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향은 그를 붙잡고 싶었다. 헌데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는 그를 보면서 왠지 그러면
안 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신 그녀는 현관문 안쪽에서 그의 발걸음이 멀어져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 순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비로소 그녀는 몸을 돌려 텅 빈 집의 조용함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거실벽 한쪽에서는 스크린에 깨알같이 적힌 저녁 메뉴들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녀에게 집은 적막 그 자체였다. 기억이 없어서인지 자신이 혼자
살고 있었다는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방인, 그녀는 이방인이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 기억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단지 투명 유리벽에 차곡차곡 정렬되어 있는 낯선 물건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유리벽을 만져보았다. 그녀의 손이 유리벽을 뚫고 들어가
그 안에 있는 물건에 닿았다. 순간 몸이 오싹했다. 그 느낌이 너무도 낯설었다.
그녀는 손을 빼낸 후 벽에 진열된 물건들을 찬찬히 살폈다. 신체의 각 부분을 닮은
물건들이었다.
기억이 날거라는 그의 말에 희망을 걸고 그녀는 물건들을 유심히 살폈다. 소용이
없었다. 전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낯선 곳에 던져진 기분만이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이건 아니야. 뭔가 이상해. 그의 말대로라면 이런 것들을 기억해야만 해.
헌데 너무도 낯설어. 기억이 나지가 않아.’
그녀는 소파로 가서 깊숙이 몸을 묻었다. 왠지 옆이 허전했다. 누군가가 그 옆에
있어야만 할 거 같았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혼자 살고 있었다면 생소한 느낌은
다가오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는 느낌, 누군가가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는 듯한 느낌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휴’ 그녀는 가만히 불러보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가 잡히지도 않았다.
그 말은 그녀의 머리에서만 맴맴 돌았다.
수향은 며칠 동안 집안에서만 머물렀다. 그녀는 낯선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깥 세계로 나가볼까도 생각했다. 한데 한 번 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녀에게 두렵고도 고통스러운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왠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랬다.
그녀는 바깥에 나가는 대신 소파에 앉아서 하루의 대부분을 휴를 생각하면서 보냈다.
조용히 앉아서 그를 생각하고 있으면 그가 자신의 옆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면 허전함이 조금은 걷어졌다. 텅 빈 집에 생기가 도는 듯도 했다.
2
담돌은 매일같이 그 여자의 동태를 살폈다. 그 여자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파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여자가 소파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며칠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생각에 잠겨 쉽게
빠져나올 거 같지 않았다. 그럴 때면 그 여자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 여자와 연결된 그의 단말기에서는 그때마다 초록빛이 짙어졌다.
그는 심의위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수향영에게서 휴의 잔상이 살아나고 있는 거 같습니다. 그녀가 그것을 선명하게
잡아내지는 못하지만 그녀는 그때의 느낌을 갖고 있어요. 그 느낌이 영의 세계와
겹쳐서 그녀의 삶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녀와 연결된 단말기가 연하긴 하지만
수시로 초록빛을 띱니다.”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있는지 말해보게.”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하네. 지금으로선 그걸 알아내는 게 중요하다네.”
“영상수신장치를 통해서 최대한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보고 그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게나.”
“알겠습니다.”
담돌은 하루 종일 영상수신장치 앞에 앉아서 수향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달라진 게 없었다.
그녀의 입이 열리고 입술이 달싹거렸다. 휴를 부르는 거 같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표정이 변하지 않는 걸로 미루어 새로운 것은 없어 보였다.
위원회가 열렸다.
“느낌뿐인 거 같습니다. 표정도 행동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느낌뿐이라. 그 느낌을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나?”
“지금으로선․․․․․․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도와줄 방법은 없는가? 혹시 생각한 거라도 있다면 말해보게.”
“육의 세계에 있는 그녀의 남편이 온다면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말인가?”
“확신은 할 순 없지만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겁니다.”
“무엇을 어떻게 시도한단 말인가? 육계에 있는 그녀의 남편은 이곳에 오는 순간
과거의 기억을 다 잊을 텐데 말이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거지만.”
“그럴 겁니다. 남편은 다 잊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어렴풋이나마 기억의 잔상이
있다면 스스로 찾아내지 않을까요? 스스로 찾아낼 수 있도록 우리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말입니다.”
“어떤 식으로 우리가 도와준다는 것인가? 그 여자의 삶에 우리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지켜져야만 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물론 그 원칙은 지켜져야 합니다. 저 역시 그에 동의합니다.”
“그럼 그 원칙을 지키면서 도와줄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전 다만 그 여자의 남편이 이곳에 왔을 때 그 여자 가까이에 있게 해주자는 것을
제안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 다음은 그 여자에게 맡겨야죠.”
“그 여자가 찾아낼 수 있겠나?”
“지금은 그러길 바라야죠.”
“그 여자가 남편을 찾아낸다고 해보게. 그럼 그 여자의 육계의 잔상이 사라지겠나?”
“육계와 연결된 게 없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확실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장담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육계와 연결된 끈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 여자의
육계의 잔상도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해볼 뿐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확실한 건 하나도 없군. 그래도 뭔가는 해봐야 할 테지.”
위원장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택은 해야 했다.
늘 그렇지만 항상 선택은 의외의 상황에서 결정되었다. 그렇다고 어떤 확신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져서 선택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결정들은 기계적으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빗나갈 때가 너무도
많았다. 비슷한 상황임에도 영들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럼에도
선택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보면서도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담돌의 말을 되새겨봤다. 다른 방법들도 한번 이것저것 떠오려보았다.
없었다. 그가 제안한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세. 그렇게 추진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네. 그게 우리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면 그렇게 해야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나.”
위원장은 위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그들도 자신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어쩔 수 없네. 허면 그 여자의 남편은 언제쯤 이곳에 오게 되어 있는지 한번
확인해보게.”
“2개월 훕니다. 정확히 3월 20일입니다.”
“얼마 남지 않았군. 그때까지는 그 여자를 지켜봐야 하겠군.”
“그 이후까지 지켜봐야 할 거 같습니다.”
담돌은 위원장에게 그 여자의 상황을 일깨워주듯 말했다.
“그렇겠군. 지켜보고 새로운 사실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게.”
“예. 그러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새로운 사실이 나타나는 일은 희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계의 시스템이 입력됐다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의 반응은 예사롭지 않았다. 도무지 영계와 접촉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휴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왜 저 여자는 뇌신을 사용해서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지? 왜?’
그는 소파에 푹 파묻혀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생각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휴의 잔상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 여자의 뇌신의 연결 신호음이 깜빡거리는
것이 영상수신장치에 잡혔다. 그 여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뇌신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여자는 뇌신을 손으로 집어들더니 불빛이 반짝이는 곳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신호는 끊어졌다. 그 여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뇌신을 이리저리
살폈다.
‘맙소사. 뇌신을 사용할 줄 모르잖아? 그게 뭐하는 건지도 모르고 있어.’
담돌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육계의 잔상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영계의 시스템이 제대로 입력되었다면 아무런 느낌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을 물건이었다.
그는 서둘러 교육국으로 돌아가서 심의위원실을 찾았다. 다른 특별한 일이 없는지
위원장을 비롯한 위원들이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위원장님 더 중요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여자의 기억장치에 영계가 다 입력되지
않은 거 같습니다.”
“지금 뭐라 했나? 그 여자의 기억장치에 영계가 다 입력되지 않았다고 말했나?”
위원장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물론 다른 심의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예.”
“지난번엔 영안경만에 반응을 했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랬습니다. 그땐 정말 영안경만에 반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기억장치에 영계가 입력되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나?”
“그 여자가 영계의 시스템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영계의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지 못하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오늘 오전에 뇌신이 울렸는데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혹시 연결을 피한 건 아니었나? 한번 잘 생각해보게.”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푸른색 깜박이를 망설임도
없이 손가락으로 꾹 누르더군요.”
“시스템을 이용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닙니다. 여러 날 동안 그 여자는 집에만 있었습니다. 걱정이 돼서 틈틈이
그 여자의 단말기에 연결해서 지켜봤습니다. 잠시의 혼란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었죠.
헌데 뇌신이 울렸을 때 그 여자의 행동을 보는 순간 이유가 분명해지더군요.
그 여자는 귀찮은 게 아니었습니다. 반가운 표정으로 뇌신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그러더니 아무런 갈등도 없이 연결차단 부분을 쿡 누르더군요.
머리에 써야 하는 거라는 걸 모르는 태도였습니다. 당연히 신호음이 끊어졌죠.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뇌신을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는 게 확실하군 그래.
그러니 이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할 테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어떻게요.”
“만약 다른 모든 것에도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
“그렇다면요?”
“영안만 뜨인 거겠지.”
“영계는 입력되지 않고 영안만 트였다구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아까 담돌이 한 말을 잘 생각해 보면 담돌의 생각이 맞을 듯싶네.”
“아까 담돌의 어떤 말을 말입니까?”
“담돌의 말에 의하면 며칠 동안 수향영이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했네.”
“맞아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휴에 대한 잔상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네. 하지만 그게 휴에
대한 잔상 때문이 아니라 영계의 시스템이 입력되지 않아서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지난 번 이야기로는 휴에 대한 잔상이 살아나고 있는 거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와 연결된 단말기가 수시로 초록빛을 띤다고 했습니다.”
“휴에 대한 잔상이 남아있는데 영계의 시스템은 입력되지 않았다면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맙소사. 할 수 있는 게 휴를 생각하는 것밖에 없었겠군요. 그 여자의 머릿속에는
휴에 대한 잔상만이 있을 테니까요.”
“맞네. 그 여잔 할 게 없어서 휴를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거네.
그렇지 않으면 불안했던 거지. 아무 것도 할 게 없으니 그럴 수밖에.”
“휴라도 생각해야 혼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죠.”
"그렇겠군요. 하루의 대부분을 휴를 생각하면서 보낼 수밖에 없었겠군요.”
“맞네.”
“큰일입니다.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위원장님, 어떻게 영계가 입력되지 않을 수가 있죠?
영안만 트인다는 게 가능합니까?”
“현실로 나타난 걸 보면 불가능한 건 아닌 모양이네.”
“이해가 안 갑니다. 영계는 입력되지 않고 육계의 잔상은 조금 남아있고.
뭔가, 우리가 집어내지 못하고 있는 뭔가가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지겠지. 파, 자네 말대로 우리가 집어내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뭔가가 있다면 그게 뭔지 찾아내야 하네.”
“위원장님, 저절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좋은 해결책이 아니라네. 우리가 그걸 찾아내야 다음에 벌어질 사태를 수습할
수 있네.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보게.“
“너무 뜻밖이어서 지금은 뭐라고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합니다, 위원장님.”
“그러는 게 좋을 거 같군. 휴에 대한 잔상만 남아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니 말이네. 그 여자에게 상황이 너무나 가혹하게 돌아가고 있어.
영계가 입력되지 않았다는 것은 영계에서 선택할 삶도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거네.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기도
하네. 갑자기 막막해지는군. 영계의 시스템이 입력되었다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말이네.”
위원장은 가슴이 미어지는 거 같았다. 처음 있는 일이라서가 아니었다.
한 생명체로서 그 여자의 삶이 가슴 아팠다. 그 여자의 삶을 바꿔줄 수 없어서 더
아프게 다가왔다.
"내일 다시 모이도록 하게나. 좋은 생각을 찾아보라는 당부 외에 다른 부탁은 안
하겠네. 담돌, 자네는 그 여자를 좀 더 살펴보고 내일 이 자리에서 자세히
얘기하주기 바라네.“
“그러겠습니다.”
담돌은 곧장 집으로 왔다. 오자마자 그는 단말기에 연결된 영상장치를 켰다.
영상장치는 그 여자의 단말기와 연결된 부분에 와서 여전히 초록빛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