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향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처럼 집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이러한 행동은 벌써 여러 날 째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수향은
휴를 머릿속에서 털어낼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터를 잡고 존재하는 그는 생각보다
질겼다. 아무리 털어내도 그는 빈 틈새를 찾아 어김없이 나타났다.
처음엔 그를 생각 속에서 지울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녀가 마음먹은 대로 잊을 수도
떠올릴 수도 있었다. 조정이 가능했다. 헌데 며칠 전부터 그게 먹히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연상게임에서 그녀가 지은 시가
그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향은 거실을 서성대면서 연상놀이방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림은 모두 네 개가 주어졌다. 첫 번째 그림은 새였다. 수향은 조각들을 가지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너는 새가 되어 날 찾아와.’라는 문구를 만들어냈다.
두 번째 그림은 나뭇가지였다. 이번에 수향은 ‘내 생각의 나뭇가지에 너는 날개를
접고 앉곤 하지.’라는 문구를 만들어냈다.
세 번째 그림은 피리였다. 수향은 이번에도 잽싸게 조각들을 짜 맞추어 화면위에
올렸다. ‘내가 피리를 불면 넌 노래를 불러. 부드럽고 아름다운 노래를.’이라는
문구가 화면에 나타났다.
마지막 그림은 사탕이었다. 수향은 그 그림을 가지고 ‘너의 노랫소리가 너무
달콤해서 나는 사탕을 입에 넣고 단맛을 즐기기라도 하듯 너의 노래를 흥얼거리네.’
라는 문구로 마무리를 했다. 마지막 그림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연예시 짓기’라는
제목이 화면에 나타났다.
연상놀이 게임은 제목을 가장 마지막에 보여주는 게 특징이었다. 주어진 그림들을
이용하여 한 편의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내면 마지막에 나타나는 제목에 들어맞는
작품들 가운데 가장 멋진 작품을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하는 게임이었다.
대형 화면에 그녀의 시가 가지런히 떴다. 그녀는 무료이용권을 받고 너무 좋아서
이번에도 폴짝폴짝 뛰었다. 마루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으면 한없이 더 뛰었을
것이다. 그녀는 시구를 읊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악기판매상에
들러 무료이용권 10일치를 주고 피리를 샀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너는 새가 되어 날 찾아와
내 생각의 나뭇가지에 너는 날개를 접고 앉곤 하지.
내가 피리를 불면 넌 노래를 불러. 부드럽고 아름다운 노래를.
너의 노랫소리가 너무 달콤해서 나는 사탕을 입에 넣고 단맛을 즐기기라도 하듯
너의 노래를 흥얼거리네.
수향은 시구를 음미하며 읊조리고 또 읊조렸다. 그럴수록 시속의 ‘너’는 휴로
변해갔다.
그녀는 마루의 말을 더듬어보았다. 그녀의 말 속에 답이 들어있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말했다. 다 잊어서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자신이 그녀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누군가를 마음속에 담아둘 만큼 자신이 많은 시간을 살아냈을 거라고.
자신의 마음속에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아니라고 아무리 부인해도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우겼다. 오히려 잘 생각을 더듬어보라고 충고까지
덧붙였다.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말대로 마음속에 누군가가 있다면, 만약 시 속의 너가 마음속에 있는 누군가라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휴밖에 없었다.
‘정말 너가 휴라면 그가 내 피리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을까? 내가 피리를 불면
대답을 할까?’
수향은 낮에 사온 피리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맑고 투명한 소리가 초원 위를
살랑이듯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정말 그가 그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노랫소리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불고 또 불었다.
‘쓸쓸해서 못 견디겠어. 이제 날 좀 데려가!’
수향은 깜짝 놀랐다. 희미했지만 분명히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피리
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헌데 그 목소리는 촉촉이 젖어있었다. 그녀가 분 가락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의 소리였다.
“휴?-”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촉촉하게 가라앉아서 가냘프기까지 한 그 목소리를 놓칠까봐
그녀는 숨 쉬는 것도 참았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거겠지. 너무 생각을 하다 보니 환청이 들린 거겠지.
마음속에 담아둘 정도라면 옆에 있어야 하는 거겠지. 잘못 들은 걸 거야.
별 일도 아닐 거야.’
그녀는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휴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서 잠시
헛소리를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피리를 제자리에 올려놓고 외출 준비를 했다. 그럴 땐 현실 속으로 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그 방법만큼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이동키를 눌러 번화가 동쪽 변두리에 있는 초원으로 갔다.
온갖 색깔을 지닌 꽃들과 풀들이 한데 어우러져 공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
곳, 그곳을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어수선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주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그래서 마루도 종종 찾는다고 했다.
그녀는 붓과 그림판을 들고 성큼성큼 초원으로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그곳의 꽃과 풀들은 그곳 붓통에 꽂혀있는 붓에만 반응하는
물감들이었다. 그녀는 초원을 돌아다니며 그림판 위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녀가 그린 것은 피리를 불면서 초원 위를 날고 있는 남자였다.
처음에 그리려고 했던 그림은 아니었다. 그녀는 초원을 무대로 그림판을 들고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영들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었다.
헌데 붓을 그림판에 대는 순간 연상게임에서 받은 무료이용권을 주고 사온 피리가
떠올랐다. 피리를 그리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렇다고 그림판에 피리 하나만 덜렁
그려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남자를 생각해냈다. 피리 부는 남자. 움직이는
모습으로 그려야 초원의 생동감에 어울릴 거 같아서 날아다니는 모습을 생각해냈다.
그려놓고 보니 맘에 들었다. 그렇다고 잘 그렸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림판을 들고 서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이봐! 잘 있지? 그만 데려가줘! 나 혼자 여기 남겨두지 마! 이제 날 데리러 와줘!’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촉촉함이 묻어있는 그 목소리였다.
환청이라고 생각했던 게 환청이 아니었다.
“휴-?”
그녀는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혹시 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찾아낼 수 없었다. 어느 곳을 살펴도 휴는 없는 거 같았다.
‘이봐! 잘 있지? 그만 데려가줘! 나 혼자 여기 남겨두지 마! 이제 날 데리러 와줘!’
그녀는 사내의 말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사내는 말하고 있었다.
데려가 달라고. 헌데 왜 자기한테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그가 존재하는 것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듯 속삭이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냉정하게 잘라내지 못했다.
마음 한 구석이 멍멍하게 아팠다.
눈에서 뭔가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흐르는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