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호출이 왔다. 다른 일정이 있더라도 사무실에 먼저 들러달라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일지의 내용을 보고 뭔가 집어낸 모양이었다.
사무실에는 심의위원장 혼자였다. 회의를 소집한다는 말이 없었으니 당연했음에도
담돌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미안하네. 아침부터 이렇게 허겁지겁 달려오게 해서.”
“아닙니다.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랬다면 다행이네만.”
위원장은 팔장을 낀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때 좀 더 강하게 말렸어야 했다. 아니 자신이 좀 더 냉정했어야 했다. 담돌이
그 말을 꺼냈을 때 무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도 말렸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그를 말리지 못했던 것은 그만큼 믿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 번 시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 순간 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중간계에서 육계의 기억이란 치명적일 수가 있었다. 수백 경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의식 속에는 아내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걸 버릴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가라앉아 있는 기억을 꺼내야 했다.
그럴 수 있는 기회처럼 보였다. 그래서 단호하게 물리치지를 못했다. 헌데 시작을
해놓고 나서 겁이 났다. 그가 기록해놓은 내용들을 보고 있노라면 더욱 그랬다.
모골이 송연해지기까지 했다.
“위원장님?”
담돌은 바짝 긴장이 되었다. 위원장의 표정은 무거워 보였다. 말하는 것도 잊은
듯했다. 머릿속에 올려놓고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
“담돌!”
위원장은 이름을 불러놓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다음 말을 잇기가 버거웠다.
그래도 피할 수는 없었다.
“내가 왜 보자 했는지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 나만큼이나 자네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네.”
담돌은 고개를 푹 숙였다. 속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행여라도 속을 들킬까봐 철저히
사실만을 기록했었다. 헌데 위원장은 자신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거짓도 아니었다.
“수향영 감당하기 벅찬 상대가 되어간다는 느낌이 드네. 그동안 우리가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평가한 듯하네. 어쩌면 우리가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위원장님, 우리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절대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휘말리더라도 저 하나여야 합니다.”
“담돌, 그건 안 될 일이네.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절반은 내게도 책임이 있네.
그 책임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어. 함께 감당해야 하네.”
위원장의 표정은 단호했다.
“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은 휘말릴 만큼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릅니다. 이제 시작인 걸요.”
“자네 말대로 이제 시작인데 결과는 끝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드니 어쩌겠나.
그게 두렵군. 뻔히 드러난 결과를 수습해 가는 과정만 남은 느낌이니 말이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지금으로선 감도 오지 않네. 두렵다는 건 바로 그 때문이야.”
“절망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맞아. 희망을 버리기에는 아직은 이르지. 희망이 있어야 뭐라도 시도하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테고. 하지만 그 여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제 막을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드네. 최악의 상황에 쓸 수 있는 건 최후의 수단밖에 없다는 거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바라야겠지요.”
“그래야 하겠지. 하지만 바라는 걸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네.”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찌할 생각인가?”
“당분간은 지금처럼 하면서 좀 더 살필 생각입니다. 아직 뚜렷하게 드러난 게 없어서
지금 다 드러낸다면 그 여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정보국 영상자료실에 그 여자의 일상이 저장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숨긴
건가?”
다그치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온몸에 잠시 냉기류가 흘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위원장의 생각망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알고 있었군요.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랬겠지. 누군들 편했겠나? 그걸 탓할 생각은 없네. 그게 바로 책임감 아닌가.
모든 영들에게 무사히 영계의 삶을 누리게 해주고 싶어 하는 담당 안내자로서의
책임감. 그건 누구도 탓할 수가 없네. 하지만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는 말게.”
담돌은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눈을 똑바로 뜨고 위원장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게. 자네 생각대로 해보란 말이네. 당분간 이 일은 우리 둘만 알고
있는 걸로 하게. 앞으로도 기록일지에는 그 여자가 보여준 사실만 기록하게.
그렇다고 드러난 사실까지 빠트려서는 안 되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위원장의 말은 무겁웠다. 담돌은 시선을 떨군 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위원장도 그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고 용기를 잃지는 말게! 힘을 내게 담돌.”
그는 기록일지를 펼쳤다. 여러 위원들의 댓글이 올라와 있었지만 심각한 내용은
없었다. 여전히 그쪽에 관심과 흥미가 있는지 잘 살펴보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위원장이 회의를 소집하지 않고 혼자 온 이유였다.
그 역시 일을 확대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