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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새 신랑


BY 조 양 희 2010-11-10

언젠가부터 시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날부터 김씨 아저씨란 사람이 집안에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김씨아저씨가 집에 오시는 날엔 유일하게 내가 부엌에서 해방되는 날이였다.

부엌에서 시어머닌 지지고 볶고....얼굴엔 화장까지 하시였다.

그래도 나는 시어머니 말씀대로 이웃집 자상한 아저씨가 시어머님을 도와주시는 분인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나면 아저씬 돌아가시었고 시어머님도 뒤따라 나가셨다간 두세시간이 지나면

돌아오시곤 했다.

그런데 우연히 나갔다 들어오신 시어머니의 목덜미에서 키스마크를 보게 되었다.

이 삼일이 지났는데도 아저씨가 집에 들리지 않으시면 모든 히스테리를 시어머님은 내게 풀었다.

나도 모르게 내가 더 아저씨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래야지만 시어머님은 내게 볼수없던 다정한 말과 웃음을 보여 주시니까..

그날도 시어머님이 나갔다 들어오셔서 방에 들어간지 20분쯤 지났을까?

바깥이 시끌벅적하더니 왠아주머니의 괴성과 함께 장독 깨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연이어 큰방문이 열리면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아저씨의 집사람이 쳐들어온것이였다.

그 늦은 밤에 온동네 사람들이 다 모이고 시어머님은 머리채를 잡혀 끌려나오고..

한마디로 난리법석이 난것이였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볼뿐이였다.

큰 시동생도 말리는가 싶더니 이내 멈추어버렸다.

그러자 나랑 동갑이였던 시동생이 나서서는 싸움을 말렸다.

무슨 구경났냐며 모여있던 동네사람들을 다 보내고서 안방에 모여서들 다짐을 하는듯했다.

그 날 이후로 그 아저씬 집에 들리지 않았고 한동안은 시어머님은 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내게

화풀이를 해댔다.

어린 마음이였지만 나는 그날이후로 동네사람들이 부끄러워서 되도록이면 바깥 출입을

자제하게 되었다.그냥 부끄러웠다.

그래도 시어머님은 어떤 마음이였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계속하시였다.

아이도 어느덧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

애가 애를 낳아서 정확한 육아상식도 없이 단지 책으로만 공부를 하여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될 준비도 없이 된 엄마였지만 책임감이 뭔지를 서서히 알아가고 있었다.

시동생들도 점점 아이에게 다정하게 대하기 시작했고 내가 부엌에서 일을 할때면 아이랑 잘

놀아주기도 했다.퇴근해서 돌아올때면 아이의 과자를 사 들고 올때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형수'라고 불러주기 시작도 했다.

그렇게 점점 나도 식구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매일같이 들락거리던 시누이도 아이가 태어나면서 오는 횟수가 훨씬 줄었다.

이렇게 점점 모든 생활에 적응하고 익숙되어 갈때쯤 느닷없이 시어머님은 자주 외박을 했다.

그러더니 시어머님은 아직도 어리기만 한 나에게 모든 살림을 일임시키고 재혼을 하신단다.

상대는 사별을 한 자식을 일곱이나 둔 아저씨였다.

자식들 여섯명은 다들 출가를 했고 막내아들 하나만 아직 미혼이였으며 큰아들 내외와 함께

사시는 분이였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볶듯이 황급히 양쪽 자식들과의 상견례를 마치고 시어머님은 그 집으로 가셨다.

일주일에 한번쯤 집엘 오시면 늘 대추와 인삼을 잔뜩 사갖고 오셔서 달여가셨다.

그래서 하루는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어머님 대답은...

"영감이 혼자 산지가 오래되어서 잘 서지 않아서 이거라도 믹여볼라꼬.."

"....."

거리낌없이 며느리인 내게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답을 해 주셨다.

듣는 내가 오히려 민망했다.

시어머님이 시집가시고 나니 편한 점도 있었다.

일도 밀려 났다가 한번씩 몰아서 하기도 하고 가끔은 낮잠도 늘어지게 자기도 했다.

이제는 일수도 다 갚았고 오빠도 모든 수입을 내게 주었다.

나름데로 가계부도 작성하고 통장도 하나둘 늘어가기 시작했다.

장마철이면 온 지붕에서 비가 새고 방안에 곰팡이도 곳곳에 피어나는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야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보단 쉽지가 않았다.돈이 좀 모이면 오빠의 악기를 새로 사야만 했다.

악기가 밥줄이니 새롭게 장만을 안할수도 없었다.

하지만 목적이 생겼기에 허리띠를 더욱더 졸라매며 아이와 오빠와 나와의 보금자리 마련을 위해

알뜰살뜰 살게 되었다.아이옷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부탁해서 얻어 입혔고.반찬들도 이삼일에

한번씩 아이를 업고 버스를 타고서 시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서 얻어 오기시작했다.

시어머님은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다 새 시아버지를 만나셨기에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초량시장에서 또 장사를 같이 하셨다.

그래서 그곳엘 가면 시어머님은 이것 저것을 많이 챙겨 주시곤 했다.

공짜로 여러가지 반찬종류를 얻어 올수 있었기에 기꺼이 자주 들렸다.

시어머님이 재혼하시고.시누이내외의 출입이 줄어들었지만 집에는

세명의 건장한 청년과 남편이랑 나까지 다섯명의 먹거리가 장난아니였다.

또 아이의 분유값도...젖이 모자라 분유로 대체할수밖에...

여전히 세남정네싀 새벽도시락은 싸줘야했고...

이렇게 철없던 열여덟의소녀가 아이엄마가 되면서 점점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어엿한 또순이 새댁이라 동네에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