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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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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2011-10-26

수향은 뇌신을 쓴 채 단말기 앞에서 피리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서 읽어나갔다.

그녀가 그 자료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피리가 입에 대고 부는 악기의

일종이라는 거였다. 나머지는 모두 연주 방법과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색다른 것은 없었다.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피리를 불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경험을 했다는 내용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밤마다 단말기 속을 누비고 다녔다.

 

 

담돌은 그 여자가 잠들기 전까지 영상수신화면기를 켜놓은 채 그 여자의 생각을

읽어내려고 애를 썼다. 행여라도 잠을 자서 지난번처럼 놓치는 일이 다시 생기게

해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그 여자의 일상이 영상자료실에 저장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놓치면 그걸로 끝일 수밖에 없었다. 오히혀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원장에게도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만큼 부담도 컸다.

 

위원장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왠지 미적미적하며 찜찜한 표정으로 돌아서던 모습이 걸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위원장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닥이 잡히기 전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위원장이라도 그건 예외가 아니었다.

그를 믿을 수 없어서는 아니었다.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일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였다. 위원장이 눈치를

챘다면 오래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담돌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되도록 빨리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몰아댔다. 영상수신기에 매달리는 시간도 점점 더 늘어갔다. 쉽지는 않았다.

화면을 통해서 보는 그 여자의 행동만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진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여자는 아직 특별한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화면에 뜨는 내용들을 보면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여자가 찾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짓는 실망하는 표정으로 봐서 그랬다.

 

기록일지에는 언제나 그가 화면에서 보았던 내용들을 정리해서 입력했다.

위원들은 그 여자가 피리에도 관심이 많은 모양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장난삼아 피리 연주 솜씨는 어떠냐고 애교스런 질문을 달아놓기도 했다.

표정도 좀 기록해주면 안 되느냐는 내용도 있었다.

 

위원장만이 무겁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댓글이 전혀 없다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도 한번쯤은

댓글을 달아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담돌은 그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접어야 했다.

 

 

수향은 피리를 만지작거리다 말고 다시 단말기 앞으로 갔다. 푸르밀이 그의 집에서

했듯이 그녀도 해볼 생각이었다.

 

그녀는 뇌신을 단말기와 연결했다. 그런 다음 단말기에서 피리에 대한 정보를

자신의 머릿속으로 끌어왔다. 수없이 많은 정보가 머릿속으로 뒤죽박죽 들어왔다.

머릿속이 넘쳐나는 정보들로 터질 거 같았다.

대부분이 비슷한 내용의 정보들이었다. 비슷한 자료들을 추려서 빼낸다면 생각이

가지런해질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그녀는 그것들을 모두 밖으로 쏟아냈다. 머리가 터질 거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여 방법을 찾은 다음 다시 시도해보기로 했다.

 

뇌신은 생각하는 대로 작동한다고 했다. 비슷한 내용들에서 가장 좋은 문장으로

된 것만 남기고 빼내는 수밖에 없었다. 정보를 밖으로 빼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

같았다. 하지만 유사한 정보들 중에서 가장 좋은 정보를 찾아내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할 거 같았다.

 

그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다시 뇌신을 이용해 단말기의 정보들을

빨아들였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녀는 생각을 하나로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해서 정보들을 하나하나 구별해 냈다. 그리고 유사한 정보들

가운데서 하나만을 선택하여 남긴 후 나머지는 밖으로 버려나갔다.

 

그러한 작업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머릿속이 와글와글한 것 같아서 그냥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끝났을 때 머릿속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지만 몸에 있는 기운을 다 써버린

에  더 버티려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담돌은 잠든 그 여자의 얼굴을 화면에 띄워놓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 여자를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계의 시스템이 제대로 입력된

영들조차도 어려워서 포기하는 과정을 그 여자는 혼자서 거뜬히 해냈다.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두어 번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여잔 이겨냈다.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그도 덩달아

이를 악물었다.

 

무엇이 그 여자로 하여금 그렇게 이를 악물게 했을까? 누가?’

 

떠오르는 것은 휴밖에 없었다. 그 여자를 버텨내게 한 힘은 바로 휴일 것이다.

휴가 아니라면 그 여자가 그렇게까지 버텨냈을까? 그러지 못했을 거 같았다.

 

휴가 살아나고 있다는 위원장의 말이 맞는 거 같았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의 내부에서 휴가 형체를 가지고 떠오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일은 그 여자를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도 화면을 닫고 자리에 누웠다.

 

 

수향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지난밤 늦게까지 머릿속에 입력한 정보들을 떠올렸다.

혹시 그 속에 색다른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내용까지 모조리

들여다봤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피리와 휴를 연관 지을 그 어떤 끄나풀도 그 속엔

없었다. 그렇게 힘겨운 과정을 겪어낸 보람이 없어서 실망스러웠다.

 

 

담돌은 그 여자가 다른 친구들을 만나 밖으로 나가기 전에 서둘렀다.

 

어 오랜만이네요.”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맞았다. 너무 환하게 웃어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실망하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 오고 싶었는데 일이 생겨서요.”

 

작업장에서 요청이 왔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뭐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오늘 약속 있나요?”

 

약속이라기보다는 늘 만나는 게 버릇이 돼서 그냥 그렇게 지내요. 왜요?

 이상한가요?”

아뇨? 전혀. 그냥 오늘은 그런 약속이 없었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거든요?”

 

걱정 말아요. 쪽지를 보내면 되거든요. 하루쯤 안 간다고 삐질 친구들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돼요?”

그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요? 이럴 때 선심 안 쓰고 언제 쓰라구요.”

 

선심인가요?”

 

그녀의 선심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들렸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담돌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니까 딴 생각 말아요?”

 

알았어요. 미안해요.”

 

그는 머쓱함을 감추느라 웃으면서 말했다.

 

신기하군. 전혀 실망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아. 벌써 빠져나온 것인가?

휴 생각에서 놓여나서 그런 걸지도 몰라. 보이는 것과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군.’

 

언제부터인가 담돌은 그녀에게 늘 놀라고 있었다. 단순해서 그런가 하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전혀 단순하지가 않았다.

 

생명의 기운부터 좀 쐬고요. 원기를 보충해야 해요. 어젯밤에 너무 기운을

뺐거든요.”

 

왜요?” 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긴요, 서툴러서 그렇죠.”

 

뭐가 서툰데요?”

 

알잖아요. 남들은 아무 불편 없이 하는 것들을 난 이제 새로 익히고 있다는 거.

그래서 남들은 안 해도 되는 헛고생을 하느라 늘 진을 빼고 있거든요.

어제는 이렇게 돼서 잤어요.”

 

그녀가 널부러진 시늉을 해 보였다. 그는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았다.

 

생명의 기운은 제자리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속으로 잠수하듯 들어가서 휘젓고 다녔다.

그녀의 모습이 뭉게뭉게 떠도는 기운 사이로 잠깐잠깐 보였다 사라졌다.

그는 그런 그녀가 아내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는 꽃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아내는 혼자 있어야 할 때면 늘 꽃밭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래서 밖에서 돌아오면 그는 언제나 꽃밭으로 먼저 갔다.

아내가 그의 낌새를 먼저 느끼기라도 하면 그때부턴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아내는 꽃 속에 숨어 그를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아내는 그걸 즐겼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꽃밭에 다가갈수록 아내가 알아채도록 표시를 크게

냈다. 그랬는데 아내가 알아채지 못하고 덤덤하게 걸어나오기라도 하면 실망하는 건

언제나 그 자신이었다.

 

생명의 기운 속을 휘젓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이 아내의 상과 겹쳐서 다가왔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왔다. 아내는 그가 찾아낼 때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었는데 그것만 달랐다.

생명의 기운을 제대로 쐬고 싶을 땐 이 방법이 최고거든요. 어쭙잖게 선택해서

담으려고 하면 부족하거나 넘치기 십상인데 이렇게 하면 골고루 잘 섞여서 몸이

바로 가뿐해져요.”

 

한참만에야 나온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몰랐어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누구도 모르더라구요. 마루도 푸르밀도. 내 머리가 나쁘진

않았나 봐요.”

 

그러게요. 이젠 뭘 할 거죠?”

 

글쎄요. 이제 뭘 하죠?”

 

그동안 알아둔 곳이 많을 텐데 어디가 좋을까요?”

 

피리 연주방은 어때요? 거기 한 번 가고 싶어요.”

 

아직 안 가봤나요?”

 

예 아직. 그래서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방법을 찾고자 하는군. 그러면서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있어.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집에 먼저 들렀다 가요. 피리를 가져가야 하거든요.”

 

그럴 필요 없어요. 거기에도 피리가 있거든요. 가지고 가도 소용도 없구요.

그 곳에선 거기에 있는 피리만 사용할 수 있어서요.”

 

어 그래요? 그럼 그냥 두고 가죠.”

 

이거요.”

 

그녀는 담돌이 건네주는 뇌신을 머리에 얹었다.

 

그 곳에 가 본 적 있어요?”

 

가서 보기만 했어요.”

 

늘 보기만 하고 왜 직접 해보진 않나요?”

 

내가 그랬나요?”

 

. 함께 가는 곳마다 항상 우두커니 서서 구경만 했잖아요. 지금도 그렇고.”

 

사실 난 직접 해보는 것보다 구경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친구를 만들지

못했어요. 다들 꼬투리를 잡아서 자꾸 캐물으려고 하거든요.

수향영은 그러지 않아서 편해요.”

 

담돌은 아무렇지도 않게 변명을 했다. 다행이 수향은 그의 말을 순순히 믿어줬다.

 

그렇군요. 알았어요. 왜 그러냐고 묻지 않을게요.”

 

전 그냥 구경만 할게요. 소리가 들리죠? 거의 다 왔어요.”

 

예 그러네요. 기다리려면 지루하지 않겠어요?”

 

구경하는 것이 몸에 배어서 느끼지 못할 겁니다.”

 

알았어요.”

 

그는 쑥스럽게 웃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쑥스럽게 웃을 일이 많았다.

 

피리 연주방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악기통에서 피리를 꺼내 들고 무대로 올라갔다.

담돌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실마리라도 잡아내야 했다.

그녀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뒤에 숨어있는 생각의 본체에 다가갈 수 있는 실마리.

 

무대는 객석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끼어들 자리가 없을 것처럼 보였던

무대는 그녀가 올라가도 비좁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연주하는 영들의 모습을 훑어봤다. 난감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연주 소리를 들어본 후 난감한 느낌은

사라져버렸다. 아무도 다른 영의 연주에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음색은 저마다 제멋대로였다. 그런데도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무대와는 영 딴 판이었다. 마치 무대와 스피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사가

있어서 무대 위의 영들이 만들어낸 음계를 가지고 기교가 뛰어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좀 이상하긴 했지만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무대로 끌고 가려 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그녀가 부러웠다.

 

거부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더라면 영계에서 아내를 만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는 기억을 놓지 않는 것만이 아내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왜 자신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로강을 건널 때 아내 생각에 골몰한 채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어떻게 견뎠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대가가 지금 그를 무대 밖에

서있게 했다. 영계의 현실을 거부한 대가가 그를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존재 속에

갇히게 했던 것이다. 서글프게도 그의 운명은 그에게 더 이상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화들짝 놀랐다. 과거를 돌이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헌데 오늘에만 벌써 두 번이나 아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허겁지겁 무대에서 그녀를 찾았다.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육계의 잔상이 그녀를 망설이게 하는 거 같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알아챌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피리의 구멍에 입술을  대자 마음이 설렜다. 그녀는 공기를 불어넣으면서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았다 떼었다를 반복했다. 어느 결엔지 머릿속에 음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그 음들을 차례로 연주해나가기 시작했다.

연주가 무르익자 머릿속의 음들이 저절로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몸도 흥에 겨워 소리를 타고 저절로 움직였다. 황홀했다.

갇혀있던 그녀의 정신이 우주를 훨훨 날고 있는 거 같았다. 그녀의 정신이 어디까지

날아갔던 것일까?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건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낯설지 않았다.

 

이봐! 내 말 듣고 있남? 나도 이제 가고 싶다고. 당신이 있는 곳으로 나도 가고 싶어.’

 

그때 또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끊임없이 움직이던 수향의 손가락이 뚝

멈추었다. 머릿속의 음들도 사라졌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도 그뿐이었다.

 

? 당신이 휴 맞지? 난 누구야? 당신은 알고 있잖아. 말해줘!”

 

그녀는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피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상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왜 그래요? 아까부터 계속 왜 그렇게 서 있어요?”

 

담돌이었다. 그가 옆에 와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아 예 아무 것도 아녜요.”

 

수향은 행여 들키기라도 할까봐 얼른 둘러댔다. 담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들키기 전에 빠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담돌은 그녀가 들키기라도 할까봐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오리무중이었다.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음 한 자락도 내비추지 않았다.

 

근데 왜 그래요? 꼭 무슨 일 있는 사람처럼.”

 

내가 그랬어요? 아마 별 거 아닐 거예요.”

 

꼭 남 말하듯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좀 전의 상황에서 조금씩 빠져나왔다.

 

피리를 들고 쳐다보면서 한참을 생각하기에 뭔 일 있었나 했어요.

별 일 아니라면 다행이구요.”

 

그는 모르는 척 했다. 그녀가 마음을 내비추지 않는 한 아는 척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냥 신기해서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티가 안 났다. 어느 새 생각 속에서 휴를 놓아준

듯 했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강인함에 놀랐다. 그녀의 행동은 휴를 좇아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내는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영계로 오던 날

울먹울먹하며 혼자 중얼거리던 그녀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집으로 갈 건가요?”

 

그녀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휴는요? 휴 얘기를 안 하는군요. 그는 다 잊었나요?”

 

아니요? 그는 내 머릿속에 여전히 살고 있어요. 함께 사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그를 머릿속에 붙들어 놓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떠나지 않는 그를 내가

먼저 버릴 순 없을 거 같아요.”

 

차분했다. 어떤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다른 때와 같은 흥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군요. 휴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나 생각했어요.”

 

그가 사라져요? 글쎄요. 사라진다면 할 수 없죠.”

 

그가 괴롭히진 않나요? 휴 때문에 힘들진 않느냐고요?”

 

그녀가 걸려들기를 바랐다. 그래서 작은 빈틈이라도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그가요? 그가 왜요?”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냥. ······ 그럴 수도 있잖아요.”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는 그렇게 나쁘진 않아요.”

 

역시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었다. 부정을 했다면 그걸 꼬투리 삼아 생각을 굴려볼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지도 않았다. 대답을 회피하지는 않았지만 상식에서

어긋나는 말을 하거나 그런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가 중간계로 온다면

 위원장 같은 인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피리 연주방에서 있었던 일을 화면에 올려놓고 보고 또 봤다.

보면 볼수록 생각은 분명해졌다. 휴였다. 그 여자가 휴의 목소리를 들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여자가 갑자기 연주를 멈출 이유가 없었다.

피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서 있을 이유도 없었다. 말하지 않는 그 여자의 생각까지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곳에서 그 여자가 보여준 행동과 표정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육계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 키가 피리소리라면

그것은 충분이 가능했다.

 

육계의 문이 어떻게 열린 걸까? 얼마나 열린 거지?’

 

그는 조바심이 났다. 피리가 키라 해도 처음 그 여자의 상태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그 여자의 육계의 감각은 모두 닫혀 있었다. 비록 잔상은 남아서 그 여자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육계의 감각이 깨어있다고 판단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육계의 감각이 모두 닫힌 게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그 여자가 보여주는 모습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육계의 감각은 그렇게 쉽게 드러나지 않게 되어 있었다. 비록 다 지워지지 않고 조금

남아있다 하더라도 영계의 삶에 적응하는 걸 방해하는 정도일 뿐이지 완전히

깨어나는 일은 없었다. 헌데 지금 그 여자의 행동은 육계의 감각이 깨어있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여자의 육계의 감각이 깨어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상황도 아니었다.

도움을 요청하려면 그 여자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샅샅이 드러내야 했다.

왠지 그건 자신이 자꾸 피하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원장의 말 때문인 거 같았다. 기록일지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기록했다.

그 여자의 표정은 가급적 기록일지에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다른 위원들은

여전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위원장만이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생각을 굴리고 있을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