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대로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방법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뇌신을 쓰고 이것저것 떠올려보려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작동을 하지 않는 뇌신은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기만 했다.
벗고 싶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뇌신을 잡았다.
그 순간 뇌신의 돌기들이 뻗어 나와 그녀의 머리와 연결됐다.
“오늘은 웬일이야. 뇌신을 다 쓰고 있고?”
맑고 투명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넌 누구야?”
“나. 마루. 니가 번번이 날 거부해서 오늘은 따지려고 왔어. 왜 그랬어?
내가 방문할 때마다 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날 밀어냈잖아.”
“난 그런 적 없는데?”
“아냐. 넌 연결차단장치를 눌러서 날 번번이 돌아가게 했잖아.
난 여기 올 때마다 허탕을 쳐야 했다고.”
“맞다. 내가 그랬어. ㅎㅎ”
순간 담돌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녀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얼른 말을 정정했다.
마루는 볼 일을 다 본 듯 돌아섰다.
“왜?”
수향은 다급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왜는? 돌아가야지? 넌 내가 오는 걸 원치 않잖아. 안 그래?”
정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수향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반가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녀를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고 싶었다.
“그래서··· 화났니? 이걸 써야 하는 건지 몰랐어. 얼마 전 사고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기억을 잃어버렸대.”
“그래? 그랬었구나~, 그런 거라면 내가 한번은 봐준다.”
마루는 노기를 풀고 수향을 향해서 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쨌든 잘 왔어. 할 일이 없어서 무지 심심했거든.”
“집에만 있으니까 그런 거야. 집에만 있으면 심심해. 밖으로 나가자!"
“어디?”
“날 따라와! 내 손 꼭 잡아! 내 뇌신을 이용할 거야.”
“어 나도 이동상태로 변하고 있네?”
“당연하지. 내 손을 잡고 있잖아.”
“어떻게 한 거야?”
“어렵지 않아. 가고 싶은 곳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뿐이야.”
‘넌 어렵지 않겠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한텐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난 기억이 모두 빠져나가서 떠올릴 게 없다고.’
수향은 서글펐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억만큼은
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 왔어. 여기야. 빠져나가자!”
마루는 사뿐히 바닥에 내려섰다.
“어디 갔어?”
“여기.”
마루는 두리번거리며 수향을 찾았다. 그녀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왜?”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는지 몰라서······.”
수향이 울상이 된 채 말했다.
“남아있는 기억이 없는 거야?”
“응. 그런 거 같애.”
“이리 와 봐! 연상놀이라고 하는 건데 내가 해볼 테니까 넌 그냥 구경이나 해봐.”
“알았어. 옆에서 구경하고 있을게.”
연상놀이는 어렵지 않았다. 시작단추를 누르면 놀이를 할 수 있는 첫 화면이 떴다.
화면에는 수없이 많은 낱말 조각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 사이로 그림 하나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러면 참가자는 그림의 단어를 찾아서 연상을 통해 문장을
완성해야 했다. 문장이 완성되면 발송키를 눌러 중앙의 대형화면으로 보내면
되었다. 그러면 다음 단계의 그림이 다시 제시되는 식이었다.
마루는 썩 잘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봤어?“
마루가 씨익 웃으면서 물었다.
“응.”
“재미있겠지?”
“응. 내일은 나도 해볼까봐?”
“좀 어려울지도 몰라. 두뇌를 써야 하거든. 넌 기억을 다 잃어버렸잖아.
급한 거 아니니까 차차 생각해보면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럴까?”
“그래. 그러니 오늘은 그만하고 가자! 생명의 기운터로 가서 생명의 기운을
받아야겠어.”
“생명의 기운? 그건 뭔데?”
“가보면 알아. 자 이번에도 내 손 꼭 잡아.”
몸이 기화되어 그녀의 뇌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루가 너무 꼭 손을 잡아서 손이 얼얼했다.
“준비해! 다 왔어.”
‘이번엔 내동댕이쳐지지 말아야지’
그녀는 몸에 살짝 힘을 주었다. 뛰어내려야 했다.
다행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내동댕이쳐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면서 겨우 중심을 잡았다.
“좋은데? 한 번만 더 하면 완벽해지겠어.”
수향은 기분이 좋았다. 머루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방법을 찾은 듯해서 희망이 보였다.
“이리와! 얼른? 여기야.”
마루가 가리키는 곳은 온갖 색깔들이 뭉게뭉게 떠다니고 있었다.
“색깔이 다 달라?”
“맞아. 온갖 색깔이 다 있어. 색깔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 들어가 봐!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수향은 먼저 빨간 색 기운이 넘실거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발을 디디는 순간 빨간 기운이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춤이라도 출 것처럼 솟구치는 거 같았다.
그녀는 얼른 파란색 기운 속으로 몸을 던졌다. 몸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왔다.
몸을 되돌린 후 그녀는 주황색 기운 근처로 가서 손으로 한 움큼 집어 온몸에 뿌렸다.
이번엔 그녀의 몸이 통통 튈 거 같은 기분으로 바뀌었다.
마루는 여러 가지 색깔의 기운을 조금씩 몸에 지닌 채 나타났다.
“재미있었어?”
머루가 수향을 집까지 바래다주면서 말했다.
“응. 고마웠어!”
진심이었다.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돌 거 같았다.
“너 되게 감동했구나?”
“응. 이런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감동이야.”
“니가 재미있었다니 다행이야. 심심하면 놀러 와! 혼자 다니는 영들도 간혹 있지만
함께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거든.”
수향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었다. 집이 아닌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도, 앞으로 갈 곳이 생겼다는 것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던 그의 말이 붉은색 생명의 기운처럼
힘이 되어 다가왔다.
담돌은 영상수신장치를 끄면서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자가 뇌신을
쓰고 마루영을 맞을 때 그는 마음 한 구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이가 구체적인 언어를 내뱉었을 때의 기쁨 못지않은 설렘이
온몸을 감싸오는 것도 느꼈다.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기대를 해도
좋았다.
그는 밤늦게까지 영상수신장치를 들여다보다가 새벽녘에야 끄고 수면클 속으로
들어갔다. 들뜸 때문인지 깊은 잠도 못잔 거 같았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다시 영상수신장치를 집어들었다. 그 여자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 여자가 막 수면클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런 다음 천천히 그 속에서
빠져나왔다. 화면 속의 그녀는 느긋하게 움직였다. 여유로워 보였다. 생기와 여유,
편안함 등이 그 여자의 얼굴에 가득 묻어나 있었다. 영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의미 있는 외출의 효과이리라.
수없이 낯선 것들 중에서 겨우 두어 가지를 경험했을 뿐인데 효과가 그렇게 크게
나타나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희망의 씨앗쯤으로 여겼던 것이 비트적거리는
과정도 없이 그 여자에게 낯선 현실을 받아들이게 한 모양이었다. 효과가 크게
나타나서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녀가 현실에 적응해가는 것이라면 좋은 징조라고
그는 마음을 다독였다.
그 여자의 표정이 밝아서, 가벼워 보여서 그의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이전까지의 고심 따위는 가볍게 날아갔다.
위원장을 비롯한 위원들도 이 뜻하지 않은 결과에 다들 만족했다.
“다행이네. 결정을 하고도 그 여자의 삶에 우리가 간섭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좀 찜찜했었는데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리기도 하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뇌신을 사용할 줄만 알아도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릴 수 있는 것을
우리가 너무 어렵게 생각한 거 같습니다.”
“전 좀 실망입니다. 이 따분한 생활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까 해서 내심
기대했는데 말입니다.”
푸실이 입을 삐죽이며 딴죽을 걸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크게 신경 쓰는
위원은 없었다. 그냥 다들 하하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잠깐 설레긴 했었지? 그걸로 만족하게나.”
위원장만이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반응을 보였다.
“어쩌겠어요. 하지만 저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켜보는 우리야 그렇다고
해도 그 여자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맞네. 그 과정을 지켜보지 않게 된 걸 감사하세. 그 여자의 삶에 볕이 든 것에도
감사하세.”
“예. 그래야죠.”
위원회실을 나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무거운 분위기의 중심에서 빠져나왔다는 게 그로선 여간 다행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동안 그는 그 여자로 인해 늘 긴장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여자가 휴에게서
벗어나는 게 어렵듯이 그도 그 여자에게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영상수신장치에
연결할 때면 난감한 징후가 나타나기라도 할까봐 늘 조마조마한 마음이 되었었다.
이제 그런 불편한 마음은 싹 버려도 될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