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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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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달다 1


BY 문해빈 2012-10-26

 

 

 

‘박영우, 당신은 안 돼. 저 여자는 내 여자다. 예전의 단 한 번 실수로 놓쳐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여자...... 곧 찾을 거야. 짝사랑! 짝사랑은 나도 원하지 않아. 내 사전에 그런 단어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석민도 하란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현관문에 손을 올렸다. 그녀를 도우면서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돌아 올 것이다. 자신에게로. 이석민이란 남자의 품으로.

그런 생각들이 가슴을 채워오자 하늘이 보였다. 어둠속의 하늘이었지만 마당에 커져 있는 불빛들과 여름밤의 특색 때문인지 모르지만 밤하늘도 어둡지만은 않았다. 도시를 벗어난 이곳은 하늘도 달랐다. 별들이 수를 놓고 있는 것인지 반짝거림들이 보였으며 마치 이 집과 가장 가까이 맞닿은 거리임을 느끼게 했다.

 

 

 

“예쁘네. 멋지네.”

 

 

이런 하늘도 있다는 것이 오히려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는 두 사람 때문에 더 많은 술을 마셨는지 모른다. 도대체가 감정조절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늘 함께 있는 그들이었다. 달리 말한다면, 더 정확히 말한다면 박 감독이 연수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연수는 그녀의 성격대로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늘 연수를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을 챙겨주는 사람은 영우였다. 갈비도, 술도, 차도, 그리고 마지막엔 차 키를 챙기는 일까지.

 

 

 

그런 모습을 생각하자 다시금 속이 갑갑해 짐을 느꼈지만 석민은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다. 멀리 봐야만 했으니까. 돌아서서 가는 길이 멀고 험하지만 마지막 결승골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직 결정 나지 않았으니까.

그 사람은, 그 남자는 이 석민이 될 것이다. 기다림! 이 단어,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새삼 정겨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기다림! 그동안도 기다렸다. 한 번의 실수로 평생을 같이 해야 하는 여자를 놓쳤지만 두 번은 실수도, 실패도 하지 않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눈앞에서 보이는 두 사람의 화려한 애정놀이에도 무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기다릴 것이며 기회를 찾아야만 했으니까.

 

 

 

 

석민은 잡고 있던 문고리를 살며시 열고선 주방으로 향했다. 지금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음식들을 만드는 일과 또 함께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다. 얻는 것이니까. 자신의 사람들로 만들어야만 했으니까.

 

 

 

 

 

                        4. 날개를 달다 1

 

 

 

 

 

 

집으로 들어섰을 때, 반갑게 맞이해 주는 사람은 전화를 걸어 엄청난 사실을 얘기해 준 혜수였다.

 

 

 

“엄마는? 어디에 계시니?”

“주방에. 간식거리 만들고 계셔.”

“······!”

 

 

 

기가 막혔으며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쓰러졌다고 하지 않았는가. 병원까지 실려 간 사람이 지금 주방에 있다고 한다. 그것도 간식거리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 정말이지 쓰러지긴 쓰러졌나? 병원에 가긴 갔었나?

 

 

연수는 들고 있던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하려 했지만 먼저 거실로 나오고 있는 사람은 지영이었으며 또한 서재에서 인혁도 나오고 있었다. 아마 밖에서 다른 사람의 음성이 들렸음을 느꼈는지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 밖으로 나와 연수를 보고서는 왔냐는 표정을 지었다. 연수 역시 인혁을 보고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왔다는 인사를 했다. 아빠와 딸! 아빠와 딸이었지만 가벼운 포옹이라던지 장난기 섞인 인사법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어른과 아이의 인사, 선생님과 제자의 인사처럼 느껴지는 것은 오랜 습관 때문일 것이다. 오래도록 해 온 인사법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 법이니까. 적어도 윤인혁과 윤연수는 그래왔다. 아빠와 딸이지만 제대로 장난을 쳐 본 적도 없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포옹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렵다면 어려운 사이가 바로 이들 부녀지간이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몇 달 만에 집으로 돌아 온 딸에게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왔냐는 눈빛을 건네면서 맞이하고 있는 아빠의 무뚝뚝한 자세였다.

 

 

 

“왔구나.”

“네. 엄마에게 일이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언제 왔어? 온다면 온다고 전화라도 하던지. 그랬다면 너 좋아하는 간식들을 만들어 놨을 텐데.”

“······.”

 

 

 

또 할 말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정말 쓰러진 사람이 맞는 것일까. 병원까지 갔다 오긴 왔을까.

“혜수가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만들었는데 먹어 볼래? 늦은 시간이라 참치와 야채들을 넣어 가볍게 만들었어.”

“······.”

 

 

연수는 혜수를 쳐다보았다. 처음 시작도 네가 했으니까 이 상황을 설명하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내자 혜수 역시 지영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 꼬리를 살짝 치켜 올렸다.

 

 

 

“엄마, 이러지 마. 간식 먹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결론만 얘기해. 아빠하고 이혼 할 거야?”

 

 

이혼! 이혼이라고 했다. 연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는지 혜수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지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파서 쓰러져 병원에 갔다는 얘기까지만 듣고 왔는데 지금은 이혼이란 말이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혼이란 말이 나오는 것일까. 하긴, 이혼이란 말은 간혹 이지영이란 여자가 잘 쓰는 도구이긴 했다. 얼마 전, 생일날에도 이혼이란 말이 얼핏 나왔지만 지금까지 잘 살아 가고 있어 그냥 지나가려나 했다. 살림만 사는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고 사는 중년의 여자, 가정이 전부인 여자, 자식과 가족들 밖에 모르는 여자는 참다 참다가 겨우 던질 수 있는 말이 이혼이란 무기로 협박아닌 협박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익숙해졌고, 길들여진 인생이란 것을 알기에 아내의 말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차갑고 냉정한 남편은 무관심으로 돌변해 있을 뿐이다.

 

 

 

 

그 시간들, 그 세월들. 연수는 보았다. 그들의 사는 방법을······.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이혼 할 거야. 대신 넌 대학 가야 한다. 대학갈 때까지만 참고 살려고 했는데······ 못하겠어.”

 

 

지영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가 싶었는데 이미 눈물은 강이 되고 바닷물이 되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더욱 그녀의 마음을 여리게 만든 것은 연수가 왔기 때문이다. 친구이자,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었으니까.

늘 좋은 말을 해 주고,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라면서 온갖 도움 되는 것은 다 투자를 해 주었다. 요가학원을 시작으로 해서 수영도 배우게 해 주었고, 돈을 주면 엉뚱한 곳으로 샌다는 것을 알기에 평생교육원에 등록을 시켜 시와 소설을 공부하게끔 했다.

 

 

 

그러나 언제나 중도에 포기한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집안 일이 겹쳐지고, 은수가 밑반찬을 해 달라고 했고, 또 인혁의 요구대로 살다보면 빠지게 되는 것은 당연했는지 모른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빠지면서 요가도, 수영도, 평생교육원에도 나가지 못했다.

 

 

“아빠! 정말 이혼할거야?”

혜수는 지영이 다른 날과 달리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면서 계속 울고 있는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는지 대뜸 인혁을 향해 쏘아 붙였다.

“이혼 같은 것은 하지 않아.”

“이혼 같은 거! 방금 이혼 같은 거라고 했니?”

지영은 양 손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닦으면서 인혁을 쳐다보았다. 지금 지영은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원망과 미움, 증오심까지 생겨났다.

 

 

 

 

 

*

 

 

어젯밤,

 

오븐에서 구운 닭이 먹고 싶다는 혜수를 위해 아파트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 몇 십 분을 기다려 겨우 한 마리 만들어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1동이 보이는 아파트 입구로 들어왔을 때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보았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인혁이었다.

키가 크고, 단정한 스타일이 영락없는 윤인혁이었기에 지영은 양손에 구운 닭과 음료수를 들고 뛰었다. 몇 발자국 뛰던 지영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안고 있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인혁의 손도 젊고 색감적으로 보이는 여자의 허리에 손이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여자의 손이 인혁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입술이 다가가고 있었다.

 

 

 

지영은 혜수가 좋아하는 닭을 바닥에 놓으려고 했지만 꼭 그 집 치킨이 먹고 싶다는 말이 귓가를 울리게 했다. 배달도 되지 않는 가게, 그러나 손님들로 꽉 차 있는 가게에서 몇 십 분을 기다리면서 겨우 한 마리 만들어 집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

누구는 수능을 앞둔 딸을 위해 늦은 시간에 뛰고, 기다리는 게 전부였는데 누구는 젊은 여자와 밀어를 나누면서 사랑에 빠져 가고 있었다. 저 남자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아니라고 우겨도 사랑은 사랑이었으니까.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는 집 근처에서 저럴 수가 있는 것일까.

 

 

 

지영은 그들 곁으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하다가 인혁과 눈이 마주쳤다. 누가 누구를 먼저 보았는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시선이 불빛 속에서 마주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지영은 또 보았다. 놀라서 손을 놓고 있었지만 여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뒤로 넘어지려는 여자의 허리를 다시금 안아 주고 있었다.

그 여자의 허리를 잡고 있는 남자, 이미 그는 이지영의 남자가 아니었다.

아니라고? 그냥 후배라고. 함께 잔 적이 없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지영은 냉소를 보이며 뒤돌아섰다. 더 이상 봐야 할 것도 없었고, 보고 싶지 않았기에 냉정히 돌아설 수 있었다.

 

 

거실로 들어 온 지영의 뒤를 뛰어 온 인혁은 방금 본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했다. 술에 취한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다 준 고마운 여자이며 또 얼떨결에 발을 헛디뎌 안게 된 거까지 변명 아닌 변명으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지영은 혜수가 좋아하는 치킨과 음료수를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이내 인혁을 향해 뺨을 후려 갈겼다. 인혁은 잠시 멍해졌는지 가만히 서 있다가 지영을 향해 뭐하는 짓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지영은 울분이 차올랐고, 분노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라갔다.

 

 

 

“그 여자를 사랑하니?”

“사랑하지 않아.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골프를 치고, 함께 술 한 잔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야.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 여자야. 정보도 많이 알고 있어 대화가 잘 되는 여자일 뿐이야.”

“그 말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모르지? 결국 당신은 그 여자와 날 비교하면서 살고 있었어. 사랑이 아니라고? 그건 사랑이야.”

 

 

“사랑, 아니야. 그 여자와 잔 적 없어.”

 

 

“그 말도 치졸하고 비겁해. 책임지지 않으려는 남자,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오히려 불쌍하게 보여. 차라리 그 여자와 자. 그게 솔직해 보이니까. 그 여자와 매일 자는 환상을 꿈꾸잖아. 그 여자와 함께 자고 싶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그냥 대화가 되고, 함께 있으면 즐거워.”

“······!”

 

 

 

즐겁다고 하는 남자의 얼굴에 진심이 느껴졌다. 그 여자와 있으면 즐겁다고 한다. 그 여자와 있으면 대화가 잘 된다고 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혼하자. 대화도 안 되고, 함께 있는 것이 지옥이 되는 아내란 여자와 헤어지자.”

“이혼은 할 수 없어. 아니 못해.”

“왜? 날 사랑하니? 미친 듯이 사랑하니? 우리가 언제 한 침대를 사용했는지 기억은 하고 있니?”

 

 

 

이 말, 참으로 여자로서는 비참했다. 어떻게 이런 말이 아내란 여자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것일까. 오래전부터 섹스리스 부부가 되어버린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하는 것일까.

“넌 사랑이 함께 자는 거니? 그냥 부부란 이름으로 살면 되잖아.”

“······.”

 

 

 

비열하고 나쁜 남자의 표본이다. 그러니까 아내라는 자리만 지켜 달라는 것이다. 가정을 지키고, 남자의 성공을 위해 내조만 잘 해 달라는 것이다. 어쩌다가 생일이나 기념일 날, 의무감으로 안아주면 되는 거 아니냐는 눈빛 속에선 더욱 비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날, 생일날에 한 번 안아주었으면 된 거 아니냐는 표정이 지영의 가슴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의무감, 책임감 속에서 관계가 되어버린 그 시간도 비참하긴 마찬가지였는지 모른다.

 

 

 

그 여자와는 온 마음을 다해 키스를 나누었고, 살며시 안아주는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 거리자 미칠 지경이 되어갔다. 지영은 고함을 지르면서 이혼을 요구했다.

나쁜 자식을 시작으로 해서 20살에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이날 이때까지 이 지경으로 살게 한 것이 미안하지도 않느냐고 했다.

그러나 뜻밖의 대답에 지영은 기절을 해 버렸는지 모른다.

“누가 이렇게 살라고 했어? 네가 원한 거야. 아무도 원하지 않았어. 네가, 이지영이란 여자가 스스로 선택한 인생이라고.”

“방금 그 말, 한 번만 더 해 줄래?”

 

 

 

지영은 가슴을 움켜잡았다. 이미 목도 아파왔고, 심장이 쪼여들듯이 통증이 느껴져 왔지만 두 눈은 똑똑히 윤인혁이란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그 여자의 여운이 남아 있는 것인지 인혁의 입가에는 그 여자가 남겨주고 간 립스틱 자국과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두 번 말할 거 없어. 넌 툭하면 네 인생을 나한테 저당 잡혔다고 원망하는데 누가 원했어? 원했냐고? 날 자유롭게 두지 그랬어? 나도 20살에 아빠가 되고, 남편이 되는 거 원치 않았어. 그날, 두고두고 원망한다.”

“원망한다고?”

 

 

 

지금 싹싹 빌어도 용서가 될 지 안 될지 모르는 지경에 이 남자는 자신의 오래된 마음을 다 보이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도 없었고, 내 비친 적도 없는 남자가 침을 튀겨 내며 거칠게 쏟아내고 있었다.

이제 진짜 이 남자의 마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신, 당신이란 남자는 정말 무섭구나. 무섭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한 번도 보이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오다니. 정말 무서워.”

 

 

 

그 후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쓰러지고, 누군가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혜수의 음성이었다.

어렴풋이 울음 섞인 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후로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으며 들리지 않았다.

지영은 어젯밤에 생긴 일이 지금도 소름이 끼칠 만큼 기억하기 싫었다. 인혁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일찍 퇴근을 했으며 혜수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어젯밤, 두 사람의 모든 대화를 혜수가 다 들었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그 시간에 혜수가 집에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두 사람은 오랜 먼지 같은 얘기들을 남김없이 다 쏟아내며 서로의 가슴을 헤집어 나갔다.

 

 

 

사람은 지독하게 잔인한 동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이미 부부란 깊고 깊은 강을 다른 곳으로 향해 가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나 인혁도, 지영도 혜수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도 지금 일생에 가장 주요한 시점에 있는 입시생이었기에 어제 있었던 일을 어떻게 이해를 시키려는 입장을 보였다. 인혁은 각종 검사를 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지영의 요구대로 집으로 데려왔으며 또 잠시 회사로 들어갔지만 곧 퇴근을 해 들어왔다. 혜수는 혜수대로 자율학습을 마치고 학원으로 가야 하지만 학원이 아닌 집으로 와 방으로 들어가서는 몇 시간이 지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헤수는 혼자 감당이 안 되는 이 상황을 누군가와 의논이 하고 싶었다. 늘 바쁘고 집에 오는 거조차 힘든 연수보다는 은수를 생각했지만 근래에 와서는 은수도 하는 짓이 얄미워지고 있었기에 전화번호는 연수에게로 향했다.

연수가 오고, 그제야 헤수는 밖으로 나왔으며 지영은 어떻게 해서든지 혜수와 대화를 원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저녁을 먹지 않는 혜수를 위해 샌드위치를 시작으로 해서 여러 가지 간식들을 만들고 있을 때, 문소리와 함께 연수가 오는 것을 알았다.

 

 

 

맏딸! 친구였으며 정신적인 힘을 누릴 수 있는 강력한 존재였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모든 인생을 함께 해 왔기에 늘 기대고 싶었으며 또 기대고 살았는지 모른다. 바쁜 남편, 소홀한 남편, 외면하는 남편대신 연수를 선택했다.

그 딸을 보자 지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만 울컥거리며 가슴에 남아있던 모든 찌꺼기들이 한 순간에 다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눈물을 그치려고 했지만 이미 한 번 제 자리를 잡은 감정의 소용돌이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소리를 멈추게 한 것은 혜수의 돌발적인 발언이었다.

 

 

 

“아빠, 그 여자와 사는 거야? 그 여자와 결혼해?”

“······.”

“그런 거 아니야. 네 엄마가 오해를 하고 있어. 잠시 오해일 뿐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여자라니?”조금 전에도 혜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 싶었는데 지영의 복받치는 감정을 바라본다고 혜수가 하고 있는 말들은 잠시 뒤로 두었다.

 

 

“오해다.”

인혁은 연수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싫었는지 무뚝뚝한 음성으로 짧게 말했다.

“오해, 아니야. 네 아빠한테 여자 있어. 오래되었어.”

“아니라고 했지? 아니라고 했으면 믿어. 그 날은 잠시 실수였어. 내가 아니면 아닌 거니까 더 이상 문제를 확대시키지 말고 조용히 정리하자.”

“실수?”

 

 

 

목소리가 톡톡 튀는 사람처럼 올라가다가 잠시 심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러면서도 어디선가 통증이 느껴지는지 손으로 가슴을 쓸어 만져 나갔다.

“어디 아파?” 연수는 다른 사정을 떠나 지영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자 그게 더 걱정이었다. 이혼을 하든, 여자가 있든 그건 이차적인 문제였다.

이들 두 사람, 이혼이란 말이 벌써 몇 번이나 나왔는지 알고 있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건 오래도록 함께 살면서 느꼈고, 알 수 있는 감정들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무감과 책임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부부란 껍데기만으로 형식적인 가정을 지키고 있다는 것도.

 

 

 

“아니. 이젠 괜찮아. 가끔 속이 니글거릴 정도로 아픔이 느껴지는데 시간이 지나면 곧 괜찮아져. 병원에서도 이상 없다고 하니까 걱정할 일은 아닌 거 같아.”

그러면서도 지영은 계속 속이 답답하고 갑갑증이 느껴 와 한 손으로 가슴을 탁탁거리며 치고 있었다.

 

 

“그래도 모르니까 다시 병원에 가 보자.”

“병원은 무슨, 갔다 왔어. 아무 이상 없다고 했어.”

“그래도 한 번 더 검사를 해 보자.”

 

 

연수는 지영의 얼굴빛이 흐려지는 것이 걱정될 뿐이었으며 혜수 옆에 앉아 있는 인혁이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사랑을 하지 않아도 이 방법은 비겁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엄마의 말대로 그 여자를 얼마나 사랑하는 것일까. 오해라고,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이혼은 하지 않는 다고.

 

 

 

“혜수야, 9월 달에 수시에 지원하는 것으로 하자.”

“수시는 불리해. 수시로 갈려면 성적이 월등히 좋던지, 아니면 특기사항이 뛰어 나야 하는데 나는 다 힘들어.”

지영은 지금의 마음 같아서는 차라리 혜수가 연수나 은수였으면 걱정이 조금은 덜 되었을 것이다. 연수와 은수는 모두 수시로 바로 대학에 들어갔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합격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혜수는 도통 공부하고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만약에 잘못되어지면······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 순간, 지영은 웃고 말았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인생을, 한 여자의 인생을 엉뚱하게 가게 하는 힘이 있긴 있었다. 여자의 인생! 여자의 인생은 무엇일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버렸다. 허탈함, 놓고 싶은 마음, 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이런 허황된 웃음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엄마, 방금 웃었지? 그건 아빠하고 화해하는 거지?”

“화해?”

“응. 두 사람, 싸웠잖아. 그 웃음은 아빠를 용서하는 거잖아.”

“······.”

단순한 아이였다. 지영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으며 조금 전에 만들어 놓았던 샌드위치와 우유를 쟁반에 올려 들고 나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혜수는 힘 빠지면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지? 그러니까 먹어.”

“알았어. 사실, 배가 고프긴 고파.”

 

 

 

혜수는 지영이 계속 웃고 있자 그 웃음에 모든 것을 걸고서는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하나는 금방 입 안으로 들어갔으며 곧이어 또 하나가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는 지영의 마음은 시려왔다. 약하디 약한 아이, 거기에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 있는 입시생이다. 그런 아이를 두고 이혼에 대한 말이 나온 것이 엄마로서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마주보고 앉아 있는 인혁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오장 육부가 다 뒤틀려 왔다.

 

 

 

뺨이 아니라 온 몸을 다 뜯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 솔직했을 것이다. 언제나 도망갈 길은 열어 놓고 제 할 짓은 다 하는 남자, 아내가 지겨워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워 놓고서도 확실한 변명은 다 만들어 놓는 남자다. 대화가 된다고,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함께 있으면 편하다고······.

 

 

나쁜 사람이다. 지독히 이기적이다. 이런 남자를 목숨 걸고 사랑했다니······.

 

 

 

누구를 원망 할 것인가? 이 남자의 말대로 스스로 선택한 인생인 것을. 누군 그렇게 살고 싶었냐는 말이 독처럼 느껴졌다. 독이다, 무섭고 소름끼치는 독이다.

 

 

“엄마는······ 아빠하고 이혼 할 거야. 이젠 정말이지 함께 살기 싫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힘들게 말을 꺼내고 있었지만 세 사람은 잠시 동안의 침묵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혜수의 눈에 눈물이 맺혀가는 것이 보였다.

“뭐야? 아빠가 이혼하지 않는 다고 했잖아. 그러면 되는 거잖아.”

“그런데 엄마는 하고 싶어. 아빠하고 한 집에서 밥 먹고, 함께 사는 거 그만하고 싶어. 이젠······내가 싫어. 너무너무 싫어.”

말을 할 때마다 가슴 어디에선가 통증이 느껴져 왔다. 순간, 의사들이 오진을 하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디마디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숨을 쉬기도 힘들었으며 말을 하는 것도 힘들기만 했다.

“아빠, 이혼 할 거야? 엄마 말대로 그 여자를 사랑해? 그 여자하고 엄마가 차이가 많이 나는 거야? 그 여자는 똑똑하고, 세련되고, 아는 것도 많고······.”

다 들은 모양이다. 잠자리에 대한 얘기는 그나마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혜수도 알 것은 다 아는 것으로 보였다. 혜수의 양손이 엇박자가 되듯이 힘껏 잡고 있는 것이 느껴졌으며 도대체 부모라는 사람들이 이래도 되느냐는 눈빛 속에선 원망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남자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있어. 그 중의 일부분이야. 특별한 여자는 아니다. 네 엄마가 과잉반응을 보여 문제를 크게 만들고 있어. 아빠는 분명히 말했다. 이혼 같은 것은 하지 않는 다고. 네 엄마한테 죄지은 적 없다.”

“죄! 죄······.”

 

 

지영은 작은 목소리였지만 죄라는 말이 입 속에서 오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