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14세 미만 아동의 SNS 계정 보유 금지 법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244

휴와 피리


BY 이안 2011-10-21

피리는 잊은 듯했다. 그녀가 피리 얘기를 꺼내주기를 은근히 기다렸지만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쑥 꺼낼 수도 없었다. 그녀 앞에서 그는 피리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해야 했다.

 

그는 피리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그녀가 이야기를 꺼내는 걸

주저하는지조차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동안 있었던 흥미진진한 즐거움이 전부인

것처럼 그녀는 다른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는 다시 영상수신장치를 연결했다. 그 여자가 화면 속에 나타났다.

안도하는 모습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의 흥분이 다 가시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그녀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지나갔다.

행복한 표정도 지나갔다. 연상놀이방이나 패션방에서 있었던 장면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그 여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제야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그 여자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잰걸음으로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그 여자의

손에 함이 들려 나왔다.

 

피리를 바라보는 그 여자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건 영계로 오던 날 휴

생각을 하면서 보였던 눈빛이었다. 피리를 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휴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여자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여자와 연결된 단말기는 다시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다시 기록일지를 열었다. 댓글이 수두룩하게 올라와 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는 그 여자를 만나기 전에 기록한 내용에 덧붙여 화면 속의 모습을 기록했다.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알아내야 해. 그 여자를 도와주려면 그게 뭔지 확실히 알아내지 않으면 안 돼.’

 

그는 피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되어 그 여자에게 나타난 사건들을

차례대로 짚어보았다.

 

피리가 처음 등장한 것은 연상놀이방에서였다. 피리는 그곳 놀이에서 제시된 물건

중의 하나였다. 그 여자는 제시된 물건들을 이용하여 가장 멋진 연애시를 지어 30

무료이용권을 얻었다. 그 흥분 때문이었는지 돌아오는 길에 그 여자는 악기방에

들러 피리를 샀다. 집에서 그 여자는 사가지고 온 피리를 불었고, 그 순간 그 여자의

표정이 변했다. 당황한 것도 같았다. 그 여자는 서둘러 피리를 함에 넣어 제 위치에

놓은 다음 초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 여자는 그림을 그렸다. 피리를 불면서 초원

위를 날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었다. 그 때도 살짝 미소가 떠오르는 듯했지만 이내

당황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온 후 그 여자는 함에서 피리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제법 길게 그 여자의 피리 연주가 이어졌다.

하지만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여자는 피리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피고 있다. 피리에서 뭔가를 찾아내려는 행동 같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머리가 아팠다. 너무 생각에 집중하다보니 정신은 말똥말똥한데도 머리는 지끈지끈

아팠다. 수향은 피리를 내려놓고 수면클 속으로 들어갔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생각의 문이 닫히기를 바랐지만 소용이 없었다.

피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녀는 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리에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휴를 찾을 수 있는

열쇠가 그 속에 들어있는 거 같았다.

 

그녀는 다시 피리를 입에 대고 불었다. 이번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을 불어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했다. 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희미하게

쌔근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저 소린 뭔지? 숨소리, 맞아 그의 숨소리야. 그가 잠을 자고 있는 거야.’

 

그의 숨소리는 거칠면서도 갸냘펐다. 안쓰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가 자고 있다는

게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그가 자신한테 소중한 존재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끈이 끊어져서는

안 되는 그런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자신한테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으로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찾아내리라. 그의 목소리를 듣게 했다면 그를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알게 해줄 거야.

피리 소리가 흘러가는 곳을 찾는다면 어렵지 않을지도 몰라.’

 

 

담돌이 영상수신장치를 연결했을 때 그 여자는 자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마도 밤늦은 시간까지 깨어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여자가 늦은 시간까지 깨어서

무엇을 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그 시간에 잠을 자고 있어서 알 수 없었다.

정보국 영상자료실을 이용해야 할 거 같았다.

 

그는 정보국 영상자료실에 그 여자에 대한 자료 전송 요청을 의뢰했다.

한참 후에 시스템에 입력되지 않은 영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십시요.’라는

문구가 떴다.

 

영계의 시스템에 입력되지 않았다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의심해볼 여지가 없었다.

그는 그게 그 여자에게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교육국의 심의 대상이기에

교육국의 그물망에 걸려 있으면서도 정작 영계의 시스템망에서는 벗어나 있어

교육국에서 요청하지 않는 한 중앙시스템이 개입할 여지는 그 만큼 줄어들었다.

 

그는 단말기 화면에 나타난 문구를 보면서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뚜렷하게 다가오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지는 걸 느낄 수는 있었다.

 

 

마루가 와서야 수향은 수면클에서 밖으로 나왔다. 밤새 피리를 생각하며 씨름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뭐야? 아직까지 수면클 속에 있고? 내가 니 수면클을 얼마나 두드렸는지 알아?”

 

마루는 부스스한 그녀를 보며 퉁박을 주었다. 수향은 그런 그녀를 보며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잠을 못자서. 동이 터올 무렵에야 잠이 들었거든.”

수향은 말을 입안에서 씹으며 졸린 듯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 테고? 연상놀이 연습이라도 했어?“

 

수향은 하품을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게 아니면 패션 구상을 한 거야?“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잠이 오지 않았어.”

 

그래서, 집에 있을 거야?”

 

아니? 푸르밀과 단말기 게임방에 가기로 했잖아. 거기 가야지.

안 가면 내가 가고 싶은 곳만 가려고 한다며 삐질 거 아냐.”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온 거야. 빨리 준비해! 푸르밀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미적대다간 한소리 들을 걸?”

 

푸르밀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지금쯤 단말기 앞에서 정신줄 놓고 있을 걸?”

수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어떻게 그렇게 장담해?”

 

게임 얘기할 때 못 봤어? 우리가 옆에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러더라.”

 

그렇긴 해. 그래도 설마 그럴까.”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정말이네? 너 귀신이다?”

 

그 정도야? ㅎㅎ

 

실실 웃음이 나왔다. 게임에 흠뻑 빠져있는 그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쟤 왜 일어날 생각을 안 해?”

 

정신줄 놓았을 거라 했잖아.”

 

야 푸르밀 우릴 빨리 꺼내줘!”마루가 푸르밀을 향해서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래봐야 들리지도 않아. 그냥 기다려.”

 

약속은 지가 해놓고 어떻게 우릴 이 안에 가둬놓을 수가 있어?”

 

돌아갔다가 다시 와야 할 거 같은데?”

 

그때 푸르밀이 단말기 앞에서 일어나 뇌신을 머리에 쓰는 게 보였다.

 

정신줄은 놓고도 귀는 열어둔 모양이네?”

 

그러게.”

 

미안. 미안해. 게임이 끝나지 않아서. 미안해. 오래 기다린 건 아니지?”

 

푸르밀은 마루가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넌 어떻게 니 생각을 다 보여주고 사냐?”

 

누가? 누가 내 생각을 다 보고 있는 거야?”

 

있어. 니 생각을 들여다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까지만 말할게.

······ 단순하게 게임 하나에만 빠져 사니까 그렇잖아.”

 

푸르밀은 해실해실 웃기만 했다. 마루는 제풀에 지쳐 핀잔하는 걸 그만두었다.

 

수향은 둘을 보면서 휴를 떠올렸다. 그가 뭘 좋아할지도 생각했다.

푸르밀처럼 게임같은 걸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휴의 말에 따르면 그와 자신은 서로 상당히 많이

의지하는 사이였던 거 같았다. 만약 그가 게임 같은 것에 빠져 있었다면

그런 사이는 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연상놀이를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늘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을 거 같았다.

 

늦었어. 가자!”

 

왜 그렇게 서두르는데?”

 

한 번도 안 가봤어?”

 

. 내가 기~”

 

마루가 쿡 찔렀다. 그러면서 말하지 말라고 눈짓을 했다.

 

뭐야? 왜 말을 하다말아?”

 

아니? 내가 연상놀이와 패션 만들기에 푹 빠져서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거든.

마루가 나한테도 단순하다고 할까봐.”

 

단순하면 좀 어떤데. 복잡하게 살면 누가 쿠폰이라도 더 준데?

그냥 생각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

 

다 왔네?”

 

수향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잡을 준비를 했다. 푸르밀이 눈치라도 챌까봐

신경을 더 썼다. 남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는 마루의 충고가 있고나서는 그녀도

바짝 신경을 더 썼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비어있는 게임 전용 단말기는 하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영들도

꽤나 있었다.

 

왜 이렇게 붐빈데?”

 

해보면 알아.”

 

그래? 뭘 알 수 있는데?”

 

게임이 시작되면 생각이 휙휙 지나가는 게 느껴져. 덩달아 몸도 음속을 날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생각의 속도가 단말기 속의 캐릭터보다 앞지르는

순간이 오기도 하는데, 그 순간이 오면 게임이 끝나.

그리고 그 때 생각이 업그레이드 돼. 그걸 확연히 느낄 수 있거든.

그 맛에 게임을 놓지 못하는 거야.”

 

누구나 다 경험하는 거야?”

 

아니? 나도 처음에는 재미를 몰랐어. 번번이 단말기 속의 그 망태한테 지기만

했거든. 근데 차츰 생각의 속도가 빨라지더라고. 그러더니 어느 순간 망태가 나한테

밀리더라고. 그 때 첫 경험을 했지. 물론 아주 낮은 수준이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러고 나니까 갑자기 단말기가 달리 보이는 거야. 매일같이 와서 살다시피 했지.”

 

망태가 니 상대야?”

 

. 처음에 번번이 지니까 얄밉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렇게 붙여줬어.”

 

니가 하는 거 옆에서 봐도 돼?”

 

그래? 재미는 없을 텐데? 직접 하지 않으면 따분할 뿐이야. 그래도 괜찮다면 그

렇게 해. 나는 상관없어.”

 

오늘은 그냥 지켜보기만 할 게.”

 

푸르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켜보는 것은 도를 닦는 것보다도 더 어려웠다.

단말기에 고정된 그의 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휙휙 지나간다는 생각은 본인만 알 수 있을 뿐 수향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생각과 생각이 맞서 초롱초롱 빛나는 그의 눈만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지루하게 이어진 게임이 끝나고 그가 뿌듯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망태를 이긴 것이었다. 화면 속의 망태는 잔뜩 풀이 죽어 사라졌다.

 

내일은 너도 한 번 해봐? 보는 것은 별로거든. 그럴 거면 오지 않는 게 좋아.”

 

. 지가 좋아한다고 다들 좋아하는 줄 알아? 수향인 연상놀이나 패션 만들기에

재능이 있다고. 이곳의 영들을 모두 게임광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너나

즐겨.” 마루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래. 내일은 나도 한 번 해볼게.”

 

마루가 의아한 듯 쳐다봤다. 수향은 마루의 시선을 모른 척 했다.

 

그녀가 푸르밀의 게임을 지켜보면서 생각한 건 어떻게 하면 휴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거였다. 처음은 그런대로 버텼지만 지루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휴 생각을 했다. 휴를 만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단말기를 이용해보자는 생각도 이어서 다가왔다. 나머지 시간을 버틴 것은 단말기가

휴를 찾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친해져보기로 했다.

어쩌면 푸르밀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