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돌은 수향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휴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푸르밀이 게임을 하고 있는 내내 푸르밀과 단말기만을 바라보던 그 여자의 태도는 매우 진지했다. 물론 잠깐 따분한 표정을 엿본 거 같기도 했지만 좀 지나자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 표정조차도 정말 따분해 했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화면 속의 그 여자를 보면서 애매모호한 생각에 붙들려있는데 호출이 왔다. 위원장이었다. 기록일지를 보고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는 서둘러 교육국 사무실로 들어섰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위원장이 일어서서 다가왔다. “왔군. 좀 앉게나. ······ 바쁜 모양이야?·· 사무실에서 어제 오늘 얼굴 보기가 어려운 걸 보니.” “아 예? 수향영을 집중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어서요.” “무슨 일 있나? 요즘 어떻게 지내던가? 물론 기록일지를 읽어보긴 했네만 직접 듣고 싶어서 말이네. 잘 적응할 거 같은가? 시스템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지.” “예. 그 부분에서라면 전혀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의외로 잘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루와 푸르밀이라는 영들이 친구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영계의 시스템에 흥미도 있는 거 같고요.” “그래도 문제는 있을 거 같은데. 아마 그게 다는 아닐 거네.” “예. 그게 다는 아닌 거 같습니다.” “무슨 문제를 발견한 거 맞군. 그래서 그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에 매달리고 있는 거 맞나?” “예.” 그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위원장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움찔했다. 그는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내심 애를 썼다. 머릿속에서는 위원장이 어디까지 생각을 한 것인지 궁금했다. 자신이 어느 정도 말해야 할지도 알쏭달쏭했다. 아직 뭐가 뭔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은 일을 바닥까지 다 드러내놓으면 일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바라지 않는 바였다. “혹시 어제 기록한 내용과 관련이 있나?” “예.” “자네 대답을 회피하고 있군.”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듯한 말투였다. 위원장은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 정곡을 찔러서 자신의 반응을 살피겠다는 의도였다. 담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위원장을 긴장한 채 바라보았다. 차분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론 선을 긋고 있었다.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내면도 단단히 무장을 했다.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를 설득하든지 아니면 그의 생각을 중단시키든지 둘 중의 하나가 필요했다. 하지만 둘 다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 건 아니~.” 헌데 자신이 없었다. 생각처럼 행동도 마음도 따라주지 않았다.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는 위원장의 눈빛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나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군. 날 경계하고 있어. 왜지?’ 위원장은 담돌의 생각을 잘라내면서 그의 심중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의 생각이 안에서 움츠러든 채 꼬물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내 생각을 흩뜨려놓을 모양이었군. 자네 생각이 많이 컸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당할 나 아니네.’ 위원장은 시선을 거두었다. 더 깊이 들어갔다간 담돌의 생각을 멈추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건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당연히 아니어야 하겠지. 하지만 때론 상황과 생각이 다르게 움직일 때가 있다네. 지금 그걸 탓하고 싶지는 않네.”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거 같았다. 또 다시 위원장은 정곡을 찌르는 말하기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부끄러웠다. 위원장의 생각은 벌써 자신을 앞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두렵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위원장의 파고 들어오는 생각을 밀어내려던 의지를 접었다. “휴가 그 여자에게서 살아나고 있다고 믿는 거 맞나?” “예. 그렇습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어제 보여준 행동은 그 여자의 내면에 영계의 시스템과 다른 무언가가 끼어든 것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듯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꼭꼭 차단하겠다던 생각의 문을 열고 순순히 대답했다. “만약 그렇다면 휴에 대한 육계의 기억(감각)이 남아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겠군.” “아마도 그럴 겁니다. 아직은 그 여자가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위원장은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더니, “휴에 대한 기억(감각)이 남아 있다? 육계의 잔상은 휴와 연결되어 있을 게 분명하고. 그 잔상이 뚜렷한 형체를 가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건데?” 위원장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지막 말에서 위원장의 말이 멈추었다. 생각이 거기서 멈춘 듯했다. 아니면 생각이 거기서 다시 시작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생각을 모아서 문제의 추이를 살피려는 의도인 건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뭔가 알아냈다는 느낌도 다가왔다. “예?” 담돌은 위원장의 뜻밖의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솔직히 피리를 그 여자의 표정과만 연결짓느라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놀란 모양이군요. 내 기우일 수도 있네. 그러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지는 말게. 이곳에 오래 있다 보니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하는 게 버릇이 되어서 말이네. 행여 그런 가능성이 현실이 될 경우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미연에 방지를 해야 하거든. 그 일이 현실이 된다고 해도 생각을 하고 나름대로 노력을 했을 때 일어나는 일은 대처하기도 쉬워서 말이네.” 위원장은 생각에 잠기기 이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자신을 향해 말하는 어투도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아 예 그렇겠군요.”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말이네. 휴에 대한 부분이 그 여자의 내면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하네.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경험 만들어주기와 맞닿아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도 말이네.” “만약 그렇게 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결과들은요?” “나도 모른다네. 자네와 마찬가지로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 당하는 일이라네. 다만 그동안 겪었던, 경우가 다른 사례들을 통해서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봤을 뿐이라네. 그래서 그 결과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네. 어쩜 최악의 상황까지도 각오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지금으로선 그 여자의 행동을 꼼꼼히 살펴 알아내는 게 중요하네. 입력·분석 장치를 이용하는 것도 도움이 될 거네. 필요하면 정보국 영상자료실에 요청해 보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잠시 주저주저하다가 말했다. 그 여자의 일상이 정보국 영상자료실에 저장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할까도 생각해봤지만 만약을 위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위원장은 할 말이 남아있는 듯 시선을 주더니 도로 거두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네. 바쁠 텐데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아서 미안하네, 담돌.” “아닙니다.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일깨워주신 걸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담돌 자네여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담돌은 선 채로 심의위원장이 문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왠지 그의 발걸음이 단단하게 보였다. 허튼 구석이 없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심의위원장이었다. 그래서 어떤 땐 두렵기도 했다. 심의위원장이 그의 시선에서 벗어난 후 그는 단말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헌데 뭔가가 그를 붙들고 있다는 느낌이 다가왔다. 그는 멈춰 섰다. 위원장의 존재감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헌데 그게 다가 아닌 거 같았다. 그를 붙들고 있는 건 분명 그게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이 어느 순간부터인지 뿌옇게 엉망이 되어 있었다. 존재감 때문이라면 머릿속이 엉망이 되지는 않는다. 그는 그게 뭔지 집어내려고 애를 썼다. 애를 쓴다고 해답이 찾아지는 건 아니다.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잡으려고 하면 어느 순간 달아나고 없었다. 그는 포기하고 단말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어 걸음 옮겼을까? 그때 그의 머릿속을 가로지르는 말이 있었다. ‘담돌 자네여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위원장이 돌아나가면서 던진 말이었다. 위원장의 존재감에 몰입되어 생각을 놓고 있던 순간에 위원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이 바로 와 닿지 않았다. 그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접수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위원장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곰곰 생각했다.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위원장의 입장이 되어보기로 했다. 위원장의 입장이 되어서 그는 그 말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헌데 그 말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단단하게 묶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눈앞에서 그 말은 점점 더 두꺼운 벽속으로 달아났다. '보여주지도 않을 말을 왜 꺼낸 걸까?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확실하게 드러낼 생각은 없지만 넌지시 보여주려는 의도가 숨어있음은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위원장이라는 존재를 떠올렸다. 머릿속에 올려놓고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위원장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위원장을 내려놓고 단말기로 향했다. 발걸음은 좀 무거웠다. 담돌은 기록일지를 열어 아침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기 전에 다른 위원들이 기록한 내용을 훑어보았다. 푸실은 좀 혼란스러워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적고 있었다. 처음 접하는 새로운 세계가 모두 흥분의 도가니가 돼주지는 않을 거라며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해결될 거라고 덧붙였다. 역시 푸실다웠다. 파는 영계의 시스템에 적응해가는 동안 나타날 수 있는 자연스런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영계의 시스템이 전혀 입력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가 아닌 여러 과정을 접하다보니 경험한 것들이 서로 얽혀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카인의 지적은 역시 날카로웠다. 그는 잔상에 의한 행동과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서 나타날 행동의 경계를 분명히 그을 수 없어서 판단하기가 아직은 이르다는 내용을 남겼다. 뭔가 다음 단계의 행동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말도 적고 있었다. 그 글은 위원장의 말을 다시 한 번 되씹어보게 했다. 하지만 다들 다행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영계의 시스템과 접하면서 거칠게 반응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긍정적이라는 데는 모두의 생각이 일치했다. 하지만 위원장의 생각을 앞서는 위원들은 없었다. 그는 위원장이 정식으로 위원회를 소집하지 않고 호출형식으로 혼자 와서 만나기를 청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 생각을 하자 그에게 솔직하게 다 말하지 않은 것이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