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돌은 모처럼 기대감에 들떠서 영상수신장치를 영들의 단말기에 연결했다.
영상화면기 속에 영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푸실의 말대로 지루할 정도로 따분한
모습들이었다. 물론 그들 자신은 삶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겠지만 담돌의 입장에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번에도 담돌은 마지막에 그 여자를 연결했다. 화면 속의 그 여자는 아주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초록빛을 띠던 단말기도 파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오늘은 뭘 했을까? 패션방에 다녀온 모양이군.’
그 여자는 단말기의 옷 보관함에 걸려있는 옷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피고 있었다.
흡족한 미소가 그 여자의 얼굴에 가득 번져 있었다.
수향은 나름 기특했다. 마루와 함께 간 패션방에서 처음으로 옷이라는 걸 만들었다.
물론 마루처럼 그렇게 잘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마루의 솜씨가 부럽지는 않았다.
만들어보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면 머지않아 제법 멋진 옷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거면 족했다.
옷 만들기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연상놀이였다. 그녀는 낮에 있었던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대형 화면에 뜨는 문구들은 그녀를 너무나 실망시켰다.
너무 밍밍했다. 완성된 문구들은 집을 짓기 위해 쌓아놓은 벽돌같다는 느낌을
줄 뿐이었다.
‘내일은 나도 해보리라.’
마루는 두뇌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기억을 잃은 그녀가 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지만 왠지 잘 해낼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녀는 패션방으로 가자는 마루를 졸라서 연상놀이방에 갔다. 꼭 해보고 싶었다.
“잘 해!”
단말기 옆에서 마루가 응원의 표시로 주먹을 쥐어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며 웃었다.
단말기는 초기화면에서 멈춰있었다. 그녀는 화면 하단 왼쪽에 있는 시작키를
눌렀다. 화면에 말조각들이 가득 나타났다. 얼마 후 말조각들 사이로 그림이
나타났다. 그녀는 조각들을 짜 맞추기 시작했다. 조각을 짜 맞추는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손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중앙의 대형화면에는 짜 맞춘 내용들이 입력된 순서대로 떴다가 지워지고 다시
새로운 내용이 뜨는 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같은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물론 말 조각이나 그림은 그 때마다 달라졌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단계까지 가뿐하게 다 마무리를 지었다.
그녀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은 채, 두 손은 가슴에 모으고 대형 화면을 바라봤다.
얼마 후 화면에 완성된 글이 떴다. 그녀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주위에 있던 영들의 눈이 멀뚱거리며 일시에 그녀에게로 향했다.
대가로 그녀는 영계의 시스템을 한 달 동안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무료 이용권을
얻었다.
“축하해. 다 잊었다더니 내숭이었나 봐.”
“내숭? 나 그런 거 몰라. 어제 그제 너 하는 거 지켜본 게 다라고.”
“완전히 빠져 있던데? 나 너처럼 그렇게 흠뻑 빠져서 즐기는 영은 처음 봤어.”
“나도 이게 이렇게 재미있는 건줄 몰랐어. 알았으면 너 따라와서 구경만 했겠어?
왔어도 진작 왔겠지.”
“허긴 그래... 헌데 너 너무 표시 내더라.”
“좋으니까 그렇지. 기분이 좋으니까.”
“기분이 좋아도 너처럼 그렇게 온 몸으로 드러내는 영은 없어.”
“왜? 왜 좋은 걸 드러내지 않는데?”
“글쎄? 그런 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무튼 다들 그래. 너만 특별한 거야.”
“그럼 다음부턴 표시를 내면 안 되겠네?”
“글쎄. 꼭 그래야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영들의 시선은 참아내야 할걸? 아까 못 느꼈어. 모든 영들이 일제히 널
쳐다봤던 거.”
“그랬어? 잘 못 봤어. 좀 조심할게.”
“아냐.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런다고 누가 잡아가기라도 하겠어?”
‘그런다고 누가 잡아가기라도 하겠어?’ 수향은 마루의 마지막 말을 되새겼다.
‘잡혀가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감정을 드러낸다고 잡혀가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았다.
그게 잘못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향은 단말기 속의 무료이용권을 보고 또 보았다. 흡족하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다. 대형 화면에 자신의 글이 뜨는 순간 너무 좋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펄쩍펄쩍 뛰었다. 기쁨이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 헌데 그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던 거 같았다. 그때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느낌도
들었다. 옆에서 함께 기뻐해주었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휴-’
누군가가 자신의 옆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듯했다. 낮에는 느껴지지 않던
그 느낌이 자신의 몸 안에서 다시 살아난 듯했다.
'휴-. 당신이죠? 어딨어요? 내 앞에 나타나주면 안 돼요? 내 주변을 맴돌지만 말고
내 앞에 나타나줘요. 당신이 누군지 보고 싶다구요.'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한참 동안 귀를 기울이고 기다려봤지만
역시나였다. 수향은 마음에서 휴를 내려놓고 연상놀이방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몇 번을 생각해도 설레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수면클에 들어가서도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미소가 입가에 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뿌듯했다. 자신이 대견하기도 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이튿날 수향은 또 연상놀이방으로 향했다. 또 다시 그녀는 무료이용권을 상품으로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루가 너무 표시를 낸다고 또 핀잔을 줬지만 상관없었다.
너무 즐겁고 흥미진진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