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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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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BY 꿈을 이루다. 2008-10-14

만남이란 참 묘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남자로 받아들인 남편과의 만남도 어느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노인과의 만남도 원한바가 없었다. 뜻하지 않은 만남 속에서 노인의 말은 한동안 계속됐었다. 노인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기라도 하듯, 1년도 채 함께 살지 못한 남편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1시간이 흐르고 2시간이 흐르고 3시간이 바람결에 날리듯 흘러갔지만 세나는 노인의 말에 점차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조차 닫으려던 마음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잘 견디셔서 이 자리에 계시네요... 저는 웬지 할머님이

부럽네요.“ 세나가 말했다.

“내가 부럽지? 내 나이가 부럽지?...나도 그랬었어...새댁 나이 적에...얼른 내 아이가

커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지. 내가 늙는 것 따위는 대수도 아니었어...그런데, 사람 욕심이 어디 그래? 이 나이 되고 보니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남편이 죽었을 때로 돌아간대도 좋아. 그럼, 그리 빡빡하게 살지는 않을 거야. 쉬기도 하면서 계절도 느끼고 맛난 것도 먹어보면서 그 나이에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즐겨보고 살 거야...“

족집게 도사처럼 세나를 꿰뚫는 노인의 말들이었다. ‘즐겨보고 살 거야’의 여운이 한동안 세나의 귓가에서 메아리 되어 날아다녔다.

즐기며 산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큰 평수의 아파트에 모아놓은 재산도 있고 잘 나가는 아들도 있고 가정부까지 부리는 노마님께서 고생스런 옛날로 돌아가서 젊음을 찾고 싶다고 했다. 젊음...그게 뭐에 쓸데가 있는 거라고... 갖은 것 없는 자신의 삶에서 즐길게 뭐가 있단 건지, 갖고 있는 젊음만으로도 복으로 여기라는, 현실감과 뒤떨어지는 노인의 말이 쉬이 공감되지 않는 세나였다. 하지만 젊은 시절 꽃다운 나이에 결혼을 하기가 무섭게 일찍 남편을 잃고 세상을 맞서던 노인의 경험담은 존경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시댁에서의 구박과 학대, 주변의 멸시, 노인은 갓난쟁이 아들을 품에 안고 남몰래 눈이 짓무르도록 울었다고 했다. 도망치듯 시댁을 벗어나서 안 해본 것 없다던 경험담은 무용담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할머니... 좋은 얘기들 감사해요...저 이제 가봐야겠어요. 애들이 학교에서 올 시간이라...”

어느새 오후 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엄마가 집에 없으면 불안해하는 아이들 때문에 세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집안에서 아이들을 맞아주었다. 그것을 철칙처럼 여기며 지키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후 2시 30분까지는 막내 지연이를 위해서 귀가해야만 했다. 점심도 거른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 세나였지만 생판 모르는 남의 아픔을 달래고픈 마음으로 오래토록 곁에서 많은 얘기를 해야 했던 노인의 빈속은 어떨지, 주머니 속에 돈이라도 몇 푼 있었더라면 음료수라도 사서 건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몇 시간동안 앉아있던 엉덩이가 일어나고 보니 습기에 축축해져 있었다. 마른 솔가지 몇 개를 털어내고 노인에게 인사를 건네려고 하니 노인이 스웨터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곤 꺼낸 것을 세나의 손을 살포시 잡아끌더니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세나의 손바닥 위에 한번이 접히고 두 번이 접혀서 살짝 원기둥을 그리고 있는 만원짜리 지폐가 놓여있었다. 세나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처음 보는 노인과의 오랜 수다는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 인연으로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돈은... 아니었다. 스킨로션 하나 제대로 바르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궁상스런 차림새까지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노인의 배려에 비참함에 젖은 세나가 다시 받은 것을 노인의 손에 올려놓았다.

“무슨 돈을 제게 주세요... 제가 그렇게 어려워 보였나요?”

“받아, 뭔가 주고 싶은데 갖고 있는게 이것 밖에 없어서 그래. 고생이야 젊었을 때

사서도 한다잖아. 지금 어려운 건 고생도 아니야. 이게 뭐 얼마나 도움 된다고 이걸 주겠어. 그냥 뭔가 주고 싶었어.“

인상만큼이나 따뜻한 목소리로 노인이 말했다. 동정은 아니라니 다행이다 싶었지만 쉽게 받을 수도 없는 돈이었다. 하지만 노인도 쉽게 돌려받지 않을 것 같았다.

“할머니... 저 내일 여기 또 나올 거예요. 아까 만났던 시간쯤에 다시 나오실 수 있겠어요? 제가 맛있는 거 준비해 올게요.”

즉흥적인 생각이었지만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운동도 될겸, 정신교육도 될겸, 다시 만나서 나쁠 것 없는 노인이었다.

“그래, 좋아. 내일 또 만나자구. 이름이 뭐야? 오래토록 얘기하고도 그걸 못 물었네.”

“그러게요... 저는 명석이 엄마에요.”

언젠가부터 이름을 물으면 그리 대답하고 있었다. 당연한 것처럼... 점점 ‘이 세나’라는 이름 석자는 잊혀져가고 있었다. 때론 그 사실조차 서글픈 세나였다.

“그래, 명석이 엄마... 나는 태육이 할머니라고 불러. 손자 놈 하나 있는데 그놈 이름이 태육이걸랑. 아무튼 좋은 친구 생긴 것 같아서 좋아...”

 

집으로 돌아온 세나는 낮에 만났던 노인의 말들을 되씹으며 지지리 궁상스런 자신의 삶에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고 싶었다. 쉽게 벗어 날 수 없다면 있는 대로 받아들여보자, 하는 의욕이 작은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망친 그림에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리는 심정으로 남편을 대해보고 싶었다.

벌써 밤이 깊은 시간이었다.

명석이가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시간이 밤 10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아들은 숙제를 해야 한다며 1시간 가까이를 책상에서 앉아 있었다. 간식을 위해서 오랜만에 핫 케익을 구워 먹였다. 아이들이 잠 든 것을 확인하고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00시 23분...을 지나고 있었다. 벌써 새벽으로 접어들었다. 쉽게 먹은 다짐이 아니었었다. 다시 한 번의 기회... 어쩔 수 없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자... 그리도 다짐을 하고 또 했건만 벌써 막막함을 느꼈다.

핫 케익을 명석이에게 구워 먹이며 생긴 몇 안되는 설거지를 마친 세나가 싱크대 서랍을 열었다. 받았을 때 모양 그대로 만원짜리가 원기둥 모양으로 누워있었다. 그때까지 그 돈이 얼마인지 세어보지도 않았던 세나였다. 돌돌 말린 그것을 펴서 하나, 둘...세어 보았다. 다섯 장...5만원이었다.

 

쾅쾅쾅!!!

“야!!! 문 열어!!!”

올 것이 오고 야 말았다. 저승사자보다 더 두려운 술 취한 순남의 등장에 세나의 가슴이 방망이질로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