다. 볼을 만져본다.
아직 전과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딸 애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1번~>
사랑하는 딸 여진이는 내 폰속의 1번이듯이 지금 내 인생에는 1번이다. 그러나 남편의 이름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수많은 밤들속에서 인생의 새로운 1번을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숨길 수는 없다.
<엄마....아빠 보고싶지?>
그렇게 말하는 여진이의 얼굴에는 어쩌면 다른 남자를 만나면 안된다는 묵시적 압력이 스며 있었다
“너만 생각할게.....왜.....불안해?”
“아니.....나 조금 더 크면 좋은 사람 만나서 가면 되지 뭐^^”
그 말이 왜 그리 좋았던가. 속으로는 좋아 했지만 난
“엄마는 너하고 살거야....너도 엄마만 사랑해야돼?”
그러나 딸애는 내말에 아무 대답이 없다. 엄마랑 같이 산다는 고백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어린것의 가슴에도 엄마랑 평생을 같이살 생각이 있으랴만.....헛말이라도 하지 않는 여진이
가슴이 허전하다. 이도 저도 아닌 내 앞길은 뭐란말인가
10분쯤 후에 딸에게 전화가 온다. 찍힌 번호를 이제야 보았나보다
“엄마, 어디야?”
“응, 친구네.....몇시에 올래?”
난 룸을 나섰다. 그리고 열쇠를 반납하고 정말 어이없게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키를 꽂는다.
<아마도 내가 이상해졌나봐....>
친절한 안내 화살표를 따라 큰길로 차를 몬다.
거리는 집으로 가기 싫거나 불을 다 태우지 못한 사람들이 비틀댄다. 특히 용전동 터미널 부근은 성매매업소단속으로 장사를 못하는 유천동의 술집 아가씨들이 다 옮겨 왔다던데......
<화냥년이 좋을지도 모르지>
갑자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걸까?
봄기운 탓인가?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박재란이라는 가수는 그렇게 봄을 노래 했었다
봄이 되면 여자는 민감해지나보다.
누구의 말처럼 말초혈관이 확장되고 피의 흐름이 활발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몸을 다독거려 보아도 스멀스멀 몸 속을 흘러다니는 봄기운을 떨쳐버릴 수 없고
어느 계절보다 배꼽 아래로 밀려오는 그리움같은걸 부인할 수 없어 그리 노래했겠지....호호
나의 여친들 가운데 유독 봄을 많이 타는 애는 타는 영애다.
봄만 되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고를 저지르곤 했었다.
걔 말에 의하면 봄에는 멜라토닌 호르몬 분비가 많아 기분이 들뜨게 되는데 이 기운에 여자들이 아주 민감하다던가.......
<알마큼 알고 즐길줄 아는 나이에 맥이 끊겨버렸으니 오호통제라 불쌍타!>
나를 놀려대던 영애의 익살이 그저 웃어넘길 수 만 없었던 나의 깊은 진실
중세 아름다운 물위의 베니스
이렇듯 뜨거움을 탐닉하는 봄날의 탈선을 정당화시키고자
며칠 밤 동안 계속되는 축제가 열렸다지....
얼굴을 알아 보지 못하도록 가면을 쓰고 화장을 짙게한 한 남녀가 억제할 수 없는 정욕을 불태웠던 사육제
<인생, 고무신 위에 오줌떨어지면 허사라고...남자들 오줌줄기 따라 여자의 행복도 비례한다...>
즐겨야 하는 남과 녀가 오늘도 거리에 죽음보다 더 진한 향락을 구하고 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돈도 벌고 더러는 망가지기도 하고......그렇다면 나는........
봄에는 올 봄에는 아무래도 사고(?)를 칠것같아^^
난 세차게 엑셀을 밟았다.
그런데 뒤에서 따라오는 차기운을 알아차린 것은 중리사거리를 지나서부터였다.
“누구지?”
뒤따르는 차를 확인하려 난 룸미러에 얼굴을 바짝 들여대고 있었다. 재범이 차는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